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아키밀리 님? 간섭력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나는 멀리 떨어진 공동을 완전히 청소한 이후 허공에 대고 떠들고 있었다.
"……아키밀리 님?"
하지만 어째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에파토스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하면 나타날 거라고….
"아키밀…!"
"그만 떠들어라."
한참을 부른 이후에야 아키밀리가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나는 별로 반갑지 않군. 빌어먹을 그새 또 뭔 짓을 했길래 간섭력까지 얻은 거지?"
다른 플로어 마스터와 교류가 상당히 적은 듯, 그는 내가 간섭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늦은 이유가 내가 간섭력을 쓰겠다는 말에 상황을 파악하고 온 것 같았다.
"간섭력을 쓰겠다고? 하필 여기서… 그래 원하는 거나 빨리 말해라."
여전히 험악한 목소리. 거의 적대감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미궁 조각과 15층의 고난의 신전 공간이 이어지게 만들고 싶습니다."
"…하. 원할 때마다 고난의 신전을 이용하시겠다?"
잘도 그런 발칙한 생각을 했다는 말투.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것은 없지. 제한은 조금 걸리겠지만 큰 문제는 아닐 거다. 그게 다인가? 네가 가진 간섭력이 조금 남는군."
아키밀리는 짜증 난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다른 놈들이 알려 준 건가? 다른 놈이 했으면 아슬아슬했을 텐데…."
"…그리고 미궁 조각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은 출입이 불가능하더군요. 그 제한을 풀고 싶습니다."
"…그 좋은 것을 줬는데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있다고? 네놈, 도대체 뭘 한 거냐?"
아키밀리는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정보 레벨 60? 하. 그냥 잠자는 용도나 창고 정도로 쓰고 있겠군. 이런 미친놈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며 아키밀리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정보 레벨 90을 달성해라. 그러면 미궁 조각을 제대로 쓸 수 있으니까. 빌어먹을 새끼. 타인의 입장을 허가해 달라고 했던가? 수정해 주지. 단, 한 명만, 그것도 하루에 한 번만 사용 가능하다."
그마저도 내 미궁 조각의 공간 내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뿐이라고. 시간은 고난의 신전으로 이동해도 흐르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때는 내가 다시 기능을 사용해 데리고 와야만 했다. 일행 모두를 수련시키려면 며칠에 걸쳐서 몇 번이나 왕복을 해야 한다는 불편한 점이 있다는 것. 하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나는 자유롭게 이용 가능했고. 다만, 이걸 사용해서 싹수 있는 이들을 단련시키는 것은 사실상 힘들어 보였다. 일행이 모두 성장하고 난 다음이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지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건 남은 간섭력으로 할 수 있는 한계에 불과해. 말했듯이 정보 레벨 90을 달성하고 미궁 조각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받아라. 그렇게 된다면 제한 없이 제대로 미궁 조각을 쓸 수 있을 테니까. 빌어먹을 새끼. 기껏 준 것을 그따위로 쓰지 말라는 말이다!"
주는 것도 엄청 아까워 했던 주제에, 막상 준 것을 제대로 쓰지 못하니 열받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미궁 조각이나 내놔."
나는 곧바로 미궁 조각을 그에게 건넸고, 그는 미궁 조각을 든 채 허공을 몇 번 매만졌다. 그리고 탑의 힘으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기이한 주문을 읊조리더니 귀찮다는 듯 내게 미궁 조각을 돌려주었다.
"완성이다. 가져가. 이걸로 끝인가?"
나는 곧바로 미궁 조각을 확인했다.
[미궁 조각]
-등급 : 준신화
-한 세계의 일부였던 조각 중 하나. 부서진 세계의 파편이다. 소유자는 자신만의 공간을 얻을 수 있다.
-공간 내부에서 다른 공간과 이어진 문을 열 수 있다. 하루 세 번 가능하며, 소유자만이 문을 열 수 있다.
-하루에 한 번, 소유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공간 내부로 초대할 수 있다. '손님'은 하루간 공간 내부에서 머물 수 있다.
-경계의 미궁 전 층 관리자만이 사용 가능하며, 획득 시 귀속된다.
"이곳으로 오는 길도 하루 한 번만 열 수 있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거길 지나다니는 것은 몇 명이고 가능하니 초대한 놈들도 무리 없이 이용 가능하다."
"감사합니다. 충분합니다."
내가 충분하다고 말함과 동시에 아키밀리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작별조차 없이.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 일 다 봤으니 이제는 상관없었지만. 플로어 마스터와는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신경 안 쓰는 사람을 상대로 친해지기도 힘들다. 딱히 적대하는 것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해 줄 일을 안 해준 것도 아니고.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궁 조각을 사용해보았고, 양쪽으로 다른 풍경이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고난의 신전으로 이동하는 문은 약 10분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몇 걸음이면 다음 통로로 향하는데, 10분도 넉넉했다.
