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26화
“어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잠도 잘 못 잤다고요!”
그녀는 잔뜩 볼멘 소리로 중얼거린다.
“잠을 못 잤다고? 그런 것 치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얼굴은 퀭하기는커녕, 여전히 매끄럽다.
오히려 전보다 윤기나는 머리카락이며 백옥 같은 피부까지.
생각보다 잘 먹고 잘 놀았던 모양이었다.
“진짜인데요…….”
내 눈빛을 읽은 아렐리아가 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발까지 동동거리는 게, 진심으로 억울해 보인다.
“이상하게 며칠전부터 마기가 늘어나서 강해졌어요…… 그래서 상태는 전보다 좋아 보일지도 모르지만요.”
과거의 꼬맹이 아렐리아에게 마기를 흡수시킨 덕분인가.
짐작가는 일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기억은 나만 하는 거겠지만.’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며 중얼거리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다른 공작들보다 약했던 힘이 지금은 마르바스조차 능가할 정도다.
“저…… 아는 마족입니까?”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헌터 한 명이 조심스레 묻는다.
여지까지 만났던 마족들과는 반응이 영 달랐던 탓에, 궁금증이 차오른 듯했다.
“감히 이야기를 하고있는 데 끼어들다니.”
대화를 방해받은 아렐리아의 기세가 급격히 흉폭해진다.
그녀가 얼음같이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자, 헌터 몇몇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금세 전투 직전과 비슷하게 변해버린다.
‘아렐리아는 덤벼오는 자를 무시할 만한 성정이 아닌데.’
역시나 그녀는 은근슬쩍 마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지금은 상황을 중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만. 지금은 여기서 나가는 게 우선이다.”
“......알겠어요.”
아렐리아는 금세 꼬리 내린 강아지마냥 시무룩해졌다.
그녀의 급격히 달라진 기세에, 헌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저는 제 할 일을 잊지 않았답니다. 이제 마무리해 볼까요?”
그녀가 방긋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온다.
무릎은 당연하다는 듯 서서히 굽혀진다.
여태껏 몇 번이나 보아왔던 광경이다.
하지만 항상 내 곁을 지키는 수하라 그런걸까.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복종의 맹세는 확연히 다른 기분을 선사한다.
“제가 어찌 감히 마왕님을 상대하겠습니까? 저는 당신에게 영혼까지 복종한 상태. 전투는 진행하지 않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감긴다.
어딘가 벅차오르는 감정마저 느껴졌다.
“그럼, 마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나의 마왕이여.”
아렐리아가 진한 미소를 띄운 채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기나긴 여정을 끝내는, 마지막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마계의 침략자>가 종료됩니다.]
[아시아-대한민국 <검은 탑> 31~40층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익숙한 풍경을 맞이했다.
<검은 탑> 밖은 달빛 하나 없는 한밤중이었다.
“흐읍! 지구 공기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이제야 공략이 끝났네요…… 진짜 힘들었다…….”
가뜩이나 피곤한 헌터들이 차가운 밤공기를 맞이하자, 얼굴은 더 죽상이 되어 갔다.
그리고 그때, 헌터들보다 더 얼굴이 좋지 않은 자가 다가왔다.
“......다들 돌아오셨군요.”
오랜만에 보는 박신우의 얼굴이 지나치게 어둡다.
눈 밑이 퀭한 게, 며칠 잠을 자지 못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48명. 모두 무사 귀환이다.”
“......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바로 그에게 원하는 정보를 알려 주자, 박신우의 몸이 푹하고 꺼진다.
털썩-
“헉!!! 박신우 지부장님!?”
“뭐, 뭐야……?”
……설마 기절한 건가?
가슴팍을 보니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데.
인상을 찌푸리고 주변을 살피자, 협회 직원 몇이 다급히 뛰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잔뜩 놀란 헌터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평온해 보인다.
심지어 기절한 박신우의 입에 포션 몇 개를 부어넣기까지 한다.
그 자연스러움과 물 흐르는 듯한 속도를 보아하니 한두 번 해 본 솜씨는 아니었다.
“걱정 마세요, 헌터님들. 지부장님은 그냥 기절한 것뿐입니다.”
“아니, 무슨 일 있었나요?”
“잠을 거의 일주일째 못 주무시고 계시니까요. 당연한 거죠. 그래도 스테미너 포션 몇 개면 바로 깨어나실 겁니다.”
“그게 아무리 체력을 회복시켜 준다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네. 좋지 않죠. 그래도 오늘부터는 푹 쉬실 수 있을 겁니다.”
협회 직원은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시선은 들것에 실려 나가는 박신우에게 고정된 채였다.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탑에 들어가신 분들 중 귀환자가 아닌 헌터들은 강제 추방되시고, 평소보다 더 긴 한 달이라는 공략 시간까지. 사실 저희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해 두고 있었습니다.”
