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36화
[아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분명히 제 <타락>은 멈췄어요. 정신이 돌아왔으니, 확실하죠. 하지만 제 힘은 반절도 남지 않은 상태. 이 정령계에서는 회복이 더 더딜 거예요.”
힘을 되찾기 위해 변화하는 공간으로 가겠다는 건가.
그녀의 의도는 확실하게 전해졌다.
‘하지만, 어째서?’
요정계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내가 왕이 되자마자, 거짓말처럼 <타락>상태가 회복되었다.
마치 나를 반기는 듯한 느낌마저 받을 정도.
아마 정령계도 그렇게 될 터였다.
[어차피 힘을 찾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느냐. 정령왕 자리를 넘길 테니.]
정령신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의아하게 되묻는다.
그러나 실피드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두 눈에는 확고한 의지가 내비쳤다.
“넘긴다면요? 이미 자연재해로 난장판이 된 니시크라메 대륙이 돌아오나요?”
[……그곳은 정령들이 아니어도 이미 오염된 곳이었어. 그러니 순수한 정령들이 미쳐 갔던 것이고. 너희의 <타락>도 어찌 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단다.]
“하지만 저희는 조금 더 노력해 볼 수 있었어요……그들이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해도, 정령들이 더욱 힘을 냈다면 회복이 가능했을지도 몰라요.”
[그건……]
정령신은 결국 입을 다문다.
어떠한 설득도 그녀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당신이 정령왕이 된다 해도, 정령은 아니기에 자연을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해요. 그러니, 저를 그 ‘감옥’으로 보내 주세요. 어느정도 힘을 찾고 나면 저는 대륙으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그녀는 간절한 목소리로 서서히 무릎을 꿇는다.
극도로 공손한 태도였다.
“참회라도 할 셈인가.”
그것도 이제 와서.
병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행동이 우습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어떻게 비춰질지 잘 알아요. 하지만 소멸하는 그날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하고 싶어요. 그러니…….”
실피드는 입술을 깨물며 한층 더 깊게 고개를 숙인다.
정령신은 곁에서 아무 말도 없이 우두커니 서있다.
하지만 그녀를 염려하는 기색은 가득했다.
‘뭐, 사실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나는 바로 스킬 <변화하는 공간의 문>을 발동했다.
곧 내 옆에는 거대한 푸른빛의 마나가 넘실거리며 입을 벌린다.
실피드는 점점 얼굴이 밝게 변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저……또 하나 부탁할 것이 있는데. 정말 별건 아닙니다.”
“뭐지?”
“다른 동생들, 그러니까 물과 대지의 정령왕도 저처럼 구원해 주실 건가요?”
“구원은 모르겠고, 구타는 할 예정이다만.”
“구…… 타. 음, 그렇죠.”
반짝이던 그녀의 눈이 점점 동태 눈깔이 되어 간다.
무슨 기억이라도 떠올리는 건가.
잠시 먼 허공을 보던 실피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럼 그들도 정신을 차린다면 바로 이 곳으로 보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차피 정신을 차리지 않아도 변화하는 공간에 넣을 생각이었는데.
사실 의도치 않게 실피드가 괜찮아진 거지, 애초에 내 계획은 그녀를 흠씬 두들겨 팬 후 기절시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미친 정령이 제 발로 변화하는 공간에 들어가진 않을 터.
강제로 던져 넣는다 해도, 빠르게 빠져나올 가능성도 컸다.
편의상 ‘감옥’이라 부르긴 해도 정말로 쇠창살이 있는 장소는 아니었으니.
“그러지. 어차피 억지로라도 집어넣을 생각이니까.”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잘되었군요. 저 역시도 동생들을 억지로 감화시킬 생각이랍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설득은 제가 맡죠. 절대 귀찮은 일은 없으실 거예요.”
실피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금 정령신을 돌아본다.
그는 이별할 시간을 깨달아 눈에 띄게 침울해진 상태였다.
[……정말 이래야 하느냐?]
