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80화 (180/317)

# 180

복수.

그 말에 프레드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망설임이 떠올랐다. 하지만 1회차의 그와 지금의 그는 달랐다.

“물론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중요한 것들을 해결하고, 복수까지 하게 해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

나는 침묵하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이 선택한 몇몇 또한 저의 길드에 받아들일 겁니다. 제 길드는 제국에서도 상당히 인정받는 길드이며 동시에 수련자들이 만든 길드 중 단연 최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조사해도 알게 될 사실이다. 지금이야 정보가 통제되어 있지만 미국 쪽 수련자들은 곧 그런 제한이 풀릴 테니까.

“그리고 당신이 제 길드원이 된다면 저는 페소타 지역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당신의 의견을 상당히 참고할 예정입니다.”

“제 의견을 상당히 참고한다는 얘기는….”

“당신이 피해자들을 살릴지 죽일지 대부분 선택할 수 있다는 이야기죠. 가해자들을 구별할 수 있고 저는 그 말을 믿어 드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피해자들 중 일부는 제 길드에 입단시켜 드리죠.”

물론 입단한다고 한들 실력에 따라 견습을 못 벗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혹은 그 수준에도 끼지 못하는 잡부 수준으로 계약될 수도 있었고.

그러나 어차피 이 제안은 그의 약혼녀를 목적으로 하는 제안일 뿐이다. 공식적으로 길드가 그와 그의 약혼녀를 보호해주겠다는 제안. 거기에 더해 은혜라도 입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통해 은혜를 갚을 기회도 줄 수 있었고.

‘피해자들을 신경 쓰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니까.’

피해자 전체를 신경 쓰는 것 같지만 프레드의 성격상 그게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1회차의 프레드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으니까. 제 사람을 챙기는 것에는 끔찍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떤 의미로, 대외적으로 알려진 내 성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처분은 오로지 당신에게 넘길 생각입니다.”

물론 그들을 용서하거나 살려줄 수는 없었다. 단지 살려두고 오래도록 괴롭히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제국도 본보기로 그런 짓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다.

“제 선택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제국에 넘길 겁니다.”

“…제국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제가 손을 써 드리죠. 적어도 의심만으로 처형당하는 일은 없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 뒤로는 그들의 행동에 달렸습니다. 제국의 의심을 피하고 신임을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겠죠.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다입니다.”

그게 최선이다. 프레드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그 정도만 되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말만 그렇지 크게 신경을 쓰는 모습이 아니었다.

앞서 알려준 현실은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것이 가능하다는 시점에서 내 영향력을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무리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무리는 아니지만.’

이전부터 준비했던 것을 시작할 뿐이다. 준비 없이 그냥 부딪쳤다면 무리하는 게 맞았겠지만.

솔직히 착각하도록 두는 것이 이득이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약혼녀의 안전,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의 보호, 대외적인 피해자들의 구제. 거기에 더해 복수까지.

그에게는 한없이 유리한 조건들이다.

그래도 자신이 뛰어나다는 자각은 있었기 때문일까. 내가 그를 위해 이 정도 투자를 한다는 것에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한참 동안 내 제안을 곱씹더니 얼굴이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저 조건들이 사실이라면….”

“사실입니다.”

다는 단호하게 말했고, 프레드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고, 프레드는 그런 내 손을 잠시 바라보더니 곧바로 꽉, 붙잡아 왔다.

그의 미소는, 조금이지만 비틀려 있었다.

***

페소타 지역을 청소하는 것 자체는 후발대의 참여 이후에 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준 뒤 프레드와 헤어졌다.

그렇게 말하고 하루 만에 후발대가 합류했고, 후발대를 본 프레드와 미국 쪽 수련자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후발대라는 것이… 고작 5명입니까?”

“맞습니다.”

프레드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단순히 죽이는 거라면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당신과의 계약이 아니었다면 혼자서 쓸어버렸을 겁니다.”

