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171화 (171/317)

# 171

네비오스가 제안한 방법은 간단했다.

시스템과 모종의 관계를 맺은, 방랑 상인이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아이템의 시련에 간섭해서 원래 한 번에 봐야 하는 시련을 단계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하겠다? 난이도 높은 시련은 실력이 늘면 추후 치르면 되고?”

사샤의 작은 얼굴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내가 가진 지식이라고는 계약자에게 받은 것이 다라서 잘 몰라. 그런데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야?”

“탑에 상식이 어딨어?”

나연의 반박에 내심 동의했다.

수련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방법이 방랑 상인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물론 대가는 필요합니다. 기왕이면 포인트가 좋지만… 금화로도 가능하죠.”

방랑 상인의 좋은 점 중 하나다. 더럽게 비싸기는 하지만 포인트는 돈 주고도 사기 힘든 것이기에 대체 자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얼마나 듭니까?”

“단계에 따라 다릅니다. 3단계로 나눈다면 3천 골드 정도. 2단계로 나눈다면 천 골드면 됩니다.”

진짜 더럽게 비싸다. 아니, 미래의 전설급 아이템을 당장 쓸 수 있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하다.

“2단계로 나누면 1단계만 통과했을 때 어느 수준이죠?”

“레어. 상급에 해당하는 레어 수준입니다. 3단계로 나눌 경우에는 평범한 레어고 2단계까지 시련을 마치면 슈퍼 레어급이 됩니다.”

네비오스는 슬쩍 한바다를 바라보았다.

“2단계도 힘들 것 같기는 한데… 뭐, 계속 성장하실 거니까요. 원체 수련자들의 성장이 빠를 거라고 듣기도 했고, 옆에 계신 분도 있으니까….”

내심 3단계를 권하는 모양새다.

미래에 전설급이 될 아이템을 미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좋다. 그만큼 장비에 먼저 익숙해 질 기회를 얻는다는 거니까.

다만 오직 그것만을 위해 몇천 골드를 소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도 나는 저러한 수정을 받는 것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그냥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템의 능력도 등급에 맞게 끌어낼 수 있다고 하니까. 1회차에서 아이템의 가격을 살펴보면 상급의 레어 아이템이 1천 골드를 넘는 경우도 있었고, 슈퍼 레어급 장비는 5천 골드가 넘는 것들도 있었던 만큼 충분히 이득에 가까웠다.

중층에 연결된 하층이 두 개밖에 안 되는 시점이라 수련자들이 가진 골드가 얼마 안 되기는 하지만, 나는 예외니까.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던전에서 출토된 아이템도 희귀하니까.’

나는 인벤토리를 통해 골드를 확인했다.

다행히 골드는 충분했다.

인벤토리에 이렇게 골드가 많은 이유는 간단했다.

1회차의 습관 때문이다.

귀중품은 주로 인벤토리에 보관했고 그게 습관이 되었다. 뭐, 거의 모든 수련자들이라면 갖고 있는 습관이다. 인벤토리는 그만큼 안전했으니까.

제국은 그런 습관을 싫어했지만.

‘화폐가 잘 안 돈다고 했던가?’

거대 길드를 통해서 그런 행동을 자제시키려는 노력을 했었지만 딱히 막을 방법도 없어서 내가 죽을 때까지도 여전히 수련자들은 인벤토리에 가능한 한 최대한 돈과 물품을 쌓아 놓고는 했었다.

비교적 태연한 기색인 나와는 다르게 일행은 필요한 비용을 듣고는 기함했다.

“3단계로 나누는 데 3천 골드요? 그것도 하나에?”

주하연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럼 최소 3천 골드, 세 개 다 3단계로 나누면 9천….”

주하연과 한바다의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신후 님. 그냥 신후 님이 쓰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3천 골드면 중층에서 레어 풀세트 장비를 맞춤으로 제작 의뢰하고도 남을 겁니다!”

