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예정된 이별
저게 뭔 경우지?
나는 한참 하던 학살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멈추자 겨우 목숨을 건진 쓰레기들은 반격은 고사하고 하나같이 도망치기 바빴다.
타이밍 좋게 사냥을 마치고 나타난 쓰레기들이 내가 없는 틈을 타 후열을 습격했다.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별다른 위협도 되지 않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외의 사태가 일어났다. 주하연과 남은주가 깔끔하게 틀어막았고, 하나 흘리는 듯싶더니 도발을 이용, 접근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쓰레기들의 작은 희망이 무너진 상태. 이후 나연이나 나서윤이 별로 활약하지 않아도 대지의 방패를 얻은 남은주 선에서 정리될 수준인데, 뜬금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린애라 키우더라도 오래 걸리겠다 싶었던 하유진이 하나 흘리는가 싶은 순간 튀어 나간 것.
인벤토리에서 꺼냈는지 단검을 들고는 도발에 걸림과 동시에 목덜미에 칼을 박아버렸다.
마력을 이용해 신체를 보호하지 않는 이상에야 수련자들의 육체로 검을 막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마저도 그런식으로 마력을 쓰면 효율이 개판이라 그냥 실드 한 번 받는 것이 낫고.
뭐 나중에 수준이 높아지면 마력이 깃들지 않은 검 정도로는 치명상을 입히기 힘든, 인간을 살짝 벗어난 육체가 되기는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건 불가능.
즉, 성인이든 8살이든 수련자의 몸에, 그것도 급소에 칼을 박을 수 있으면 죽일 수 있는 것은 똑같다는 거다.
하유진은, 그걸 했다. 8살짜리가.
나연은 8층에서 내가 생쇼를 해서 하게 만든 살인을, 이렇게 간단하게.
예상…외였다.
확실히 그 상황에 후열에 근접 전사가 있다면 즉시 커버를 가야 하는 상황은 맞았다.
실제로 남은주가 놓쳤다면 나서윤이 나섰을 거다.
하지만 남은주의 실력을 알고 있는 나서윤은, 저 정도는 혼자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반응을 하지 않은 거다.
하유진은 몰랐고, 반응을 한 거고. 아니, 애초에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저기서 흘릴 거란 것을 정확히 안 듯, 완벽한 타이밍에 상대의 목을 찔렀다.
8살짜리가 할 수 있는 판단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실행할 수 있는 것은 또 별개고.
'미쳤군.'
저건 보석이다. 이미 탑에 적응이 끝났다. 하긴, 탑에 소환되고 시간이 제법 지났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데, 이정도 시간이면 적응이 끝난 인간이 나올 수도 있다. 그게 8살짜리 애새끼일 줄은 몰랐다만.
정신적인 면은 조금 미숙하다. 아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정확히는, 사회적인 면이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부족하고, 혼자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어린애는, 아니 애초에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니까. 하지만, 전투적인 면에 있어서 하유진은 반쯤 완성되었다고 본다.
육체야 시스템의 보조로 키우면 되고, 기술이야 배우면 그만이다. 확실히 목덜미를 찌를 때, 기술이 미숙하긴 했다. 어디까지나 남은주의 도발로 빈틈이 훤히 드러났고, 흘린 놈의 실력이 부족해 은신까지 사용한 하유진을 발견조차 못 했으니 기술이고 뭐고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급소만 노리면 쉽게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인간으로써의 고립은 우리 파티와 함께함으로써 해결되고.
무엇보다 성장시키기 까다로운 정신 무장이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행은 무척이나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나서윤은 별생각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제법 괜찮게 본 듯했다.
하지만 주하연은 놀라 눈이 동그래진 모습이었고, 남은주도 충격을 받은 듯했다.
백미는 나연이다. 얼굴이 충격과 공포로 일그러져있었다.
실제로 뒤늦게 하유진을 발견하고는 안 된다고 외쳤었던 사람은 나연이었다.