“네. 반드시요. 그럼, 다시 보게 되는 그날까지 부디 조심하세요.”
[신인 나보다도 너를…… 어휴. 되었다.]
비둘기는 툴툴거리며 날개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정말로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처럼 비춰질 정도로, 그들은 따스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마족들을 장난감 취급하는 어느 동네 신과는 정반대였다.
“아, 그리고. 다음 대 정령왕님?”
작별 인사를 마치고 문으로 들어가기 전.
그녀가 나에게 슬쩍 다가온다.
“혹시 렌이라는 골드 드래곤을 아나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물론 워낙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드래곤인지라, 그들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 타이밍에 나올 주제는 아니지 않나.’
“역시. 반응을 보니 알고 계시는군요. 저희가 타락하기 전, <그녀>가 찾아왔었어요. 자연에게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고 파괴하려는 인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않겠냐면서요.”
그녀는 기억을 회상하는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재차 말을 이어 간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건 렌이었던것 같아요. 감히 <그녀>의 모습을 흉내 낼 존재는 차원을 통틀어 그밖에 없을 테니까.”
“요정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던데. 설마 전 차원계를 돌아다니며 이간질을 시키고 다녔던건가.”
“아마도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희는 인간이 왕이되리라는 <예언>을 신경 쓰지 않았어요. 본디 정령은 인간과 계약을 맺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니까요. 어떻게 보면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 하나.”
정령사들을 말하는 건가.
실제로 헌터들 중에서도 정령을 부릴 수 있는 자들이 몇 있었다.
이 꼴이 되면서 점점 소환조차 힘들게 되었지만.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인간을 향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무언가 힘을 쓴 듯이…….”
말꼬리를 흐리지만,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녀는 거기까지 말을 마치고 다시 빙긋 웃는다.
발걸음은 열려 있는 문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 된 자들이 그 정도도 버티지 못해서야 부끄러운 일이죠. 이런 저희에게 기회를 주셔서 고마워요.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그럼 안녕히…….”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사라진다.
정령신은 이제 어디서 꺼냈는지도 모를 손수건을 부여잡고 있었다.
[크응, 킁! 아직 이천 년 정도밖에 살지 않은 핏덩이가 어느새 자라서 저런 기특한 생각도 하고……]
……보통 그 정도를 핏덩이라고 표현하나.
부모의 눈에 자식은 평생 아이라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나는 꼴불견인 비둘기에게 다가가 몸통을 덥석 잡아들었다.
그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아직 갈 길이 멀지 않나. 빨리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
[아,그렇지! 잠시만 기다리게.]
그는 황급히 기운을 끌어낸다.
우리는 다음 정령왕을 만나기 위해 여태껏 둥둥 떠 있던 하늘을 벗어났다.
* * *
퍼억!!!
“끼에엑…….”
[좀 더 세게 때려 보게! 그래야 팍팍 정신차릴 것 아닌가??]
차마 못 보겠다고 고개를 돌리던 정령신은 이미 과거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무자비한 비둘기뿐.
“정신 사나우니 입 좀 닥쳐. 잘못하면 소멸할지도 모르니.”
무조건 강하게 후려 팬다고 능사는 아니다.
나름대로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하거늘.
그에게 핀잔을 주자, 비둘기의 부리는 금세 꾹 닫힌다.
퍼억!!
“끄윽…….”
고요 속에서 대지의 정령왕인 오리에드의 비명소리만 가득하다.
그렇게 이십여분 지났을까.
슬슬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온다.
실피드보다는 훨씬 빠른 시간이었다.
이 짓도 두 번째라고, 나도 모르게 익숙해지고 있는 듯했다.
“정…… 령신님??”
[오오……. 내 아들!]
비둘기는 오리에드를 향해 빠르게 날아간다.
그렇게 감동의 재회가 다시금 시작되려는 찰나.
나는 재빨리 그의 날개를 잡아챘다.
[꾹!!]
