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80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다.
놈은 갑자기 사라진 나를 찾으려 애먼 허공을 훑는다.
콱!!!!
비늘로 뒤덮인 발 부분에 검이 길게 박아 넣었다.
세상에서 단단하다는 물질은 저항없이 쪼개진다.
마력의 도움 없이 순수한 악력만으로 만들어 낸 결과였다.
<거인신의 가호>스킬은 기대 이상의 성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속 시간이 십 분밖에 안 된다는 게 조금 아쉽군.’
[크으으윽!!!!]
발목을 지탱하는 근육까지 끊어버린 탓에, 그는 크게 비틀거린다.
나는 분수처럼 솟아나는 핏물 사이로 웅크리고 있던 아렐리아를 발견했다.
육중한 발바닥 사이에 있던 것 치곤 꽤나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다.
몸에 붙은 먼지 몇 번 툭툭 털어 주고 주머니에 쑤셔 넣자, 드래곤은 크게 분노하며 포효를 내뱉었다.
[크아악!!! 그건 네 것이 아니야!! 감히 인간 따위가 손댈 수 없는 고귀한 그릇이란 말이다!!!]
아까부터 생각했지만, 말에 섞인 단어 하나하나가 거슬린다.
맹약이며 그릇, 그리고 렌까지.
오래 산 고룡으로 보이는 만큼 알고 있는 정보가 상당해 보인다.
콰앙!!!쾅!!
놈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슬슬 열이 받는지 마법이며 육탄전에 가까운 온갖 것들이 날아온다.
[끄아악!!!]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지 그의 시선에는 초점이 없다.
쏘아져오는 마법 역시 하나하나가 막강하지만 사라진 정신만큼이나 정확하지 않다.
어렵지 않게 피하며 끊임없이 놈의 하체에 검을 쑤셔 넣었다.
‘<타락>이 심해지는군.’
가뜩이나 탁하던 겉모습이 점점 시커멓게 물든다.
인간 도전자를 공격하는 종족들에게 익히 보던 현상이었다.
[죽인…… 죽인다…… 끄으으……]
중얼거리는 말도 이제는 미친 것마냥 어눌하다.
놈은 이제 척 봐도 폭주하기 직전이었다.
더 늦기 전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찰나.
순간 드래곤의 몸뚱이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크……으으윽.]
크게 벌린 주둥이 사이로 마력이 모인다.
브레스였다.
한 번의 공격으로 모든걸 끝내려는지 기운은 심상치 않다.
하지만 집중하는 만큼 빈틈은 커지기 마련인 법.
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동시에 내질러진 검은 정확히 드래곤의 미간을 향했다.
콰직!!!!
[아아악!!!!!!]
기우뚱거리며 고통에 이기지 못한 신체가 기울어진다.
그 틈을 타 놈의 척추를 향해 크게 발길질을 했다.
퍼어어억!!!!!!
겉을 보호해 줄 비늘과 가죽이 움푹 파인다.
으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대한 몸뚱이는 결국 바닥을 향해 추락한다.
쿠우우웅-
[끄윽……]
시야를 막는 뿌연 흙먼지 사이로 향했다.
느긋한 걸음걸이에도 놈은 고통에 겨워 움찔거릴 뿐, 큰 움직임은 없었다.
[<거인신의 축복>효과가 사라집니다.]
온몸에 들끓던 힘이 서서히 줄어든다.
짧았던 효과에 잠시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미 놈은 만신창이에 가까운 상태.
크게 힘쓸 일은 더이상 없었다.
[끄으으……!! 죽인…… 다.]
나를 보자마자 거대한 아가리가 쩍 벌어지며 공격을 시도한다.
텅 빈 동공에는 살기만 넘실거린다.
“완전히 맛이 갔군.”
<타락>한 것 치고는 정신줄 잘 부여잡고 있다 생각했는데.
검을 높게 들고 놈의 주둥이에 꽂아 넣었다.
퍼억!!
[컥……!!!]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놈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기 위해 마나를 담아 검을 휘둘렀다.
퍼억!!! 퍼어어억!!!
