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91화. 정의의 신이 환생하셨다(2)
[다닐레비우스 백작가 성 내 회의실]
딸 있다는 대귀족 가문들 중에 아벨을 탐내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그러니 소설의 진 여주인공 아르시아의 가문 다닐레비우스 백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아벨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가주 미카엘 백작은 곧장 성으로 복귀해, 가문의 실세인 원로들을 모두 모아 회의를 가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 아르시아의 짝으로 어떨까 해서 이렇게 급히 모이시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원로 중 한 명이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말한다.
“아직 14살밖에 안 됐습니다. 가주. 벌써부터 논의하는 건 이르다고 봅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것에 대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다.
“어리니까 약혼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약혼한다고 바로 함께 사는 건 아니니, 그것에 대해선 크게 걱정할 필요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시지요. 만약 아벨 저하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제야 황실 무고에서 벗어난, 말로만 전해 듣던 전설의 검술들인 뇌전마검과 흑풍흡검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3대 검술 명가 중에서 바로 우리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주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에 대부분의 원로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미카엘 백작이 말을 잇는다.
“지금 들리는 말에 의하면 스테판 백작이 우리와 같은 생각으로 케이를 아벨 저하에게 첩으로라도 주려고 한다고 합니다.”
“……?!”
“아슈트반 가문에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재능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려는 것 같습니다.”
“허허…… 케이. 그 아이를 그렇게나 애지중지하게 키우더니.”
“하긴 욕심이 날 만도 하지 말입니다. 저 역시 뇌전마검과 흑풍흡검을 보고 온몸에 전율이 돌았으니 말입니다.”
그 긍정적인 말에 미카엘 백작은 힘을 얻어 말한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회의를 소집한 것입니다. 이번에 뒤처진다면 따라잡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가주께서는 아르시아를 아벨 저하의 첩으로 보내실 생각입니까? 아슈트반 백작가도 아벨 저하께서 미스라임의 공주와 혼인할 거라 생각해 첩으로 보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결정을 도와줄 아이를 불렀습니다.”
뒤돌아 대기하고 있던 집사에게 말한다.
“들여보내라.”
“네.”
끼이익―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이번 무투회의 진행자를 맡았던 율리안 다닐레비우스가 들어온다.
“율리안 다닐레비우스가 가문의 가주와 원로들을 뵙습니다.”
허리 굽혀 예를 갖춘 율리안은 가주의 손짓에 따라 가주의 옆에 섰다.
“이 녀석이 이번 정의 무투회 최종 진출자들의 총괄 진행을 맡았었습니다. 그때 아벨 저하에 대해 본 것이 있다 하여 불렀으니, 율리안에게 직접 본 아벨 저하에 대해 물어보시지요.”
곧바로 원로 중 하나가 입을 연다.
“우선 자네가 본 아벨 저하에 대한 솔직한 평을 듣고 싶군.”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저는 처음엔 굉장히 그분을 무시했었습니다. 이유는 신성한 정의 무투회에 여자를 끼고 온 듯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황실의 명으로 아벨 저하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었지만, 그건 별개로 저하의 첫인상은 최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러네이라는 아이 말하는 건가? 여자라면?”
“네. 맞습니다. 러네이 그 아이 때문에 그랬었습니다.”
“그렇군. 하지만 사실 우린 러네이, 그 아이의 강함에 매우 놀랐었네.”
“네. 저도 처음엔 러네이를 그저 관심종자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아주 강력한 저하의 원군이었습니다. 솔직히 전 그녀가 우승할 거라고도 생각했었습니다. 너무 쉽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상대들을 격파하고 올라와서 말입니다.”
“자네 말은 저하께서 일부러 적들을 줄이기 위해 데리고 왔다는 말인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음― 알겠네. 그럼 더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은 없는가?”
당연히 아벨에 대한 평은 이게 다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더 있습니다. 그럼 좀 더 아벨 저하에 대해 원로님들이 잘 판단할 수 있을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일들에 관해 설명하는데, 바로 처음 중앙 대기실에서 있었던 크리스찬에 의한 돌발 상황에 대한 의연한 대처라든가, 러네이에게 개 처맞듯 맞은 앤디에게 그의 검사로서의 자신감을 되살려주기 위해 직접 찾아가 대신 사과한 일이라든가, 무엇보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보란 듯이 그 곤경을 정면으로 극복하고 결국엔 우승한 일에 대해 말을 했다.
아벨에 대해 열렬히 설명하는 그는 이미 아벨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어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면 네 말뜻은 아르시아를 아벨 저하의 첩으로 내어주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더냐? 뿐만 아니라 우리가 황태자 저하의 노여움을 받게 되더라도?”
“네. 노여움을 받겠습니다만 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고작 16살에 7성 후반일 뿐만 아니라 전설의 검술인 뇌전마검과 흑풍흡검을 쓰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검술들로 9성 검사를 가볍게 이기셨고 말입니다. 그분께선 앞으로도 황실의 어떠한 공격에서도 충분히 이겨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께서 도와주신다면 황태자 저하의 노여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아르시아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르시아가 이 약혼을 원치 않는다면 전 절대 반대입니다. 무엇보다 그 아이의 행복이 우선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몇몇 원로들은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몇몇은 당연히 두 전설의 검술이 더 중요하다면서 불만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양쪽이 타협할 생각이 있는 듯했다.
아르시아가 원해야지만 약혼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던 원로 중 하나가 묻는다.
“그렇다면 이번 광장 무도회 때 아르시아를 데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그땐 우승자로서 아벨 저하도 참석하실 것 아닙니까? 그 후에 아르시아의 생각을 들어보지요.”