정확히는 거짓말이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 황실 창고에 간다는 보상 때문에라도 이들과 함께 쓸어버렸을 거다. 나 혼자 쓸어버리고 그런 보상을 받으면 말이 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최근 귀족가들이 슬슬 우리를 견제하는 모습이 보여서 무척 귀찮아지고 있었다.

꿀꺽.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에 프레드의 얼굴에 긴장이 어린다.

그런 그들을 가볍게 무시한 주하연이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미안해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그냥 다 떠넘기려니 조금 미안하기도 해서 이것저것 처리하다 보니까….”

“아닙니다. 딱 적당한 때 오셨어요.”

“오빠, 그쪽 지역은 어때?”

“완전히 점령당했어. 거의 대부분이 척살이야.”

“음… 그런 상황이라면 황제는 다 죽여달라고 할 거 같은데… 아니, 말만 하면 알아서 척살하려나? 군대가 부족한 것은 아니니까….”

“우리에게 처리해 달라고 할 가능성이 높아. 직접 처리하려고 하면 많은 귀족가들의 반발이 있을 테니까. 우리가 처리한다면 반발이 최소화될 테니 아예 전적으로 맡기겠지.”

무엇보다 내가 맡았던 지역은 무법자들이 전멸해서 헬모사와 티드린드 출신 무법자는 없다는, 반발하기 힘든 전적도 있으니까.

“신후 오빠, 그럼 바로 가는….”

“남은주?”

음?

남은주가 내게 바로 갈 거냐는 말을 꺼내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첫날 내게 귀찮게 굴었던, 미국 쪽 지역에서 살아남은 한국인 남자가 보였다.

“은주, 너 은주 맞지?”

“성훈…아?”

남은주는 경악한 표정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할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갑작스러운 상황에 일행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쳤다.

“아는 사이야?”

주하연의 물음에 남은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 네. 그게….”

“친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법 친했던….”

이성훈의 말에 일행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친구? 친구가 왜 미국에….”

“유학 갔거든요. 집이 좀 살던 애라… 설마 탑에 있을 줄은….”

재벌 같은 것은 아니고 그냥 돈 좀 있는 집안이라고 덧붙였다.

남은주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근데 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페소타 지역은 엉망이라던데….”

남은주가 이제서야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다.

이성훈이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아… 뭐, 응. 지금은 괜찮아.”

본인들 말대로 상당히 친했던 모양이다.

나는 이성훈을 관리자의 눈동자로 확인했고, 레벨과 능력치 잠재력을 확인했다.

‘평균이군.’

갓 중층에 도착할 만한 수준은 되었다. 그러나 딱 그 정도다. 레벨도 능력치도, 스킬도 뭐하나 특출난 것이 없었다.

잠재력도 중 수준. 그냥저냥 평범한 수준의 수련자는 될만한 수준이다. 크게 뛰어나지는 않으나 크게 부족하지도 않았다.

일행은 신기하기도 하고,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모습이었다.

이성훈의 대답에 석연치 않은 모습을 느꼈는지 남은주가 주춤했고,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기야 서로 안 본 지 4년이다. 게다가 그 4년이 탑에서의 4년이고. 서로에게 조금 괴리감이 느껴져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한바다가 나섰다.

“일단 방금 도착했으니 오늘은 쉬고, 다음에 이야기해. 시간은 많으니까.”

“아, 네. 그럼 따로 이야기할 테니까, 나중에 보자 성훈아.”

“…어. 알겠어. 실례했습니다.”

이성훈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실례했다는 말을 건네고는 곧바로 물러났다. 눈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색한 공기도 잠시, 일행과 함께 자리를 피했고, 우리끼리만 남게 되자 남은주에게 관심이 쏟아졌다.

정확히 어떤 사이였는지, 많이 친했는지, 어떻게 이렇게 만나게 되었냐는 둥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확실히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같은 국가 출신으로 지인이나 친구가 만나게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가족끼리 소환되는 경우는 조금 더 흔한 편이었고. 대표적으로 나연과 나서윤은 아예 자매끼리 같이 소환되었다.

그러나 타국에 있던 친구가 같이 소환되어, 중층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나조차 조금 당황했을 정도였다.