이제, 얼마든지 고난의 신전을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볼일이 끝난 공동을 뒤로한 뒤, 재판이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나도 죽고 싶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협력한 거라고! 근데 너무하잖…!"
한 무법자가, 거칠게 항변하고 있었지만 수련자들은 오히려 그런 무법자를 뻔뻔하다며 욕설을 내뱉고 돌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재판에 참가한 주하연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보았다.
"재판 결과, 공개 처형이 결정되었어요. 심지어 그냥은 안 죽이겠더군요. 묶은 채 가둬 놓고 온갖 모욕을 주며 굶겨 죽일 생각이래요. 일부는 투석형을 선고 받았구요."
"…그래서 저 무법자가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겁니까?"
"네. 원래는 발언권도 안 주려고 했지만, 자기는 억울하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무법자로 전향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고. 얼마 전까지는 노예였데요."
웃기는 소리다. 무법자로 전향했다는 것은 후일, 수련자들에게 해를 끼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항변할 말은 있겠지. 노예들이 당했던 꼴을 생각하면 전향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판에 참가한 수련자들은 그런 무법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투석형이 결정되고 말았다.
한바다는 차가운 눈초리로 형을 선고했고, 며칠에 걸쳐서 형이 집행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한바다는 내 말에 따라 하층의 수련자들을 강제로 상층으로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20층에서 무법자들을 막던 이들이 풀려나와 파티 단위로 최대한 빨리 움직이고 있습니다. 2달 안에 전부 20층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한바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 내 용병단에 정식으로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소속된 것과 마찬가지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거의 상사에게 보고하는 수준.
공적인 상황과 사적인 상황을 완벽하게 분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이연솔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어떻습니까?"
"파티별로 특별히 신경 써서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 절반 정도는 17층으로 향한 것으로 압니다."
"일부는 제가 직접 올리죠."
"…신후 님이 직접요?"
"네. 제가 나름… 신경 쓰는 이들이라."
"…알겠습니다. 몇 명이나?"
"그쪽에서 대표를 맡고 있는 이연솔이 있는 쪽이 좋겠죠. 서윤이랑 같이 하려고 합니다."
이연솔이 현재는 대표지만 길드 내로 편입되고 난다면 서윤이와 자주 교류가 있을 터였다.
마검사지만 정통 마법사보다도 오히려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
당장은 조금 가르침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완전히 장악할 필요가 있는 곳이니, 나서윤을 이용해 조금은 도움을 주며 가까워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오빠랑 같이요? 무조건 갈게요!"
내 제안에 나서윤은 거의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만 가는 거 아니야. 이연솔 씨 알지? 그 사람을 비롯해 거의 30명 이상을 우리가 담당할 건데?"
"상관없어요. 오빠랑 붙어 다닐 수만 있으면 돼요!"
"…그래. 그러자."
무슨 데이트라도 한다는 듯한 말투. 몬스터 사냥이 언제부터 데이트가 되었나 싶기는 했지만, 나서윤이 좋아하니 상관없었다.
소식을 들은 이연솔이 17층 고정 안전 구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신후 님."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전영수라고…."
"저는 한아름입니다! 유신후 님을 뵙게 되어서…."
나서윤과 내가 등장하자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려운 태도를 보이며 인사를 해왔다.
3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 번에 인사를 해대자 정신이 없을 정도였지만, 나는 그런 이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 주었다.
마법사는 최소 잠재력이 중급이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이들도 대부분은 하급 마법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런 이들이라도 뭉친다면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한다. 신경 쓸 가치는 충분했다.
내가 일일이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자 그들의 표정에서 걱정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연솔에게 들어서 내가 소문 같은 이유로 자신들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직접 겪는 것은 다르니까.
그래도 밝은 것과 동시에 부담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무슨 회장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설마 이렇게 일일이 반응해 줄 줄은 몰랐다는 반응. 마치 신입 사원 같았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법사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이곳 미궁을 나가면 하층이 존재합니다."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주변이 조용해졌다.
"저는 길드를 만들 생각이고, 마법사 여러분들은 모두 제 길드에 영입할 생각이죠. 혹시 이연솔 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마법사 직업의 잠재력은 상당합니다."
나는 나서윤을 가리키며 말했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시겠죠. 오늘 그녀가 마법사의 잠재력을 직접 보여드릴 겁니다. 저는 여러분을 길드로 영입하고, 키워드릴 생각입니다. 물론 길드에 들어오시지 않더라도 저희 길드는 한국 수련자들을 위해 최소한의 지원을 할 예정입니다. 하층은 티드린드라는 영지가 중심이고, 저는 그곳의 영주와 깊은 협력 관계거든요."