미카엘 백작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원로들도 그게 좋겠다는 반응이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중립적인 척 말하는 미카엘 백작은 지금의 분위기를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는데, 사실 저 멘트는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이미 율리안과 짜둔 멘트였던 것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거의 대부분의 원로들을 충분히 납득시킨 것 같았다.
그러자 다른 걱정이 든다.
‘그런데 아르시아가 과연 좋아할까…….’
사실 그도 스테판 백작처럼 딸을 정말 굉장히 애지중지하던 자였다.
아르시아가 그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에 어릴 때부터 갖은 질투와 괴롭힘, 남자들의 정욕에 빠진 눈빛을 감당해야 했기에, 일부러 아직까지도 사교계에 데뷔를 시키지 않았을 정도였었다.
그럼에도 이번 아벨에게 첩으로라도 보내려고 약혼을 적극 고민하고 있었던 이유는, 이때까지 봐온 아벨의 모습이 대단히 자신의 딸과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니야. 분명 두 사람은 마치 운명인 것처럼 잘 어울릴 거야. 확실해.’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 * *
황금빛 정오의 햇살 같은 금발과 티끌 하나 없는 하얗고 투명한 피부, 적당히 오뚝한 코와 작고 장미처럼 붉은 입술, 갸름하고 완벽한 턱선, 기품 있는 큼지막한 눈망울과 우아한 긴 속눈썹, 그리고 그 속에 빛나고 있는 에메랄드빛 반짝이는 총명한 눈동자.
미의 여신 프레이야가 현신했다고 해도 믿을 소녀가 장막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창가에 앉아 있었다.
아직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을 봤다면 누구라도 몇 년 뒤 대륙을 울릴 미인이 될 거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아벨 저하…….’
분명 미카엘 백작은 아벨도 자신처럼 남들에게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했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셨다고 했었어…….’
결국엔 자신의 힘으로 극복해 현재는 전설의 두 검술을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의 무투회에서 앞으로 영원히 나올 수 없을 16세 최연소로 우승함으로써 현 대륙에서 그보다 더 뛰어나고 찬란한 사람은 없을 거라면서도.
‘어떻게 극복하셨을까…….’
그 괴롭힘을 당한 정도가 자신과 비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아니 좀 더 심할 거라고 했었다.
생모인 수잔 황비를 제외한 황궁의 모든 인원이 아벨을 죽이려 했었으니.
‘내일이면 만나 뵐 수 있다고 했어…….’
반드시 만나 뵙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던 미카엘 백작이었다.
이때껏 가문 외의 남자는 그 어떤 남자라도 접촉을 차단했었던 그였음에도 말이다.
그만큼 아버지가 자신을 믿고 맡길 수 있다 생각한 것 같았다.
그게 너무 신기했었고, 그래서 남자를 혐오하던 그녀였지만, 아벨이란 사람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고 있었고 관심이 가고 있었다.
‘어떤 분이실까……?’
미카엘 백작은 아르시아가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대가 됐었다.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 내일이 왔으면 했었다.
‘……빨리 만나 뵙고 싶어…….’
자신도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보통의 소녀일 뿐이었다.
이 지옥 같은 삶에서 구해줄 왕자님을 기다리는 꿈 많은 소녀.
오늘따라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초롱초롱해 보였고 달빛이 어느 때보다 부드러워 보인다.
* * *
아벨은 정의 무투회의 우승으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걸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모든 대귀족이 뇌전마검과 흑풍흡검을 노리고 아벨의 호감을 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물론 대귀족들에게서 호의를 받은 것과 비례적으로 최고 대신관들에게서는 따가운 적대감을 느껴야 했었다.
‘확실히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많은 관심을 받고 있군.’
최고 대신관들은 아벨이 정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정의의 신의 환생, 즉 아직 나타나지 않은 타티스의 화신체인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만에 하나 주신 아그네스가 보낸 용사인 것인지 헷갈려했었다.
‘구린 것들이니 내가 용사라는 게 드러난다면 대단히 볼 만하겠어.’
현재 정의의 신의 최고 대신관은 분명 정의의 신에게 어떻게든 신탁을 받으려 할 것이다.
도대체 아벨이 누구냐면서.
‘그리고 이제 곧 10인회의 정기 모임이 있을 테니, 만약 신탁이 내려진다면 그때 그 내용을 공유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아벨을 죽여야 한다는 황제의 입김이 통할 수도 있었다.
‘하베츠를 죽인 후에 바로 황제도 처리해서, 최대한 빨리 세르지를 황제로 세워야겠어.’
진짜 아버지도 아니었기에 그렇게까지 죄책감이 들지 않았었다. 물론 아벨의 기억이 여전히 그를 아버지라 여기고 있는 듯은 하지만 선수 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이 따를 것이다.
‘이래서 무투회에 나가는 게 양날의 검인 것이었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을 고통에 빠지게 할 순 없었으니.’
그랬다.
성격상 자신 혼자 고통받는 건 괜찮았지만, 자기 때문에 주위 사람이 고통받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고통을 받으면 꼭 어머니가 떠올랐다.
똑똑―
“저하. 케이 영애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늦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꼭 지금 만나야겠다며 아벨이 머무르고 있는 저택으로 찾아온 그녀였었다.
“들어오라고 해라.”
“네. 저하.”
드륵―
문이 열리고 은은한 밤하늘과 같은 흑발의 매우 아름다운 여자가 들어왔다.
이제 곧 17살이라 그런지 이제는 사나처럼 성숙한 아름다움도 뽐냈었기에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걸 느낀다.
“……그래. 무슨 일이더냐?”
“그냥…… 뭐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오나요……?”
조금 서운한 듯한 얼굴이다.
“일단 앉아라. 딸기 우유 한잔하겠느냐?”
“네…… 주세요…….”
시녀를 바라보자 시녀가 허리 숙여 예를 갖추고는 딸기 우유를 가지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