그러나 그런 외침과는 무관하게 하유진은 우리들 눈앞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게 뭐 특별한 일은 아니다. 8층에서 우리는 대량 학살을 벌였고, 지금 하는 것도 이름은 쓰레기 청소지만, 정확히는 인간 사냥에 가까우니까.
단지, 그걸 저지른 애가 8살 꼬맹이고, 8살 꼬맹이가 살인하는 모습에 아무렇지 않기에는 우리 일행들의 경험이 부족한 것뿐이다.
나서윤이 담담한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에 가깝다.
나는 오히려 그런 나서윤의 모습도, 하유진의 모습도 무척이나 만족스럽지만.
일행이 충격으로 멈춘 사이 내 쪽뿐만이 아니라 후열을 습격했던 이들 중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아예 다 살려줄 마음은 없었기에 뒤늦게 도망치는 이들을 쫓았다.
모두 잡기에는 멍때린 시간이 조금 길었다.
전부 다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고.
그런 내 모습에 일행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마저 공동에 살아 있는 쓰레기들을 쫓기 시작했다.
10분.
잔당을 마저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상당 부분 놓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저거 놓친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
나는 전투가 끝난 이후 하유진에게 다가갔다.
"왜 그랬어?"
"…네?"
"살인은… 해본 적 있니?"
"몇 번요."
"근데 왜? 왜 그때…."
"제, 제가 잘못했어요? 그게, 그때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아니, 아니다. 네가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야. 솔직히 잘했다고 생각한단다."
"신후야?!"
내 말에 나연이 기겁하는 것이 느껴진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안 돼. 하지만 그렇다고 너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이들을 살려줄 필요도 없단다. 물론 상대에 따라서는 죽이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어. 오해거나, 정보를 모을 때 정도? 그럴 때는 조심 해야 하긴 하겠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직접 덤벼드는 놈들은 죽이는 것이 확실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틀린 말은 없다. 나연도, 남은주도, 주하연도 뭐라 하지 않았다.
탑은 그렇게 널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되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현재 우리를 뛰어넘는 파티는 사실상 없음에도… 그랬다.
나연은 차마 내게는 더 뭐라고 말은 못 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말을 아꼈다.
이후 나는 이동 중이나 휴식 시간마다 하유진의 정보를 캐냈다.
튜토리얼부터 자신을 돌봐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들의 도움으로 튜토리얼을 클리어했고, 던전도 클리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11층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궁파의 습격을 받았고, 노예로써 끌려갔다고.
자신을 돌봐줬던 이들은 부부인데, 비참한 꼴을 맞았다고 들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면 약간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 때문이 이야기 못 하는, 그런 행동은 일체 없었다.
정말 스스로 했던 말 그대로 짐은 되지 않는 모습.
전투 시에는 나서윤을 붙여 하나씩 기본적인 전투에 대해 가르쳤다.
이전의 부부는 딱히 그런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자신들도 이런 것은 잘 몰랐고. 그렇기에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은 처음이라며 의욕적으로 하나씩 배우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하유진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를 해 주었다.
나서윤은 하유진이 마음에 들은 듯 일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찬성했다.
나도 사실상 찬성이었고, 남은주도 별다른 반대는 없었다. 지금 하는 것만 봐도 저 애가 뒤쳐질 애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결국 일행은 오늘치 청소가 끝났을 때 하유진을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첫 영입이었다.
***
하유진은 우리와 다르게 20층에 간 적이 없기 때문에 차근차근 한 층씩 올라가야만 했다.
우선은 인간 청소 중이었기에 나서윤을 붙여 따로 탑을 오르도록 만들었다.
나서윤은 나와 떨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하유진이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인지 잠시 고민하더니 곧 승낙했다.
보험인 나서윤이 빠진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청소에 큰 문제는 없었다.
남은주 정도면 후열 둘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고, 나는 후열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자생할 수 있는 상황.
