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92화. 쟁탈전(1)
케이에게 자리를 권하며 묻는다.
“이제 바쁘지 않나? 무도회 준비하느라 말야.”
“조금 바쁘긴 하죠?”
“그래. 안 그래도 사나도 그것 때문에 많이 바쁘다고 하더군.”
러네이는 비트칸에게 불려가 호되게 혼나고 있었기에 아마도 불참할 것 같았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매우 매우 중요한 무도회니까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래?”
“네. 여러모로 중요하죠. 그런데 저하.”
그때 시녀가 딸기 우유를 내왔다.
딸기 우유를 받아들며 묻는다.
“저하는 정말 결혼을 안 할 생각이세요?”
민감한 질문이 나오자 아벨은 대답 대신 딸기 우유를 마신다.
후르르…….
그리고 잔을 내려두며 그때 대답한다.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주변에선 절대 저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죠.”
사실 케이가 이 늦은 시각에 굳이 아벨을 찾아온 이유는 정의 무투회 내내 사나와 함께 있으면서, 뭔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상황이 매우 빠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아벨과 사나 사이에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고 느껴졌다.
“그런 듯도 하군.”
그리고 아버님과 오라버니의 대화를 나눠 보니 다른 곳에서도 이제 곧 그런 상황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 모든 대귀족이 저하를 자신들의 딸의 남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 아시나요? 모든 대귀족이 다 그러고 있다구요. 크리스피 백작가 빼고 모두 말이에요.”
“후후― 설마 그럴 리가. 그들 중엔 나와 원수인 드로즈도프 공작가도 있을 텐데.”
“그 드로즈도프 공작가도 저하와 결혼시킬 아이가 없는지 찾고 있다구요.”
상황이 조금 심각해지는 것 같다.
시녀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모두 나가 있어라.”
그녀들도 눈치가 있었다.
“네. 저하.”
그녀들이 나가자 아벨이 입을 연다.
“다들 뭔가 착각하는 거 같군. 나에게서 뭘 얻어가긴 힘들 텐데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하께선 너무 뛰어나시니 욕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죠.”
“너도 내가 욕심이 나느냐?”
그 말에 케이는 잠시 충격을 받은 듯이 멈칫한다.
아벨은 멈춰진 케이를 보고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즉각 깨닫는다.
“아니다.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 미안하다.”
케이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보인다.
“……저하. 저에게 너무 하신 거 아닌가요?”
전에 사나 때와 같은 결말이 나올 것만 같다.
꼭 그런 불길한 느낌이다.
“케이. 나와의 결혼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매번 같은 대답에 화가나 따져 묻는다.
“왜요? 왜 그런데요? 그리고 저하께선 왜 항상 그런 말로 도망치려고만 하시는 거죠?”
“…….”
“왜인지 저도 말해줘요. 사나는 꼭 아는 것만 같던데. 저도 왜인지 알아야 저하를 이해해 드릴 거 아닌가요?”
휴…… 길게 한숨을 쉬고는.
“그래. 너도 진즉에 말해줬어야 했는데.”
케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러면서도 결연한 얼굴로 들을 준비가 됐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그 준비된 모습을 보고는.
“사실 나는 주신 아그네스께 선택받은 용사다.”
“……?!”
케이는 대중들의 말대로 아벨이 정의의 신의 환생이 아닐까 했었다.
용사는 생각도 못 한 답변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모든 용사는 주신 아그네스께서 주는 사명을 꼭 이루어야 하는데, 이번 내 사명은 매우 위험하고도 어렵다. 그래서 그 사명을 다 끝내기 전까지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언제 끝날 거 같은데요……?”
“아마도 내 평생을 다 바쳐도 이루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 누구와도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나로 인해 남겨진 사람이 얼마나 고통받을 것인지 잘 알기에.”
“기다릴게요.”
“케이…… 난 네가 나만 바라보다 제대로 된 행복을 느끼지 못할까 봐 두렵다…….”
지긋이 아벨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는데, 그 검은 눈동자 속에 애처롭게 사랑을 갈구하는 자신이 보인다.
그 모습에 괜히 바보 같고 답답하다.