기본적인 지원. 끽해야 주변 지도를 지급하고, 레벨에 맞는 적정 사냥터를 알려 주며 최소한의 자본을 건넬 예정이다. 일주일 생활비 정도? 정말 체면치레 겨우 하는 지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수가 수인 만큼 제법 큰 돈이 들긴 할 터. 그러나 어차피 영지 내에서 생활하면 다시 다 영지로 환수된다. 그걸 이유로 들어 영주와도 가볍게 협상할 예정이고.
나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길드에 들어오신다면 기본적인 지원과는 차원이 다른 지원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현재, 수련자들 중에서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며 여러분의 가능성을 이렇게 높게 보는 사람도 아마 저뿐일 겁니다."
나는 마법사들을 향해 대놓고 자랑질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그게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되기도 했고, 이렇게 말을 한다면 아마 생각나는 일들이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 마법사들이 분기 어린 표정을 짓거나 서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럴 수밖에.
"저는 여러분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정말, 끔찍하더군요."
한바다에게 들었다. 저들은 본래 있던 파티에서 반쯤 쫓겨나듯이 이쪽으로 합류했다고.
회색 인간들에 가까운 이들답게 저들이 마법사이기는 하지만 별다른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수련자들이 상당히 핍박했다고 한다.
물론 과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는 한바다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규칙을 지키라 강요하는 판에 과한 핍박이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도움이 안 되는 인원을 계속 데리고 있는 것도 우스웠고, 차근차근 방출되는 인원이 늘었다고. 그럼으로써 마법사들끼리 뭉치게 되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일부는 잡부 신세라도, 아무리 천대받아도 파티에 끝까지 붙어 어떻게든 능력을 키우려 한 자들도 있었다.
마음 약한 일부는 과거의 인연을 잊지 못해 더 오래 함께한 적도 있었고. 외모가 좀 되는 이들은 외모를 무기 삼아 파티장의 애인 자리를 자처해서까지 버티려는 자들 또한 있었을 정도.
그만큼 비참한 상황이 많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바다가 마법사들을 모집한다는 말과 동시에 99%의 마법사는 그것을 핑계 삼아 내쳐졌다. 한바다 님이면 잘 대우해 주실 거라면서, 가증스럽게도.
그렇게 한바다에 의해 마법사들이 뭉쳐졌고, 한바다 직속인원의 도움을 받으며 꾸준한 사냥과 식량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직업이 마법사다. 처음 얻는 랜덤 스킬이나 전직 시 얻는 최초의 무료 스킬은 현재 그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다.
장비가 좋은 것도 아니고, 능력치가 높지도 못했다. 그나마 마력이 다른 수련자들에 비해 괜찮기는 했지만, 근본이 되는 신체 능력이 한없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지원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모든 수련자들 중 가장 재능 없고 느린 이들과 함께 밑바닥에 처박힌 채 경멸받으며 꾸역꾸역 버티고만 있을 뿐이었다.
성장하면 나아질 거라는 작은 희망도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져만 갔다.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에 비해 격차가 벌어지기만 할 뿐. 마법사란다. 그런데 그 마법사가 마법 하나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죽기 전에는 쓸 수 있을까?
자신들을 키우기 위해 한바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는 유신후는 2년째 보이지도 않고, 그에 대한 흉흉한 소문만이 퍼질 뿐. 2년 전, 1세대 무법자들을 쓸어버렸다는 그의 명성도 2년이 지난 지금은 한바다에 비하면 잊힌 수준이었다.
그들이 미궁을 탈출하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만 했다. 마법사들에게 그 시간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기에 희망도 없이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살아왔었다.
그런데 유신후가 뜬금없이 귀환했고 어마어마한 능력을 과시하며 과거의 명성을 가볍게 누르는 활약을 보였다. 게다가 흉흉한 소문을 가볍게 지워버릴 희생정신에 무법자들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업적을 세운다. 그런 그가 길드를 세우겠다고 하고, 자신들을 우선 영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가장 천대받던 이들인 자신들을, 자신들조차 믿지 못하는 가능성을 언급하며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말만 하지도 않았다. 그는 진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 나서윤을 통해 그들의 대표인 이연솔에게 자신들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보여줬다고 한다.
진정한 마법. 그것을 보여준다고.
마법사들의 얼굴에 작지만 분명한 희망이 깃들었다.
나는 그런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만은 여러분의 가능성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가능성을 꽃피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 말을 멈춘 이후 마법사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