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125화
한 번에 5층이라.
그만큼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공략이기는 했다.
나야 시간 차 때문에 얼마 있지 않았다지만, 다른 헌터들은 입장이 달랐다.
짧아야 일주일, 길게는 보름 정도.
그동안 쉬지 못하고 마족과의 전투에 열중했으니 피로가 상당히 쌓였을 터였다.
‘당분간 <검은 탑>은 쳐다만 봐도 헛구역을 하겠군.’
그들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역시 비슷했다.
이제 탑을 나가기만 기다리는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연거푸 등장했다.
[<뒤틀린 아스티란의 과거>가 원상태로 복귀합니다.]
[비틀린 과거 복구 중…… 단, 몇몇 기억들은 약간이나마 현재에도 남게 될 것입니다.]
[마계 서부 공작 아르모데스를 영원히 소멸시켰습니다! 이는 현재의 시간축에 큰 영향을 줄 만한 사건입니다.]
[기존 서부 공작 자리는 공석이 되었습니다.]
역시 이런 식으로 흘러가 버렸나.
그저 공격당해 부상을 당한 정도가 아닌, 완전한 소멸.
아르모데스의 영혼이 예비용으로 하나 더 있는 것도 아닐 테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르모데스가 사라졌으므로, 마계의 모든 공작의 충성을 받게 되었습니다!]
[진 플레이어님이 특별한 요구 조건을 완성하셨습니다!]
[<검은 탑> 31층~40층 (쾌속) 공략이 가능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연달아 공략이라고?
당연히 다음에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저 ‘쾌속'이라는 단어가 걸린다.
홀린 듯 수락 버튼에 손을 얹었다.
잠시 후, 주변 풍경이 신기루처럼 바뀌었다.
처음 역할 부여 퀘스트를 진행하기 전에 있었던, 대기실과 같은 공간이었다.
“어…… 다들 오셨네요?”
한 헌터가 멋쩍은 듯 웃는다.
다들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던가.
하나같이 피곤해 보였지만, 꽤나 희망에 찬 얼굴들이다.
“쾌속이라잖아요. 그것도 40층까지 한번에 클리어할 수 있는 기회라고요.”
“하긴, 당장이라도 쉬고 싶은 기분이지만…… 이건 못 참죠.”
헌터들은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이 등장했을 쯤.
느지막이 나타난 강준하가 나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왔다.
“진 님! 무사하셨군요.”
“당연한 소리를.”
“몸은…… 괜찮으신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그는 보자마자 내 안부를 물어왔다.
작은 안도의 한숨도 함께였다.
너덜너덜한 갑옷이며, 얼핏 봐도 상처 가득한 본인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나저나 다들 고생많으셨어요. 포션이 없으신 분들은 제가 치유해 드릴게요.”
“그래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네요.”
전투 직후 막 끌려온 탓에, 모두 상태가 비슷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헌터들은 바닥에 눕듯이 쓰러진다.
이후는 잠시 동안 휴식 시간이었다.
“후…… 그런데 대체 31층부터는 뭐가 있길래 바로 공략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진 헌터님이 특별한 조건을 완료했다고 봤는데, 그거랑 연관된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 살 만해진 헌터들이 이제 삼삼오오 모여 떠들어댄다.
당연히 이야기의 주제는 31층 공략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 혹시 진 헌터님. 따로 짐작할 만할 것이 있을까요?”
한 헌터가 조심스레 질문해 온다.
모두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었는지, 자연스레 나에게 이목이 집중된다.
“글쎄. 나 역시 딱히 아는 것은 없군.”
내가 시스템도 아니고, 대체 뭘 바라고들 있던 건지.
혹시나 했던 헌터들이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역시 그렇겠죠…….”
‘물론 짐작되는 건 있지만.’
내내 아스티란에 관련된 내용만 나오던 탑의 퀘스트가 갑자기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알게 된 <예언>하며, 마족들의 등장까지.
이야기의 무대가 슬그머니 바뀐 것이다.
마계에서 봤던 정체 모를 검붉은 탑이 떠오르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때는 아직 접근하지 못한다는 메시지가 떴지만, 지금이라면…….’