“저하. 저하께서는 제가 저하 말고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케이. 우리는 이제 겨우 열여섯일 뿐이야. 아직 살아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고.”
“저하는 정말 여자를 잘 모르시는군요.”
“……?”
“저만 그러던가요? 사나도. 러네이 언니도 모두 저하만 바라보고 있잖아요? 안 그래요?”
그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다.
“전 잠시라도 저하와의 진정한 행복한 순간을 갖고 싶어요. 그 행복한 순간만 있다면. 그래요. 그 행복한 순간을 아주 잠시라도 가질 수 있다면. 전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분명히. 그 세계에서만큼은 저하께서 나만을 위해서 웃어주고 나만을 안아줄 테니까.”
아벨은 자기가 소설의 여주인공들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생각했다.
주르륵―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마는 케이였다.
그 눈물을 거친 손으로 닦아준다.
‘케이 너마저 이러면…….’
케이의 사랑 역시 자신이 과소평가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 * *
광장 무도회 당일은 아벨에게 사람들이 너무 몰려 보기 힘들 것이니 그 전에 만나보는 게 어떠냐는 율리안의 조언으로, 애초에 회의 전에 당장 다음날 찾아가기로 정해놓았었다.
그들도 굉장히 다급했던 것이었다.
모든 대귀족이 아벨을 쟁탈하기 위해 전쟁 아닌 전쟁을 빠르게 벌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동 워프 덕분에 그래도 점심 전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아버님. 제가 정말 저하를 뵐 수 있을까요?”
미카엘 백작은 유일하게 딸의 표정 변화를 읽는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딸이 그 어느 때보다 기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저하께서 답을 주셨으니 걱정 말렴.”
사실 이번 정의 무투회에서 아주 조금의 관계가 형성된 율리안이 레드 드래곤 하트를 건넬 때 사죄를 하고 싶다는 핑계로 아벨과의 약속을 받아낸 걸 지금 쓰는 것이었다.
그 시간을 이용해 아벨에게 아르시아를 소개할 생각이었다.
“정말이요? 저를 정말 만나 주시겠대요?”
“그럼 물론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준비해서 가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 저하께서 가벼운 친분을 나누는 자리이니 괜찮다고 하시더구나.”
거짓말이긴 했으나 아벨의 따뜻한 마음씨라면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저하께서는 사나 공주 저하와 약혼하신다던데…… 다른 영애를 따로 만난다면 안 좋은 구설에 오르시는 건 아니신지…….”
가문의 여자아이들에게서 그새 이상한 소릴 들은 것 같았다.
“하하― 네가 생각이 많나 보구나. 그런데 걱정 말아라. 저하께선 그 누구와도 약혼하시지 않으셨으니. 그리고 당분간은 할 생각도 없으시다고 하셨고 말이다.”
사실 결혼을 꺼린다는 그 말에 아주 실망했었지만, 그건 아직 딸을 만나보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미의 여신 프레이야의 현신이라고 말들 하지 않았던가?
14살밖에 안 됐음에도 아르시아를 직접 본 사람들마다 벌써부터 차세대 대륙 최고의 꽃이라며, 꽃 중의 꽃이라는, 화중화花中花라는 이명을 지어주었다.
딸의 미모를 이용하는 거 같아 마음이 걸렸지만, 자신이 본 아벨은 약자를, 상처받은 자들을 감싸 줄줄 아는 자였다.
‘……그렇지만 만약 딸에게 정욕을 품는다면…….’
물론 아벨도 남잔지라 아르시아에게 정욕을 품을 수는 있겠으나, 다른 이들처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런 더러운 마음을 품는다면 아무리 전설의 검술들이 욕심이 나긴 하지만 지금의 생각들을 전면 재고해볼 것이다.
‘……내 판단을 믿어볼 수밖에…….’
미카엘 백작이 아주 예전에 봤었던, 율리안이 말하던 아벨은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었지만 혹시 몰랐다.
그도 딸 덕분에 인간 혐오증이, 불신증이 생겨 버린 것이었다.
제발 아벨을 통해 자신도 그 인간 혐오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음 따뜻한 분이시니…….’
아벨을 아주 어릴 적부터, 철가면을 쓰기 전에도 보았었고 썼을 때도 몇 번 보았었다.