공터에는 드래곤을 후드려 패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는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마냥 너덜거린다.
멍이 들었는지 비늘 사이로 얼핏 드러난 가죽은 푸른 색이었다.
[큭!! 잠…… 잠깐!!]
연이어 구타를 이어 가는 와중.
갑자기 놈이 다급하게 소리친다.
말못하는 짐승마냥 행동하던 놈 치곤 격렬한 반응이었다.
[설마……그대는 탑을 오르는 도전자인가? 그것도 왕의 자리까지 모으고 있는 것 같은데……]
흐트러져 있던 방금에 비하면 꽤 또렷한 말투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 역시 이제껏 본 중 제일 맑다.
그 안에 담긴 적의는 어느새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맞다만, 우리가 통성명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왜 아는 척이지?”
[아니, 말해 준 적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아는가……]
그는 억울한듯 구시렁거린다.
생각해보니 나만 드래곤의 정보를 일방적으로 알고 있었나.
그러나 그가 나에 대해 알게 되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터.
갑자기 고통마저 잊은 채 얼굴에 화색이 도는 놈의 얼굴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일단은 맞다는 거군. 좋아, 아주 좋아. 어쩐지 점점 정신이 차려진다 생각했어. 자, 어서 날 계속 때려 주게!!]
……X발, 지금 이 도마뱀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지.
설마 맞는걸 즐기기라도 하는 건가.
뜬금없이 터져 나온 개소리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미간은 있는 힘껏 구긴 채였다.
[왜 멈추는 건가? 아까처럼 마나를 가득 담아서 날 때리란 말일세! 특히 심장 근처면 더 좋겠군!]
끙끙거리던 놈이 벌러덩 배를 까뒤집는다.
그리고 곧 날라올 공격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는다.
이 미친 드래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던쯤.
나는 정령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정령왕들도 주먹을 날릴 때마다 조금씩 <타락>에서 회복되었는데…… 설마 그걸 알고 있는 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고 그가 말한대로 검집을 휘둘렀다.
둔탁한 타격음이 연신 퍼져 나갔지만 드래곤은 미동조차 않는다.
오히려 신음을 눌러 삼키며 나를 보채기까지 했다.
[큭…… 조금 살살…… 아니, 세게!!]
“젠장, 그 입은 좀 닥칠 수 없나?”
점차 기분이 이상해진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윽박을 질렀다.
그제서야 그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해진다.
그렇게 삼십여 분이 흘렀을까.
슬슬 단순 반복되는 구타에 손아귀가 얼얼해질쯤, 주머니가 꿈틀거린다.
“[으으…… 머리야……]”
기절했던 아렐리아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그녀가 끙끙대는 드래곤을 발견하고 입을 떡 벌린다.
퍼억!!
[제발 뼈는 피해서 때려 주게…… 그래도 슬슬 된 것 같군…… 크으으……]
“[……마왕님, 이게……무슨 일이죠……?]”
넋 나간 것마냥 중얼거리는 아렐리아를 향해 드래곤이 묘한 시선을 던진다.
마치 시장에서 물건에 흠집이 있나 샅샅이 살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흐음, 역시 착각이 아니었나. 어째서 마기가 느껴지는지는 모르겠…… 윽!! 그만. 이쯤이면 되었어. 고맙네.]
남을 때리고 감사 인사를 받기는 처음인데.
역시 오래 살아 보고 볼 일이라 생각하며 나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화아악-
잠시 빛이 감돌더니 거대한 몸뚱이가 천천히 줄어든다.
그는 어느새 푸른 머리를 가진 미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덕분에 지난 몇백 년 중 제일 정신이 맑군. 이미 망가져 버린 신체는 어쩔 수 없겠지만.”
쓰게 웃던 그가 대뜸 머리를 숙인다.
고마움의 표시였다.
하지만 자존심 높다던 드래곤이 할 행동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지. 내 이름은 에우로델. 그대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탑을 오르는 도전자겠지. 그렇다면 분명 렌 그 자식을 알고 있을 테고.”
으득, 이빨 갈리는 소리가 난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까지 잘게 떨고 있었다.