당연히 남는다. 이전 하층에서 나를 포함한 일행이 대부분의 장비를 맞춤 제작하는 데 든 돈이 3200골드였다. 이쪽이 실력도 좋고 필요에 따라 더 다양한 재료도 사용할 수 있는 만큼 공임을 비롯해 돈이 더 들기는 하겠지만 한 명의 장비를 맞추는 데 3천 골드씩이나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건 알아야 한다.

던전 출토 아이템과 중층의 장인들이 만든 아이템은 조금 차이가 있다. 옵션도 던전 출토 쪽이 단연 뛰어난 경우가 많고, 시스템의 보정 또한 이쪽이 더 크다.

물론 장인 쪽은 여러 원하는 옵션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향해 말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다들 그렇게 기겁을 합니까?”

누가 보면 돈 없이 성장한 줄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9천 골드면….”

주하연이 주저하며 말한다.

돈의 값어치를 제대로 알아버린 덕분에 되려 망설이는 모습이다.

“…아니, 하층에서 길드 관리도 해보신 분이….”

‘아.’

생각 해보니 당시에는 마정석을 캐서 팔거나 하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우리 길드가 얼마나 부자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정확히는, 체감을 못하는 중이겠지. 부족하게 지내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9천 골드가 우스울 정도의 생활을 해오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 정도 돈은 써도 됩니다. 우리를 지원해 주는 곳이 어디인지 잊었습니까?”

내 단호한 말에 그제야 일행의 얼굴이 조금 펴진다.

그래도 액수가 액수인지라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금화가 담긴 궤짝 하나를 꺼냈다. 네비오스는 그 안에서 9천 골드에 해당하는 금화를 가져갔고, 나는 궤짝을 다시 인벤토리로 수납해버렸다.

그 과정을 일행들이 넋을 잃고 바라봤다. 설마 내 인벤토리에서 금화가 가득한 궤짝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낭비는 좋지 않지만, 너무 아끼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건 투자입니다.”

“그냥, 그냥 신후 님이 쓰시면 되는 것을….”

이미 준 걸 뺏어서 뭐 하나. 뒤늦게 전설급이 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밝혀졌어도 별로 탐나지는 않았다. 아예 이상한 놈에게 갔다면 아까웠겠다만, 내 파티원인데다가 나에게는 계륵 같은 거니까.

대수롭지 않게 큰돈과 아이템을 투자하는 모습에 한바다는 내심 감동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얘한테 이렇게 투자하는 것은 처음이던가?’

확실히 다른 수련자들이 이런 대접을 받았으면 엎드려 절을 했겠지.

1회차 시절 이런 대접을 받을 수만 있다면 신발을 핥으라고 해도 기뻐하며 핥았을 놈들 투성이었다.

네비오스는 한동안 장비들을 가져가 이것저것 허공에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예의 그 수정 작업인 모양이다. 잠시 뒤 수정이 끝났는지 곧바로 한바다에게 장비를 넘겼다.

“일단 3단계로 맞춰 두었습니다. 1단계 시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니 바로 해 보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저야 뭐, 돈 받고 하는 일인걸요.”

한바다는 옵션을 발동해 즉시 1단계 시련을 시작했다.

번쩍.

끝이었다.

“……?”

일행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어린다.

‘아, 그거군.’

1단계 시련이 금방 끝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장비로부터 시작된 마력이 한바다를 빠르게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아마 신체 수준과 마력을 측정한 것일 터다.

“…그, 아무래도 능력치를 측정한 것 같은데….”

한바다 또한 알아챘는지 떠듬거리며 말한다.

“최소한의 자격 증명이라네요. 일단 통과했어요. 레어급 장비로 변환되었고… 방어력이 350에….”

레어 장비치고는 나쁘지 않다. 거기에 더해 약한 수준의 활력 증진이 붙어있었다.

차례로 부츠와 투구의 1단계 시련을 끝낸다. 부츠에는 약간의 밀림 저항이, 투구에는 일반 등급의 직감 스킬이 붙어있다고 한다.

‘괜찮군.’

등급이 더 오르면 아마 상당히 쓸만한 장비가 될 거다.