그래서 절대 아벨만큼은 다른 남자와 다를 거라는 확신이 있긴 했었다. 전에는 저렇게 공격당하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딸을 소개하지 않았던 것이지, 이제는 다르다.
그 잘생기고 총명한 아이가 어른들의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공격에도 걱정하는 수잔 황비를 위해 애써 밝은 척을 할 때마다 딸이 생각났었다.
가슴 찢어지게도 현재 자신의 딸도 그 불쌍했던 아벨과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약혼할 생각이 없으시대요? 왜요? 보통은 다 하시잖아요?”
“너도 알다시피 저하께선 신들의 축복을 많이 받으셔서 너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질투를 받으신단다. 그래서 적들이 좀 많은 편이시지. 그 적들에게 벌써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휩싸이길 원치 않으시는 것이란다.”
“아…….”
바로 그 뜻을 이해하는 딸이었다.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테지.
“그래. 너무 뛰어나게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적들이 많아지는 법이지. 그래서 많은 위험이 따를 테고. 물론 아벨 저하의 성취를 보면 앞으로 별문제 없어 보이시지만.”
“저도 검술을 배워둘 걸 그랬어요.”
그 말에 머릿속에 번쩍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이따 직접 보고 판단할 일이었다.
‘부디 내 판단대로 저하만큼은 다른 남자들과 다르길.’
제발 자신의 판단처럼 딸을 맡길 수 있는 남자이길 기도하는 미카엘 백작이었다.
* * *
아벨은 빠르게 목욕을 하고 가볍게 흰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격식을 따질 필요가 없었으니.
기다리던 시녀에게 말한다.
“가자.”
“네. 저하.”
시녀보다 앞서 걸어갔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기에 금방 응접실에 도착했다.
안에다가 알린다.
“아벨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그 알림에 율리안을 비롯한 미카엘 백작과 아르시아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드륵―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지금 올 줄 알았다면 수련을 좀 더 일찍 마쳤을 텐데.”
멈칫―
율리안뿐만 아니라 의외의 인물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아…….”
딱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아르시아!’
14살 여자아이가 아버지 미카엘 백작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반짝이는 두 눈으로 아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 같은 금발과 어린 나이임에도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완벽한 아름다움.
누구나가 완벽한 아름다움을 상상할 때 머릿속에 그리던 그 모습을 14살 여자아이에게서 볼 수 있었다.
모든 게 경이로웠으며 찬란하고 조화로웠다.
괜히 화중화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인위적이라는 느낌도 없이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모든 게 이상적인 조화와 아름다움으로써 작가가 누구보다 신에게 사랑받는 용사 아벨을 위해 일부러 만든 캐릭터였다.
아벨의 고난과 역경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친 아벨을 감싸주고 돌봐주던 여자.
아르시아 덕분에 아벨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족 멸살이라는 사명 완수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벨은 잠시 아르시아를 보느라 멍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정신을 차려보려고 노력했었지만, 아르시아의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바라보니 정신이 멍해지고 심장이 멎는 것만 같다.
그때 율리안이 먼저 말을 꺼낸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결코 죄송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벨의 멍한 표정을 보고는 뭔가 승리했다는 얼굴이다.
반면 미카엘 백작은 율리안과는 그 느낌이 조금 달랐었는데, 아벨에게서 딸에 대한 정욕이 보이지 않자 안도감에 여유를 갖게 됐었다.
“미카엘 다닐레비우스가 오랜만에 저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제 딸 아르시아 다닐레비우스입니다.”
아버지의 소개에 공손하면서도 더없이 우아하게, 긴장했는지 아주 떨면서 예를 갖춘다.
“……아르시아 다닐레비우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하…….”
“…….”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뒤 다가가 의자에 앉는다.
“……앉으시지요.”
시녀가 네 사람의 홍차를 가져왔다.
후릅―
한 모금 마시며 들뜬 가슴을 진정시킨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작가의 묘사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 퍼즐을 만난 느낌.
그리고 아르시아에게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는데, 그녀의 모든 것들이 예전 아벨과 같아 보였고 그래서 그런지 가슴이 한없이 먹먹하고 안타까워졌던 것이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일었다.
모든 것들이 다 불가항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