잔뜩 놀랐는지 그는 엉겁결에 정말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낸다.
신이라면 조류의 언어쯤은 가볍게 배울 수 있는 건가.
“그런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 가만 지켜볼 생각 없다. 마지막 정령왕에게 안내해. ”
변화하는 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파닥거린다.
마치 이정도도 못 기다려 주냐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어리둥절해 하는 오리에드의 뒷덜미를 잡아 문으로 질질 끌어넣었다.
“이……이게 뭐 하는……??”
“잘 가라. 자세한 건 실피드가 설명해 줄 거다.”
“정령신이시여……??”
오리에드는 다급히 정령신을 찾는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비둘기뿐.
[큼……나쁘지는 않은 곳이란다……]
“예????”
“아, 그리고 줄건 주고 가야지.”
나는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구릿빛 왕관에 손을 뻗었다.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의 왕관을 획득하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물건까지 탈탈 털린 정령왕은 결국 버둥거림을 멈춘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뼈아픈 배신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한 마리 남았군.”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그는 투덜거리며 다음 장소로 향할 준비를 한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단계였다.
‘이제 헌터들만 주워서 나가면 되겠군.’
이쯤이면 서채아도 헌터 몇십 명은 만났을 터.
그중에는 월드 랭커도 섞여 있을테니, 정령왕만 아니라면 그들도 어렵지 않게 버티고 있으리라.
그들은 그저 내가 모든 일을 마치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다음 정령왕은 물 속에 있나?”
[바다 한가운데이지만 자네라면 숨쉬는데 무리는 없…… 응? 잠깐만. 엘라임이 왜 뭍으로 나와 있지?]
물의 정령왕의 위치를 추적하던 그가 크게 당황한다.
순간, 좋지 않은 직감이 들었다.
“어디든 상관없으니 빨리 이동이나 해.”
재촉받은 그는 황급히 신력을 사용한다.
주변을 가득 메우던 짙은 흙내음은 곧 바다 비린내로 변했다.
쿠우웅-!!
“힐러는 이쪽으로!!”
“일반적인 물리 공격은 소용없어요!! 스킬을 쓰세요!”
도착한 해변가는 난장판이다.
헌터들은 물의 정령들과 뒤섞여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설마, 헌터들이 여기 있다는 것은……’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 미쳐 날뛰기 시작합니다!]
역시나인가.
검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쪽에는 엘라임이 있었다.
어지간히 들쑤셔 놨는지, 여태껏 본 정령왕 중 제일 분노에 차 있었다.
[좀 애먹겠는데.]
정령신조차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든다.
그냥 가만히만 있는 게 그리 힘든 일인가.
아니면 내가 헌터들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해 왔던건가.
하기사, 전투의 프로페셔널들을 모아 놓고 잡다한 정령만 상대하라는 게 말이 안되는 일이었을지도.
헌터들는 본능에 가깝게 보스 몬스터를 찾아내니, 이번에도 게이트를 나가기 위해 한 행동일 것이다.
“진 님!”
작게 한숨 쉬며 그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때, 전투에 열중하던 한 헌터가 나를 발견한다.
여전히 복장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강준하였다.
“여기까지 저희를 구하러 오셨다 들었습니다. 면목이 없군요.”
“이도윤은?”
그는 엘라임과 가장 가까운 방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잔뜩 흥분한 얼굴의 이도윤이 있었다.
오랜만의 전투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후……다들 비켜.”
“응? 진 헌터님?”
“전투 중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금만 더 하면 끝이 날 겁니다.”
그래, 전투 중이겠지.
그것도 한가닥하는 헌터들이 죄다 모인만큼, 자칫하다 엘라임을 소멸시킬 수도 있을 전력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었다.
나는 만류하는 헌터들을 뒤로한 채, 크게 도약했다.
“위험합니다!!!”
엘라임이 코 앞에 서있다.
그녀가 공격해 오기 전.
재빨리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목적은 엘라임이 쓰고 있는 왕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