이성훈은 상당히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한다. 처음 만난 건 초등학생 때. 부모님끼리 조금 아는 사이였다고.

“뭐, 집안은 제법 차이가 나긴 했지만요. 저는 서민이었고, 쟤는 그래도 제법 사는 집이라….”

자신이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 학점을 신경 쓸 때 이성훈은 아예 유학을 가버렸다고 한다.

“자주 연락하기는 했었지만….”

‘흐음….’

유학을 간 상태인데도 자주 연락을 하고 지냈다라….

확실히 많이 친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남은주는 조금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름 잘 살던 애가 탑에, 그것도 조사 결과 시궁창인 장소에서 뭔 고생을 했을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운 기색을 비추기도 했다.

문득, 튜토리얼에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친분….’

묻어두었던 기억. 지금까지는 잘 지내왔지만,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다.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든다.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남은주는 이성훈을 찾아갔다. 나는 비밀리에 하유진을 불러 둘을 감시하도록 하고 둘이 만나는 사이 주하연을 불러들였다.

남은주와 가장 친한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함께 행동해왔던 주하연이었으니까.

“은주는 어떻습니까?”

“혼란스럽고, 당황해 하더라고요. 확실히 많이 친하기는 했나 봐요. 그리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이성훈을 길드에 영입해야 하나?’

받아들여도 상관없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 찝찝하다. 아니, 솔직한 말로는 무척이나 불쾌했다.

괜한 변수가 끼어들었다. 특히 그만큼 친하다면….

‘인맥을 빌미로 접근하는 이들이 생길 가능성이 높지.’

1회차에서 흔했던 일이다. 인맥을 통해 타 파티나 길드에서 뛰어난 이를 영입하려는 시도는. 게다가 최근 길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툭툭 건드려오는 귀족들도 늘어난 추세다. 핵심 길드원인 남은주에게 다가갈 기회가 생겼는데 그냥 방치할 놈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길드의 핵심 인원과 친분이 있는 이를 배척하는 것도 그림이 좋지는 못했다.

게다가 남은주다. 이전 튜토리얼에서 있었던 일을 확인한 만큼 그냥 넘기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과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내 길드는 최고이며 생존을 중시하는 남은주가 당장 나를 배신할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만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하필 타이밍도 최악인데….’

얼마 남지 않았다. 비록 현재가 1회차와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이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늦게 중층에 도착했던 나도 알고 있는 사건일 정도였으니까.

내가 고민하는 것을 느낀 주하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 자세히 알아볼게요.”

정확히 어떤 사이였고, 얼마나 친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지까지도.

아마 과거와 똑같지는 않을 거다. 4년 만에 만났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더 친근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 지구에서의 인연이 이어진 거다. 더 특별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네.”

내 복잡한 심경을 알아챘는지 주하연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남은주와 이성훈의 일과는 별개로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나는 일행들을 불러모았고, 프레드와의 이야기를 전했다.

“괜찮겠어요? 황제가 달가워하지 않을 거 같은데….”

피해자들을 살려서 황제에게 맡긴다고 하자 주하연이 우려를 표해왔다.

그럴만하다. 인력이 부족해서 이쪽에 맡겼는데 일을 처리하다 말고 떠넘기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잘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것만 해결된다면 상관없겠네요. 하층 처리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요.”

주하연의 말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 오빠 인재 욕심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네.”

“신후 님이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 보는 눈도 좋으시니까.”

“그건 그래요. 아멜리아를 생각하면… 딱 하나 영입한 마법사가 그런 괴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일행들이 떠드는 와중에도 남은주는 침묵했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남은주를 무시하고 일행들에게 말했다.

“그럼 방침은 충분히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복수도 도와주고 사람도 골라야 하는 만큼 미국 쪽 인원들도 함께 갈 예정입니다.”

움찔.

내 말에 남은주가 반응했다.

“그들의 보호는 하연 씨와 은주가 할 예정입니다. 전투는 나머지 인원들로 충분하니까요.”

일행들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되어 있으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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