파티원들이 다시금 한바다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한바다는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를 받더니 내게 와 깊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신후 님. 성장을 도와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데….”

“제 길드원이고, 파티원이시니까요. 앞으로도 꾸준히 활동해 주시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네비우스를 향해 말했다.

“기왕 만난 김에, 제 포인트나 확인해 주시죠.”

***

확인 결과 내 포인트는 2만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에 성자로 각성한 덕분이었다.

나는 그걸 또 정보 레벨에 부어버렸다. 우선은 80까지만 달성한 이후 포인트를 남겨 놓았다. 조금 더 올릴 수 있었지만, 포인트가 도망가지는 않으니까.

‘본래라면 다 부었겠지만, 아무래도 앞으로도 네비오스는 종종 만나게 될 것 같다는 말이지….’

확정적으로 만날 수 있는 던전도 몇 군데 알고 있으니 남겨 둬도 문제는 없다.

일행들도 각자 얻은 포인트를 바탕으로 각자의 정보 레벨을 올렸다. 특히 주하연과 남은주, 나연은 중층에서 전설급 스킬을 얻은 덕분에 각자 정보 레벨을 40이 넘게 만들 수 있었다. 봉인이 해제된 스킬도 중층에서 얻은 것으로 쳐준 덕분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여기까지 군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대로 장비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역할이 그런 쪽이니까요. 대가를 받고 도움을 준다. 거래죠.”

피식. 1회차나 2회차나 방랑 상인들의 저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네비오스와 헤어졌다.

혹시 몰라 던전을 더 찾아보았지만, 이번에는 숨겨진 공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쉽네요. 은근히 숨겨진 공간에서 좋은 것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나를 부활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숨겨진 공간에 있던 샘이었지, 아마?”

“맞아. 그랬었어.”

던전에서의 볼일이 끝나자 일행과 함께 던전 밖으로 이동했다.

던전의 포탈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후우. 끝났네요. 이젠 또 뭘 해야 할지….”

주하연이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며칠 안 남았다. 슬슬 다시 제국으로 복귀를 할 때가 멀지 않았다.

별다른 피로도 없었기에 우리는 곧바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오는데 이틀 정도 걸렸으니 비슷하게 걸릴 거다.

우리는 한참을 이동했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야영할 장소를 선정했다. 한참 쉴 장소를 만드는 와중이었다.

내 감각에 저 멀리서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길드장 님!”

“이윤형 씨?”

주하연이 의아하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맞았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이는 이윤형이었다.

다급한 표정과 몸짓. 급하게 달려온 이윤형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헉, 헉! 길드장 님! 큰일 났습니다! 오크가!”

오크의 공격. 어지간한 공격이라면 이윤형이 이리 급하게 달려올 이유가 없었다.

나는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언제, 얼마나 쳐들어왔습니까?”

“어제입니다. 그리고 쳐들어온 오크의 수는… 하, 한 명입니다.”

“…뭐요?”

표정이 굳는다.

나를 제외한 일행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일행을 대표해 주하연이 물었다.

“한 명이요? 그게 무슨….”

“…네임드 오크입니까?”

나는 주하연의 말을 끊어버렸다.

“네. 맞습니다.”

이윤형의 대답에 그제서야 일행의 얼굴이 굳는다. 아무래도 단 한 명이 성에 쳐들어온다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탑에서 3년을 보냈다고는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맞이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익숙해져야 한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일도 아니니까. 앞으로 가끔씩 보고, 듣게 될 거다.

“…혹시, 설마 해서 묻는 건데… 그 오크, 잘생겼습니까?”

“네. 무척.”

결국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고 말았다.

‘카바락.’

그가 나를 찾아왔다.

***

야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급하게 헬모사 지역을 향해 달려갔다.

이윤형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현재, 헬모사 성의 성문은 이미 박살 난 상태라고 한다.

단 일격에 성문을 부숴버린 카바락은 공포에 떠는 인간들을 향해 외쳤다고 한다.

-유신후! 나와라! 나 카바락이 찾아왔다!