“원한이 상당한가 보군.”
보통의 드래곤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경의를 표하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상반된 반응이다.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자 에우로델은 긴 이야기를 할 셈인지 자리를 잡고 주변에 기대어 앉는다.
“……그래. 감히 나를 속이고 맹약을 건 작자를 좋아할 수는 없겠지.”
“맹약이라. 이것과 관련된 건가.”
나는 옆에 있던 아렐리아를 주워들었다.
양손에 잡힌 작은 몸뚱이가 덜렁거렸다.
“어째서 그게 깨어난지는 모르겠군. 그 알에는 영혼이 없기에 절대 탄생할 수 없는 상태였어. 그리고 렌 놈은…… 그걸 속이고 ‘부화할 때까지 알을 지키라’는 맹약을 하게 했지. 그때에는 백 년 정도만 지나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지.”
“거하게 속았군.”
“[멍청하네요.]”
아렐리아조차 신랄하게 그를 비판한다.
이래서 계약서를 들이밀 때는 꼼꼼히 살펴야 하는 법이다.
용언으로 진행하는 맹약씩이나 하면서 별 생각없이 승낙한 그의 어리석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뒤통수치는 솜씨가 거의 마족의 계약급인데.’
그나저나 같은 종족을 등쳐 먹을 생각을 하다니.
어지간히도 인생, 아니 용생 막사는 놈이었다.
“그리고 그걸 도둑맞자마자 점점 이성을 잃는 날이 많아지더군. 잠깐 정신을 차릴 때마다 파괴되어 가는 대륙…… 끔찍한 나날이었어.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했지. 그 망할 맹약이 나를 구속하고 있었기에.”
그간의 사정을 중얼거리던 그가 잠시 입을 다문다.
그리고 아렐리아의 통통한 앞발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하지만 나를 구원해 줄 존재가 나타났지. 절대 부화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헤츨링과 함께…… 쿨럭.”
왈칵, 갑자기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새어 나온다.
에우로델은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쓸쓸한 얼굴로 바닥을 물들이는 피를 바라본다.
“역시 <타락>이 이미 심장까지 스며들었군. 그대의 힘으로도 이제는 무리야. 살아생전 놈을 내손으로 무너뜨리고 싶었건만, 시간이 없겠어…….”
털썩-
놈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오직 분노만 가득한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본다.
‘죽어 가는 드래곤에, 해결할 수 없는 원한이라. 뻔하군.’
“제발 날 대신해 놈을 죽여 주게. 마지막 남은 드래곤의 힘을 그대에게 주겠네.”
역시나 이런 전개인가.
뻔한 상황에 피식 웃음을 머금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놈은 내게 죽을 운명일 텐데. 뭐, 그래도 그 힘은 고맙게 받지.”
“분명 그대도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리고…… 지금 보니 내가 줄 것은 힘만 있을 것 같지 않군.”
푸른 눈동자가 내 허리춤에 매달린 성검을 향한다.
왜인지 크게 만족하는 눈빛이었다.
얻어맞을 때 사용한 몽둥이에 그새 정이 든 건가.
알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하던 때, 그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온다.
동시에 막강한 힘이 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큭…….”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친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마나는 전에 받았던 헤르멘의 힘보다 강력하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밀려들어오는 마력을 받아들였다.
곧 억겁같이 느껴지던 시간이 끝나고, 흘러 들어오던 힘은 점점 잦아든다.
어느새 눈앞에 있던 에우로델은 먼지가 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후우…….”
“[……끝난 건가요? 확실히 강력한 드래곤이었나 봐요. 마왕님이 식은땀 흘리시는 건 처음 봐요.]”
아렐리아가 기쁜 기색으로 호들갑을 떤다.
나비마냥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그녀를 구경하며 마나를 잠재우고 있을쯤.
갑자기 가만히 있던 성검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건 천족 물건 아니랄까 봐 내 손에 있을 때마다 아주 지랄발광을…….”
[큼큼…… 도전자여?]
이제 환청까지 들리나.
행동을 멈춘 채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성검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검은 기쁘다는 듯 다시 진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