우리는 며칠에 걸쳐 꾸준히 쓰레기들을 치워 나갔고, 마침내 쓰레기들의 본거지를 털어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본거지가 안전 구역이라 쳐들어가지는 못하고 봉쇄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나는 한바다를 찾아갔다.
한바다는 한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바쁜 상태였다.
"응? 신후 씨?"
"아 네. 바쁘신가 보군요."
분명 바쁘지만, 한바다는 어딘가 상쾌한 모습이었다.
"네. 이것저것… 무슨 일이신가요?"
"11층 청소가 사실상 끝났습니다. 다음 층으로 가야 해요."
"아…."
그녀는 약간 곤란한 듯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오늘 저녁, 시간 좀 주시죠.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한바다는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 짐작한 듯,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때가 되자, 나는 일행과 떨어져 한바다와 둘이 만났다.
"이렇게 둘이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만날 일이 없었다.
함께 지낸 시간은 좀 되었지만, 둘이서 만날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게요. …어쩐 일로 부르셨나요?"
한바다는 빙빙 돌리는 대신, 곧바로 내게 물었다.
"저희는… 미궁 내에서만 함께 하기로 했었죠."
끄덕.
"20층을 넘어서면, 21층은 미궁이 아닙니다. 아시죠?"
"…네."
20층에서 본 메시지는 미궁을 탈출하겠냐는 말이었으니까.
즉, 21층은 미궁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데, 앞으로도 함께 하실 건가요?"
나는 떠보듯 물었다. 처음에는 미궁에서 나가자마자 쫓아낼 듯 파티에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제법 친해졌으니까.
우리와 함께하고자 한다면, 나쁘지는 않다. 그녀와 그녀의 파티는 실력이 좋은 편이니까. 한바다 파티 입장에서도 우리 파티라는, 그들 수준을 뛰어넘는 파티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기회다.
하지만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티는 별로 안 냈지만, 이들은 지금의 역할을 수행해 주는 것이 좋다.
한바다는 내 그런 사정까지는 잘 모르기에 힘겹게 대답했다.
"…감사하지만… 저는…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
다행히 내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솔직히 예상했다. 이렇게 뛰어다니며 귀찮은 일들을 나서서 신나게 처리하는데, 평소 일하는 모습을 조금만 살펴봐도 그녀가 우리와 함께 떠난다는 것보다는 여기 남을 거라는 예상은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녀도 안다. 더 성장하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하려면 우리 파티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이곳 사람들을 모두 버리고 떠나야만 한다.
지금만 해도 우리 파티의 힘으로 카르텔을 무너뜨리면서 겨우 최소한의 출발점을 갖추었다.
그런데 그냥 버리고 떠나라고? 다음 층으로 향하면 그쪽도 청소는 해 주고 갈거다. 하지만 그리된다면 제대로 된 관리인이 없는 11층과 12층은 다시금 제2의 카르텔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았다.
최중헌? 심성이 나쁘지는 않지만, 능력이 부족하다.
한바다처럼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신의 무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여기서 그런 것이 통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뒷배나 일신의 무력이 필수다.
탑은 힘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장소니까.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도와주셨는데…."
"죄송할 것 까지야. 애초에 그러기로 했었으니까요."
그녀 입장에서는 내 말이 그렇게 쉽게 들리지는 않을 거다.
일단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 줬는데, 상황이 나아지니 그냥 먹고 튄 거나 다름없으니까.
나로서는 이게 더 좋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가 재차 사과를 해오자 쓴웃음을 지었다.
"뭐, 솔직히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어차피 떠날 사람들. 한 번 청소를 했다고 해도 언제든지 제2, 제3의 미궁파가 등장할 수 있으니까요. 시작을 했으니 끝을 본다고, 관리까지 된다면 보람은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런데, 저와 12층으로 가시죠."
"…네?"
"기왕에 남기로 하셨으면, 끝까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녀를 단숨에 12층부터 20층까지의 서브 관리자로 등록해 버리며 말했다.
"한 층만 하는 것보다는, 미궁 자체를 관리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