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65화 (65/317)

# 65

예정된 이별

그녀는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밀어줄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이게 기회라는 것은 눈치챈 듯했다.

"어째서 저를 이렇게…."

"적어도 한바다 씨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사선도 넘은 사이 아닙니까."

솔직히 그렇게 사선까지 넘었다고 표현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흠흠.

잡생각을 치운 뒤 한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셔야지요. 기왕 시작하셨으니, 끝까지 한번 해 보시죠. 최대한 도와 드리죠."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나는 쓴웃음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저도 사람인지라 아래층의 꼴을 보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더군요. 특히 나연이는 그게 더 심합니다. 이대로 떠나면 어떻게 될지 가끔 불안해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구요."

카르텔. 그들의 만행. 그들을 청소하며 그 꼴을 본 나연은 실제로 우리가 떠난 이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 여기까지 내려왔지만, 내 성격상 언제까지 아래층에서 청소나 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한바다가 여기서 남아 미궁을 관리해 준다면 나연 입장에서는 안심이겠지.

"그리고, 단순히 호의로 다 넘기는 것은 아닙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마법사."

마법사. 내 말에 한바다는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마법사요? 괜찮은 마법사는 나서윤 말고는 없을 겁니다. 지금 마법사들 중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는 나서윤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 현재 마법사들 중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이라고는 나서윤 뿐이다.

그 외에는 정령사 정도뿐.

정통적인 마법사들 중에서는 사실상 진짜 마법사라고 칭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스킬을 더 배울 때까지 그들이 쓸 수 있는 마법이 사실상 없는, 이름만 마법사(물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육체적인 보정이 없어서 안 그래도 귀한 마법사인데, 초반에 다 죽어 나간다.

나는 그런 이들을 지원해 주라 요구하고 있었다.

"특정 직업군을 편애하라고 하시는 것은…."

"모두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지금 더 힘든 것은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내가 지원하라고 하는 거다. 말은 저리하지만, 그녀가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하, 하지만…."

"그냥 고정 안전 구역 관리자가 요구했고, 지켜지지 않으면 안전 구역을 쓰지 못하게 해 버리겠다는 협박을 당했다고 하세요. 아니면 제가 투자했다고 하셔도 무방합니다. 물론 공짜로 해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조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저희가 먼저 다음 층으로 도전하게 될 만큼, 미궁 관리가 끝나고 다시 탑을 오르실 때 제가 지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실제로 그리할 예정이었다. 그녀의 잠재력이 아까웠고, 늦게라도 지원하면 우리 파티 합류는 힘들어도 어지간한 1군급으로 만들 자신은 있었으니까. 그렇게 자연스럽게 한바다라는 존재를 내 아래에 둘 수 있다. 아니, 하다못해 우호 세력으로 만들 수 있으니 사실 손해는 아니다.

미궁 내부에서 밀리지 말라고 미노타우로스의 수갑을 준 것처럼, 이들이 미궁을 나와 다시금 탑에 도전하기를 원할 때 앞으로 만들 예정인 길드를 이용하면 그녀 파티 하나 지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설령 만들지 않더라도 내가 졸업하는 장비들을 남겨 놓았다가 전하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될 터다. 하층부터는 본격적으로 장비들을 구하기 시작하는 데, 그 가격이 만만하지가 않다.

게다가 하층부터는 탑의 개념이 바뀌어 아래층으로의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도움을 주기도 훨씬 쉽다.

20층 이하로는 내려갈 수 없다는 단점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오히려 고립되었기에 더 믿을만한 인물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바다는 합격이다.

"어떠십니까?"

사실 마법사들의 지원이라고 해 봐야 내가 원하는 것은 식량의 지원과 마법사들끼리의 파티 주선, 그리고 만약을 대비한 보험의 지원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 지원은 내가 의뢰했다는 것을 똑바로 밝힐 것. 그 정도만 되어도, 마법사들이 공통적으로 내게 호의만 갖게 되어도 남는 장사다. 훗날 영입이 쉬워지는 것도 있지만, 그들의 지지는 후반으로 갈수록 강력한 힘이 된다.

마법사는 병기. 그것도 엄청나게 강력한 병기다. 아무리 수준이 떨어지는 마법사라도 그 마법사들이 뭉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넓은 면적에 폭격만 가해도 그 위력을 일반 전사가 감당하기는 어렵다.

'마법 병단.'

꿈같은 이야기지만,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한동안 가만히 내 제안을 생각하던 한바다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어차피 마법사들도 약자나 다름없으니, 복지 방법으로 나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게다가 애초에 고정 안전 구역을 지원해 주시는 것은 신후 씨니까요. 다른 것도 아니고 약자들을 지원해 달라는 건데… 얼마든지요."

마법사가 약자.

피식. 후반부로 갈수록 그 위용이 커지는 마법사다.

나는 한바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내가 고개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한바다는 손사래를 치며 깜짝 놀랐다.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오히려…."

훗날 21층에 오면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 그것을 믿는 듯했다.

내가 중간에 죽거나 잘못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는 상태.

실제로 그럴 일은 없다고 본다.

나는 한바다의 허락도 얻어 냈고, 그녀가 이곳, 미궁을 관리하게 되며, 덤으로 마법 병단의 꿈에 슬쩍 발을 올려놓는, 미궁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사실상 전부 이뤄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하유진의 합류까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하유진 때문이라도 바로 미궁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그 기간을 알차게 쓸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다음 행동을 정한 이후 헤어졌다.

하루가 지나자 이전날 약속한대로 남은주는 이윤형과 최중헌에게 일을 맡기고는 다음 층으로 향햇다.