박신우가 그 정도까지 우리를 신경 쓰고 있었던가.
하기사, 기존의 탑 공략의 소요 시간은 기껏해야 며칠정도.
그 몇 배가 넘는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가 저렇게 발을 동동거릴 만도 했다.
“다른 나라들의 뉴스 기사를 보면 가관도 아닙니다. 특히 같은 아스티란 대륙 출신인 아시아 쪽은, 은근슬쩍 국내 랭커들이 모두 죽었을 거라며 좋아하는 분위기고요.”
“랭킹 보드가 바뀌기를 기다리기만 하고 있었을걸요? 특히 중국이요. 앞으로 게이트 처리할 여력도 없을 테니, 자국의 헌터 몇을 파견 보내겠다고도 해 왔어요. 물론 엄청나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요.”
협회 직원들은 하나둘 고충을 내뱉는다.
그동안 심적으로 고생이 많았던 탓에, 마치 속사포 랩과도 같았다.
“아, 저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모두 피곤하시죠? 이쪽에 귀환 사인만 하시고 바로 돌아가시면 될 거예요.”
“물론 더 절차가 있었지만, 아시다시피 책임자가 몸져 누우신 탓에.”
바라던 바였다.
헌터들 역시 화색이 돈 얼굴로 재빨리 펜을 든다.
곧 사인이 끝나고, 직원들이 서류를 들고 비켜섰다.
“드디어 끝이네요. 그동안 다들 고생많으셨어요. 특히 진 헌터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들 다음에 뵈요!”
헌터들은 각자 작별인사를 하며 자리를 빠져나간다.
피곤한 표정과 다르게 발걸음은 경쾌했다.
“아~ 전 빨리 쉬어야겠어요. 너무 피곤하네요…….”
“저런, 어딜 가시죠? 뒷풀이는 하셔야죠, 권지나 헌터.”
“예??길드장님??? 진심이세요??”
“네. 길드 간부 모두요. 다들 이쪽으로 모이세요~”
그 와중에 이번에는 탑이 아닌, 술을 공략하러 가는 자들도 있었다.
‘또 주몽 길드인가.’
주몽이라는 글자 중 주가, 설마 술을 뜻하는 술 주酒 였나.
도살장에 들어가는 가축마냥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그들을 보며, 나 역시 자리를 뜨기 위해 움직였다.
* * *
모두들 단번에 40층 클리어라는 믿지 못할 결과에 떠들어 대었다.
그 소문의 중심지인 랭커들에게 시선이 쏠리는건 당연지사.
하지만 며칠동안 헌터계는 조용했다.
정확히는 랭커들을 포함한 5대 길드겠지만.
“생각보다 다들 입이 무겁군. 분명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예언>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왕님이 마왕이라는 것……응? 뭔가 말이 이상한데. 하여튼 그것에 관련해서는 대부분 모르는 거죠?]”
아렐리아가 과자를 집어먹으며 꺄르르 웃는다.
지금 상황이 재밌게 느껴지는 듯했다.
“[어쩐지, 온갖 뉴스 기사를 봐도 조용 하더라구요. 그냥 탑에 대한 내용뿐이고.]”
“충격들이 너무 컸던 건가.”
탑의 공략자들은 지나치게 잠잠했다.
항상 떠들어 대던 랭커 채널에서는 물론이었다.
한국 헌터 협회에서도 아는 자는 오직 김동식 협회장과 박신우뿐.
심지어 이조차 모두 입다물고 있기에, 공략 내용에 대해 설명하다 내가 직접 알려 준 것이다.
감당 못할 정보라 조심하고 있는 것인가.
확실한 건 내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고 있었다.
“그래도 귀찮게는 굴지 않겠군. 당분간이겠지만.”
“[맞아요. <예언>이 알려지면 언젠간 밝혀질 일이니까요.]”
아렐리아의 말대로 그건 차후의 일.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림자 길드 좀 다녀와야겠군. 아마 늦게 들어올 테니, 기다리지 말고 있어.”
“[하긴, 탑을 나오고도 한 번도 안 가셨죠. 항상 정기적으로 가시더니만.]”
“글쎄. 좀 다른 분위기이던데.”
오늘 아침, 급하게 걸려온 연락 하나.
발신자는 오랜만의 이도윤이었다.
하도 자리를 비운 터라, 환영회 겸 보고받는 자리가 있으리라고 예상은 이미 했다.
하나, 그는 왜 인지 모르게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터진 건가.’
나른하게 하품하는 아렐리아를 뒤로 한 채, 나는 차키를 챙겨 떠났다.
오랜만의 서울 풍경에 만족스러운 것도 잠시.
여전히 거지같은 교통 상황은 쌍욕을 내뱉게 했다.