어차피 시스템 메시지가 친절히 알려 줄 텐데, 굳이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겠지.
나는 우선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었다.
“......뭐야, 다들 있었네.”
그때, 홍현민이 인상을 찡그리며 나타났다.
마지막까지 공략에 참여할지에 대해 고민했던 건가.
당연히 저놈이라면 생각없이 수락 버튼을 눌렀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신중한 성격인가 보군.’
“진 헌터…… 님도…… 있었네.”
주변을 둘러보던 홍현민이 나를 보고 흠칫 놀란다.
지나치게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마지막 도전자가 나타났으니, 잠시 후 <검은 탑>31층 공략이 시작됩니다.]
[31층부터는 퀘스트 진행 중 도중 하차가 가능합니다. 다만, 도전 실패자는 해당 층을 비롯해 연계층에 다시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도중에 나갈 수 있다니, 좋은 규칙이었다.
하지만 전력에 공백이 생기니 만큼, 남은 자들에게는 부담감이 커질 터.
어떻게 보면 탑을 진행하다 죽느니만 못했다.
홀로 살아남느냐, 아니면 몰살이냐.
앞으로 헌터들은 많은 고민에 휩싸이겠지.
“뭔가……31층부터는 느낌이 다르군요.”
다른 헌터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얼굴이 어두워진다.
어느 한 길드가 단체로 배신이라도 했다간 답도 없는 상황이 벌어질 테니.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는 변명을 하겠군.’
[<마계의 침략자> 31층~40층 연계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모두 생각에 잠겨 말없는 가운데.
시스템 메시지가 다음 공략을 말해 준다.
퀘스트 제목은 <마계의 침략자>
역시나 마계 관련 내용이었다.
* * *
[도전자들은 마계의 강자들과 차례로 대결하게 됩니다. 해당 상대를 죽이거나, 전투 의지를 꺾으세요. 승리 조건을 이룬다면 다음 층으로 갈 수 있습니다.]
[<마계의 침략자> 1/10 진행중.(31층~40층)]
어느새 장소가 바뀌었다.
나에게는 익숙한, 그러나 헌터들에게는 처음 보는 장소일 곳.
농도 짙은 마기가 느껴지는 마계였다.
예상한대로 우리가 도착한 곳은 검붉은 돌로 감싸인 탑 안.
공간은 밖에서 봤던 규모에 비해, 생각보다 넓다.
횃불 몇 개가 밝히고 있는 거대한 공동을 헌터들이 샅샅이 살핀다.
하지만 눈에 띌 만한 특이 사항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전투만을 위한 장소라도 되는 듯이, 사방이 막혀 있을 뿐.
“마계라니…… 마족들과 전투를 해야 되나 보군요.”
한 헌터가 쓰게 웃는다.
방금 전에 죽을 뻔한 상황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상급 마족 <단탈리온>이 등장합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난다.
그곳에서는 심기 불편해 보이는 마족 하나가 서 있었다.
“하찮은 인간들이…….”
저건 마족의 전매특허 대사인가.
허구한날 듣던 통에 특별할 것도 없었다.
이쯤 되면 괜찮은 문장 몇 개 골라서 외워라 하고 싶을 정도.
“......강해 보이는군요. 아스티란에 있던 마족보다도 더.”
헌터들은 긴장하며 점점 다가오는 마족을 쳐다본다.
모두가 공격을 준비하려는 그때.
이쪽을 주시하던 단탈리온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마…… 마왕님???”
“어??”
“마왕……?? 아, 맞아! 진 헌터님이 마왕이라고 하셨었…… 던…….”
헌터들의 경악어린 시선이 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족은 내게 황급히 다가왔다.
쿵!!
“영광된 마왕님을 뵙습니다!”
그는 무릎이 부서질 듯 거친 동작으로 내 앞에 꿇어앉는다.
벌벌 떨리는 어깨를 보아하니, 두려운 기색이 가득해 보였다.
“내 얼굴을 아나보군.”
“어찌 그 존안을 모르겠습니까? 4대 공작의 충성을 모두 받는 마왕님을요!”
단탈리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본다.
거짓은 아닌지,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존경심이 엿보였다.
