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154화. 접촉(2)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천천히 벌어진다.
“세상이 타오르고 있군요…….”
“……?!”
놀랄 틈도 없이 예언이 이어졌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잃은 슬픔에……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주르륵―
그녀도 그 고통을 함께 당한 것처럼 새하얀 그녀의 뺨에 맑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신들의 전쟁 때문에…… 모두가…… 모두가…….”
뭔가 내용이 많이 생략된 것 같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예언이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그녀가 말한 예언은 주신 아그네스와 다른 신들 간의 전쟁, 즉 대리인들 간의 전쟁을 뜻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받는 듯했고.
하지만 이것으로는 역시 부족했다.
그래서 도저히 참지 못한 아이작 백작이 소리친다.
“누가 이겼느냐?! 누가?!”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누가 이겼는지가 가장 중요했던 것이었다.
“…….”
대답 대신 잠시 견딜 수 없는 침묵이 흐른다.
“누―!”
그 침묵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다시 소리쳐 물으려고 하던 그때.
그때 그리스에의 메마른 입술이 다시 열린다.
“……공멸共滅…….”
그 대답에 잠시 또 침묵.
벌떡―!
아이작 백작은 믿기지 않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미래에 대한 대답을 바꾸기 위해 그리스에를 몰아붙인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든다.
“공멸?! 무슨 그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싸움에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그런데 공멸이라고?! 어디서 거짓말을 지껄이느냐!”
그의 용서받을 수 없는 무례를 최고 대신관이 다급히 말려보려 하지만.
“배, 백작! 엇―!”
이미 늦은 듯 보인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오오―!
황금빛 공허한 눈동자가 아이작 백작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의 가녀린 몸에서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미증유의 힘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접신接神.
아이작 백작의 무례에 지혜의 신 에크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강림降臨하신 것이었다.
그 신의 무자비한 힘에 나름 인간들 사이에서 초인超人이라 불리던 아이작 백작은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공중에 둥둥 떠오른다.
“커컥―!”
그리고는 무언가가 목을 조르자 아등바등하며 자신의 두 손으로 그 무언가를 말려보려고 한다.
하지만 역시 역부족이다.
“……!”
그 광경을 크리스찬은 매우 흥미롭게 바라본다.
매우 흥미롭게.
마치 그 힘을 자신이 행사하는 것처럼.
“감히 인간 따위가. 감히.”
“크아악―!”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빠드드득―!
목에 점점 졸리는 자국이 짙어진다.
진심 죽이려고 하는 듯했다.
단숨에 목뼈가 부러지고 그 살마저 터트릴 것 같다.
더는 볼 수 없었던 최고 대신관이 지혜의 신 에크네에게 머리를 쿵―! 쿵―! 다시 박으며 간절히 빈다.
“지혜의 신 에크네시여! 부디! 부디 이 하찮은 것들의 무지를 가엽게 여겨주소서! 저희 같은 하찮은 것들이 신의 지고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해 무얼 알겠습니까?!”
그때였다.
“커커컥―!”
최고 대신관도 목이 졸려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에크네는 빙긋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걱정 말아라. 네놈도 살려둘 생각 없으니.”
그 섬뜩한 경고에 최고 대신관은 이러다 정말 큰일 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더욱 절박하게 울부짖는다.
“제, 제발! 제발 자비를! 에크네! 당신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자비를!”
반면 크리스찬은 최고 대신관까지 죽게 생겼음에도 여전히 흥미롭게 바라만 볼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아버님이 꼼짝도 못 할 줄이야.’
화신체가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추측은 했었지만, 그토록 강해 보였던 결코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였던 아이작 백작이 아무것도 못 하고 죽어가자 이제야 제대로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저런 힘을 쓸 수 있다라.’
건틀릿에 피가 새어들어 핏빛으로 물들어 있던,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휘둘러 굳은살로 범벅이던 자신의 거친 손을 바라본다.
‘흥미롭군.’
크리스찬도 무인이었다.
그것도 최정상의 재능을 지닌.
그렇다 보니 그 어떤 무인에게도 이기겠다는 호승심好勝心과 정점頂點을 향한 욕망이 없을 리 없었다.
‘예언자 따위가 10 서클 대마법사를 가지고 놀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정상급 무인인 자신은 얼마나 더 강해질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씨익―
그때야 크리스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스에에게로 다가간다.
“그만하시죠. 에크네시여.”
쓸 데가 많은 자들이었다.
지금 잃기에는 너무 아까웠었다.
그리스에는 그동안 잠자코 있다가, 이제야 자신에게 말을 건 크리스찬을 바라본다.
“커커컥―!”
“사, 살려줘! 커컥―!”
두 사람이 최정상급 무인이었기에 지금껏 견뎌낸 것이었지 벌써 죽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대롱대롱 매달려 몸부림치는 그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두 사람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움이 된다라. 어떻게?”
“우리 화신체들이 잡다한 일들까지 다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럽고, 귀찮은, 성가신 일들은 보통의 인간들에게 시키셔야죠.”
“…….”
피식―
아무 말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곧장 두 사람을 놓아준다.
쿵―!
바닥에 떨어져 목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컥―! 컥―! 컥―! 컥―!”
고통스러워하는 두 사람을 벌레 보듯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저 버러지 같은 것들도 도움이 되겠느냐?”
“당연히 에크네께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겠지만 그래도 인간들 중에선 쓸 만하답니다.”
“그래?”
“네. 에크네시여, 타티스가 선택한 저를 믿어주시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크리스찬의 그 말투와 눈빛이 그리스에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만족해한다.