12층도 11층과 마찬가지로 카르텔이 생겨나고 있었고, 12층에는 11층과는 다르게 자유 연합 같은, 연합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어서 개념 있는 이들이 천천히 당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반항은 어디까지나 거의 개인적, 혹은 집단이라고 해 봐야 하나나 둘 정도의 파티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했다.

이대로 두면 카르텔이 급속도로 커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우리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가볍게 수련자들을 구해내 인지도를 쌓았고, 곧바로 그 인지도를 이용해 한바다를 대표로하는 연합을 창설했다.

푸른 바다 연합. 미래에, 1회차처럼 길드로 발전할지는 모르겠다.

그것의 기초를 만들어낸 진상수는 죽었으니까.

연합이 창설되자 나는 곧바로 미쳐 날뛰며 막 발달 단계에 존재하는 카르텔의 누런 싹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내가 12층을 완전히 한바다의 손에 넣어주기까지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에 하유진은 이미 13층에 진입한 상태였다.

12층의 연합은 안정권에 들지 못해 한바다가 누구에게 넘길 시간이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선 13층으로 올라갔다.

"서윤아!"

"오랜만인거 같다. 서윤아."

"아, 오빠, 언니들."

"안, 안녕하세요 형, 누나."

한 달 정도. 가끔씩 만나기는 했지만, 긴 대화는 힘든 상태였다. 미리미리 싹을 잘라 놓아야 나중에 편했기에 서로 오래 대화를 할 시간도 없었고, 나서윤이 사냥하는 위치도 고정 안전 구역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 만나기도 힘들었다.

하유진의 호칭은 어느새 나를 형, 여성 진들은 이름을 붙여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솔직히 8살짜리 애한테 형소리 듣기는 조금 찔린다. 나이 차이가 2회차를 기준으로 해도 일단 3배(..)라서 어색하다. 하지만 어디서 다른 수련자들이 나이 차이가 좀 돼 보여도 형, 형 거리는 것을 듣고 오더니, 호칭을 바꿔버렸다.

친해지고 싶다며 울먹이는 애한테 하지 말라고 하기도 뭐해서 결국 허락해버렸다.

나서윤에게 들은 바로는, 나를 형으로 부르게 된 계기를 준 파티에서, 아저씨라 불리던 수련자가 불쾌하다는 듯이 형, 오빠라고 부르라고 당당히 외친 것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한다.

나는 그딴 호칭에 전혀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닌지라 아무래도 상관없었는데, 의외로 이러한 호칭에 신경 쓰는 사람이 꽤나 많은지, 이런 상황이 되버렸다. 1회차 기억까지 합치면 아저씨가 확실하다 보니 아저씨라는 호칭에 찔릴 것도 없었는데, 너무 어린애에게까지 이런 호칭으로 불리자 신경을 아무리 쓰지 않는다고 해도 찔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나서윤이 오빠라 불리는 것도 민망한 마당에….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화제를 돌렸다.

"13층은 어때?"

"…딱히 더러운 놈들은 안 보여요 오빠. 하나같이 실력이 있거나 12층의 쓰레기들이 귀찮아서 빠져나온 이들답게 카르텔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또 생기면 대충 패고 다음 층으로 갈 생각이라고 떠드는 애들도 있어요."

"…진짜?"

나를 제외한 여성진이 반가운 소식이라는 듯이 물었다.

"네. 진짜에요. 여기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서, 다음 층은 금방 갈지도 모르겠어요."

11층과 12층은 몬스터 경쟁이 너무 심해서 별수 없이 깊은 곳까지 가야 했다고 나서윤은 투덜거렸다. 실제로 저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12층에서 쉽게 만나지 못했으니까.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단 두 개의 층만 오염이 된 상태. 그마저도 이제 제거가 되었으니 걱정은 없었다. 내가 고생한 보람이 있을 정도. 20층을 빠르게 돌파하고, 고정 안전 구역의 설정을 까다롭게 해 놓은 보람이 있었다. 이정도면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쓰레기들은 인간이 아니니 제외하고.

이 기간 동안 내가, 우리 파티가 죽인 인간이 수천이다. 나중 가서는 죽이지 않고 제압을 우선시했을 정도.

하루에 백 단위 인간을 죽여 댔으니, 우리 일행이 살인에 질릴 만도 하다. 그러니 13층은 좀 덜 더럽다는 말에 저리 반색을 하지.

"그럼, 그럼…."

"네. 이걸로 미궁에서 저희 역할은 대충 끝난 것 같네요."

"하아…."

"힘들었어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주하연과 나연, 남은주는 정말 지쳤다는 듯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럼 일단 서윤이는 계속 올라가고 있어. 우리는 한바다씨를 만나 봐야 할 것 같아."

"…네. 알겠어요. 오빠."

나서윤은 조금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한바다를 찾아가 13층에는 아직 카르텔이 생길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전달했다.

"그거 반가운 소식이에요…. 여기 정리하기도 벅차거든요."

11층은 자유 연합이라는 연합이 존재했지만, 12층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한바다가 만들어야 했고, 다른 곳에 신경 쓸 상황이 되지 못했다.

"그러면…."

"바로 미궁을 나가실 건가요?"

"아뇨? 바로는 못 나갑니다. 유진이가 아직 13층에 있어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네?"

"제가, 제가 지금 손이 조금 모자라서요. 진짜 힘들거든요…."

한바다는 정말 힘들다는 듯이 나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나는 당황했다. 한바다가 이런 부탁을 쉽게 하는 사람은 아닌데… 게다가 대상이 나다.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실 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도와주세요."

…진짜로 일에 치여 살고 있는 듯했다. 11층에서야 도와주는 이들이 많았지만, 12층에서는 조은연 하나뿐. 그러다 보니 연합을 창설은 했는데 내부가 엉망인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하유진이 20층에 도달할 때까지 한바다의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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