‘이거 그럼 퀘스트가 어떻게 되는 거지.’
마왕인 내가 나보다 약한 마족을 무작정 살해할 수는 없다.
마왕성으로 돌아가 명예의 제전을 시행하지 않는 한.
그게 마계의 약자를 보호하는 마신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클리어 조건은 해당 상대의 죽음 또는 전투 의지를 꺾는 것.
'아, 그런 거였나.’
퀘스트에 왜 ‘쾌속'이라는 단어가 붙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나는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시간 길게 끌지 말고, 항복이나 하지.”
“예?? 아, 설마…… 도전자가 마왕님이십니까??”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한번 쏘아보자, 그제서야 단탈리온은 재빠르게 넙죽 엎드린다.
“제가 감히 마왕님과 전투를 하겠습니까? 여기 열쇠…….”
잘게 떨리는 두 손이 검은빛 열쇠를 바쳐 올린다.
그 열쇠를 잡자, 환한 빛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마계의 침략자> 1/10 클리어! 다음 층으로 향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마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동시에 그의 몸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작은 열쇠를 이리저리 살피는데, 주변이 고요하다.
뒤를 돌아보자 헌터들이 입을 벌리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뭣들 하나?”
“아니……이게 이렇게 클리어 할 수 있는 겁니까?”
김상수가 억울한듯 중얼거린다.
다른 자들도 동조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쾌속…… 맞네요.”
“이게 이렇게 연결되네…….”
나는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는 헌터들을 뒤로한 채, 앞에 보이는 계단으로 향했다.
“역시 진 님이시군요.”
강준하가 빠르게 나를 뒤따라온다.
목소리에는 감탄이 서려 있었다.
“다른 놈들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어지간히도 허탈한지 아직도 멍하게 서있었다.
‘뭐, 알아서 쫓아오겠지.’
계단 끄트머리, 거대한 검은 문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철컹-
묵직한 소음이 울려 퍼진다.
앞에는 1층과 비슷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서야 헌터들이 나를 황급히 뒤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상급 마족 <키마리스>가 등장합니다.]
“어떤 인간……헉!! 마왕님!”
[최상급 마족 <발라크>가 등장합니다.]
[제 2군단장 <아스타로트>가 등장합니다.]
.
.
.
[<마계의 침략자> 9/10 진행중.(31층~40층)]
어느덧 퀘스트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내내 놀라던 헌터들도 익숙해졌는지, 그저 기계처럼 계단만 오를 뿐이었다.
“이게 탑 공략인지, 계단 오르기 미션인지 모르겠네요.”
“맞습니다. 너무 편해서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군요.”
헌터들은 연신 나를 흘깃거린다.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이 섞여 있는 눈빛이었다.
“저희는 나가서 따로 성의 표현을 할 생각이에요. 물론 그림자 길드를 통해서요.”
잠자코 있던 주혜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득에 연연하지 않는 주몽 길드 다웠다.
버스도 이런 고속 버스가 없는데, 양심이 있다면 저 정도는 당연할 터.
그제서야 다른 길드들도 하나둘 선물을 하겠다며 아우성이었다.
‘이도윤이 좋아하겠군.’
가뜩이나 그림자 탑 길드 신설로 돈 나갈 구멍이 많았다.
흐뭇한 심정으로 마지막 문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드디어…… 탑 공략이 끝이네요. 심지어 40층이라니!”
“다 좋지만 빨리 집에 가고 싶네요…….”
휴식이 간절한 헌터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마계 탑의 10층.
최상층답게 천장이 뚫려 있어 마계의 붉은 달이 훤히 보인다.
기분 좋은 시원한 바람과, 은은한 월광.
최후의 상대에 걸맞은 분위기였다.
‘자, 이번에는 누구냐.’
또다시 마기가 덩어리지며 뭉쳐진다.
곧 마족의 형태가 드러났다.
하지만 어딘가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
“마왕님!!!!”
최상층의 상대가 나를 보자마자 달려든다.
목소리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남부 대공 <아렐리아>가 등장합니다.]
마지막 마족은 집에서 군것질이나 하며 있어야할 아렐리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