하지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해서 거두고만 있는 건 능사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 진심 어린 충성을 바치는 연놈들에 한에서다.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믿지 못할 새X들은 애초에 버리는 게 나아.”
“저를 한 번 믿어주시지요. 제가 저들을 우리 화신체들에게 진심 어린 충성을 바치도록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러면서 고개 숙여 선배 화신체에 대한 예를 갖춘다.
그로서는 화신체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기에 두 사람을 살리려면 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정의의 신의 화신체여. 네게 하나만 더 충고하지.”
“새겨듣겠습니다.”
“인간을 믿지 말아라. 그 누구도. 저 보잘것없는 것이 너와 피로 이어진 아비라 할지라도.”
슈우우―
그 말을 끝으로 공중에 떠올랐다.
“우리의 수족인 드래곤들과의 연락이 끊긴 이때 너에게 저 버러지들을 빼앗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라 생각해서 봐주는 것이니.”
“커어억―!”
다시 한 번 경고의 의미로 목을 조른다.
“아이여. 다음에 만날 때는 부디 진정한 그의 화신이 되어 있기를.”
덜컥―!
창문이 열렸는데, 그 창문을 통해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크리스찬은 아이작 백작과 최고 대신관에게로 눈을 돌린다.
“이제 제대로 설명해야겠지. 화신체가 무엇이고 그대들이 꾸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야.”
두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들어 크리스찬을 바라보았는데, 크리스찬의 눈에서도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가 드러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 * *
“그리스에를 통해 뭔가 얻어 보려 한 것 같군요.”
지금의 상황을 알고 있던 에디린과 비트칸이 맞장구를 친다.
“맞아. 그리고 네가 예언자를 얻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도 있지.”
“에디린의 말이 맞다. 네가 얻지 못하게 하는 게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때 사나가 말한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좀 설명해 주세요. 아까 저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우선 지금 상황을 설명해줘야겠지.”
에디린과 비트칸을 제외한 모두가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용사의 사명은 마족 멸살이었다. 그리고 그 마족 멸살의 사명은 타르타로스 대지에서 이미 끝마쳤지. 하지만.”
“하지만?”
“주신 아그네스께서는 내게 또 다른 사명을 내리셨다.”
오늘만을 기다려온 아르시아가 울상이 되어 묻는다.
“또요……?”
“그래. 또다시 사명이 내려왔구나. 하지만 이 사명은 정말 마지막 사명이고, 끝내면 그분께서 우리 모두에게 확실한 행복을 약속해주셨으니.”
무언가를 조건으로 약속받은 사명이라기에 ‘마족 멸살’보다 어려운 사명일까 봐 걱정이 깊어져만 간다.
“도대체 어떤 사명이길래……?”
잠시 더없이 진중한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본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아름다운 입술을 뗀다.
“주신 아그네스를 제외한 모든 신을 이 대륙에서 지우는 것.”
“?!”
경악하는 그들에게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왜 그런 사명을 맡기셨는지도 설명을 해줘야겠군.”
모두에게 왜 신들을 지우라는 사명을 맡게 되었는지, ‘10인회’에서부터 ‘화신체’까지 이 대륙의 썩어버린 지배 원리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 설명을 들은 모두가 더 이상 놀랄 수 없다는 것처럼 입을 쫘악 벌렸고 두 눈은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다.
너무 놀라 잠시 침묵이 흐른다.
…….
그러다 정신을 차린 케이가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그런데 과연 가능할까요…… 각 왕국마다 그들만의 신이 있고…… 모든 백성이 그 신을 믿고 따르는데요…….”
“맞습니다. 그리고 주신 아그네스를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은 몇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
심지어 드래곤이었던 에디린과 비트칸도.
그때 성녀 다프네가 입을 연다.
“하지만 모두가 주신 아그네스가 이 에브니아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모든 신의 신이라는 것도.”
이어서 아벨이 말한다.
“또한 무엇보다 주신 아그네스께서 모든 신을 이 땅에서 지우겠다고 결정한 이상,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아…….”
아벨이 다프네에게 묻는다.
“그런데 다프네 님께선 어디까지 들으신 겁니까?”
“제가 들은 건 저하께서 자신의 명을 받아 모든 신을 이 에브니아에서 지워버릴 테니 저보고 도와드리라고 하셨어요.”
“그것 외에는 더 들으신 것 없습니까?”
그 말에 다프네는 에디린과 비트칸을 둘러본다.
“……주신 아그네스께서 용사가 버거울 테니 신의 손과 발이었던 드래곤들을 없애주시겠다고도 하셨어요. 단 하나도 빠짐없이.”
역시 그녀도 들었다.
‘최고 대신관들도 들었겠지?’
아마도 들었을 가능성이 컸었다.
‘듣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곧 알게 되겠지.’
그러니 들었다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게 옳았다.
‘두 드래곤이 사람이 된 것도 들었을까?’
그 의문은 다프네가 해결해 준다.
“……그런데 어떻게 에디린 님과 비트칸 님은 살아계실 수 있으신 거죠……? 두 분도 드래곤이잖아요……?”
아!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구나!
다프네가 모른다면 다른 신들의 화신체와 최고 대신관도 역시 모를 가능성이 컸었다.
“그, 그게…….”
“음…… 그것이…….”
에디린과 비트칸은 그 물음에 우물쭈물해 한다.
그래서 아벨이 서둘러 대답한다.
“주신 아그네스께서 저를 위해 두 분만은 살려주셨습니다. 제 편이 아무래도 적을 것이니까 말입니다.”
“아……!”
이제야 이해했다는 얼굴이다.
다른 이들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얼굴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