그 외침에 내 휘하의 정예 길드원들이 나섰지만, 그의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해는 한다.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났으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되려 함부로 덤비지 않은 것을 칭찬해야 마땅하다.

아마 덤볐더라면, 크기도 전에 싹이 모조리 잘려버렸을 거다.

나는 일행을 뒤에 둔 채 전속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배려해 줄 시간은 없었다.

당장에는 죽지 않았을지 몰라도, 카바락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모른다.

1회차의 카바락? 이전의 성격?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이미 그의 행동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지금 상황은 상당히 위험하다. 까놓고 말해서 헬모사 지역이 통째로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고작 오크 하나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가능하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와 동급인 그가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시간적 차이는 있겠지. 많은 수를 놓칠 수도 있었다. 그가 나처럼 양민 학살에 특화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성을 함락시키고 멸망시키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날 마력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파괴행위를 반복하고 후퇴한 후 체력과 마력을 회복한 뒤 다시 쳐들어가면 그만이다. 아니, 솔직히 지금 헬모사 성의 수준을 생각하면 하루면 충분히 함락당한다.

성 내에 남아있는 인원 누구도 카바락을 막을 수 없다. 그가 공격을 하던 후퇴를 하던 견제조차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솔직히, 카바락이 나타날 가능성을 상당히 낮게 보았다. 그의 왕자라는 위치도 그렇고, 네임드 오크 둘을 멋대로 움직여 그중 하나를 죽게 만든 책임까지 생각하면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날 찾아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찾아왔다.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복수? 복수라는 명분으로 온 건가?’

흔한 명분이나 솔직히 빈약하다. 그의 지시로 보내 놓고는 죽었다고 복수? 심지어 시간적으로 생각했을 때 보고는 고른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그냥 곧바로 찾아온 모양이다.

아무리 카바락이 왕자라고는 해도, 엄청나게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대가를.

‘최전방.’

그는 명예를 잃고 위험한 장소에 수도 없이 던져질 터다. 네임드라고 해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끔찍한 장소에. 그 죄를 모두 씻을 때까지. 오크들 특유의 징벌 방식이다.

그리고 그런 대가를 치른다면 아무리 카바락이라고 한들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카바락은, 그것을 감수하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빠르게 달려온 덕분에 나는 해가 뜨기 전에 헬모사 성에 도착했고, 카바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유의 문신과 장신구들. 거기에 더해 오크 주제에 무지막지하게 잘생긴 면상은 여전했다. 그는 박살 난 성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은 무척이나 환했다. 성의 거주민들과 수련자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카바락을 경계하고 있었다.

정작 카바락은 그들을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왔는가? 가이아의 유신후. 무척이나 오랜만이로군.”

카바락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부르는 것마냥 인사를 건네왔다.

그런 주제에 느껴지는 기운은 무척이나 흉포하다. 아무리 말로는 반긴다고 한들, 이전의 모욕을 잊지는 않은 모욕이다.

‘솔직히 나도 위험한 상황이라 도망친 거였지만….’

그는 그걸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카바락이 내뿜는 기운은 툭 건드리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오싹한 기세에 저절로 전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대답은 해줬다.

“미친 새끼.”

“크하하하하. 여전하군, 여전해.”

무표정한 얼굴이 미소로 물든다.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나는 카바락을 마주하며 여기까지 오며 했던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는 무거운 책임을 지기는 할 거다. 그건 피할 수 없었다. 그만한 죄를 지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 무거운 책임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이였다.

‘최상급!?’

느껴지는 기운이, 이전과 판이하다.

이전에는 끽해야 하급, 잘 쳐줘도 중급에는 아슬아슬하게 못 미치는 수준의 마스터였다.

그런 그가, 상급을 뛰어넘어 대전사가 되기 위한 입구에 서 있었다.

최상급 마스터. 확실하다. 내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선 하나만 넘는다면, 저건 대전사가 될 수도 있는 괴물이라고.

인간으로 따지면 랭커 직전에 해당하는 괴물인 거다.

몇 개월 사이에,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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