‘조금만 가면 되는데, 왜 이렇게 막히는-’
그때였다.
뒤에서 무언가 돌진하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피했을 테지만, 여기는 정체된 도로 한복판.
사방이 멈춰 있는 차로 가득했다.
어쩔 수 없이 이어질 작은 충격을 기다렸다.
쿵!!
‘운전 솜씨 꼬라지 하고는…….’
차 밖으로 나가니, 뒷 범퍼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다.
인상을 찌푸리며 사고를 낸 차량을 살펴보았다.
내 차만큼이나 고급스러운, 기업 회장이나 탈 만한 세단이다.
두 대를 합치면 웬만한 서울 집값은 우스울 정도.
그 와중에 차에서 내린 자의 말이 가관이다.
“그동안 한 번만 만나 달라고 그렇게 요청드렸건만. 이렇게 뵙게 되네요.”
대뜸 튀어나온 중국어.
뜻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담긴 내용까지 파악하는 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자식은 사과가 아니라, 인사를 하는 건가.
‘일부러 낸 사고인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자식은 중국의 랭커.
아스티란에서도 몇 번 마주쳤던 놈이다.
물론 그닥 좋은 인연은 아니었다.
특히 저놈에게는 더더욱.
“모임이 있기 전, 한국에 온 김에 따로 보고 싶었습니다. 저희가 진 신세가 많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가까이 온다.
거의 코 앞까지 도달했을 쯤.
갑자기 손등에 짜릿한 느낌이 든다.
평소라면 당연히 무시했을 만한, 미약한 기운이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일.
헤르멘의 마력을 한번 흡수했던 뒤로는, 이상하게 전보다 마나에 예민해졌다.
‘뭐지? 마법?’
딱히 내게 해를 끼치는 느낌은 아니다.
허나 그가 무언가 수를 쓴 건 분명한 일.
마법의 종류를 알기 위해서라도, 잠깐은 지니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가만히 둘 순 없기에, 그의 마나가 뭉쳐진 부분을 다시 내 마나로 감쌌다.
마치 단단한 감옥처럼.
‘이정도면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무용지물과 마찬가지겠지.’
그는 아마 마법이 제대로 먹혀 들었다 생각할 것이다.
마법이 파훼되지도, 소멸하지도 않았으니.
“수리비는 넉넉하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연락 주시죠.”
놈은 그렇게 말하며 명함을 꺼낸다.
화영. 그의 이름이 멋들어진 흘림체로 쓰여 있다.
나는 그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찢어발겼다.
“......하?”
“난 사고 난 차는 두 번 다시 타지 않으니, 똑같은 걸로 다시 준비해. 그리고 연락이라……? ”
나는 그의 멱살을 바로 잡아들었다.
당황한 놈이 크게 몸부림친다.
하지만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건, 그림자 길드를 통해 처리해. 너 따위에게 직접 할애할 시간 없으니.”
감히 누구 보고 연락을 하라 마라 하는건지.
아스티란에서는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던 놈 치고는, 건방진 말이었다.
“쿨럭……!!”
“괜찮으십니까!?”
공중에 들려 있던 놈을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주변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몇 헌터들이 다가온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원래의 목적지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 * *
몇 블럭 떨어지지 않은 그림자 길드에 도착했다.
익숙한 길드원 한명 이 당연하다는 듯 다가온다.
“길드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길드장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아니. 일단은 마법사 연구공간으로 가겠다. 지금 누가 있지?”
“예? 오늘은 신연주 마법사님과…… 진 헌터님 지인이신 길드장님이 있습니다.”
크레아시론까지 있던가.
따로 부르는 수고는 덜었군.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지하에 위치한 공간으로 향했다.
“이걸 이렇게 한다고? 이 부분 수식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마법이 아니라 비둘기 마술 따위를 할 셈이야!?”
“무슨 비둘기를…… 응? 진 헌터님??”
“뭐? 주인…… 아니, 험험.”
보안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연구실.
개인 공간의 문을 열자마자, 신연주가 나를 맞이했다.
그간 크레아시론에게 많이 갈굼 당했는지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크레아시론, 잠깐 이리로.”
나는 크레아시론을 빈 공간으로 데리고 왔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그의 얼굴은 삽시간에 공포로 물든다.
“또 제가 뭔가를 잘못한 겁니까?”
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지.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대뜸 말할 리가 없지 않나.
“......또 무슨 사고 쳤나?”
“그건 아니지만……항상 크게 혼쭐날 때가 많아서.”
그냥 본능처럼 각인된 건가.
어이없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닙니까?”
“하. 일단 이걸 좀 봐라. 마법이 걸린 것 같은데,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겠어서.”
그제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꼼꼼하게 손등을 살피던 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거 흑마법입니다만, 대체 어디서 걸려 오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