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3화
제3편 사건이 몰려들다
“흐으음, 컨셉을 잘못 잡았어.”
“뭐가?”
한성의 품에 안긴 하얀이가 물었다. 한쪽에서 누나인 이지현이 차를 끓이다 한성을 바라봤다.
“학교에서, 어떻게 입학은 할 수 있게 됐는데, 컨셉을 잘 못 정했단 말이지.”
그런 게 있다.
학교나 어떤 모임에 나가게 되면, 자기가 보여준 컨셉을 유지해야 할 것 같은 느낌.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모두 이상하게 볼 것 같은 느낌 말이다.
물론, 그것과는 다르다.
그런 느낌이야 한 번 눈 딱 감고 바꾸면 된다.
그런데 이번엔 심각하다.
마력이 거의 없는 F등급. 그리고 검으로 블랙키리윰을 찢어발기고 몬스터를 쓸어 담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자잘한 몬스터랑 싸웠더니 신난 나머지 비룡을 죽이고 바실리스크를 썰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서 나와보니 2만 점이 넘어있었다.
명백한 실수다.
아무리 마력이 없어서 떨어질 위기였다고 해도 블랙키리윰에서 압도적으로 1등을 해버렸으니, 적당히 했어도 된다. 그런데 신이 그렇게 나 가지고…….
“걱정도 많다.”
홍차를 내려온 이지현이 한성에게 말했다.
“이런 거 감이 잘 안 잡혀서 그래, 마력은 없는데 그 정도의 몬스터를 잡았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왜 말이 안 돼. 이능이 그만큼 좋은 거라면 가능하지.”
“검과 이능이라.”
그게 가장 놓은 방법이긴 하다.
옆에서 하얀이가 마력으로 검 하나를 만들더니, 빙글빙글 돌렸다. 심심해서 간단하게 만든 건데 웬만한 [보물] 등급 무기보다 좋다.
이하얀은 [위대한 신격]에 올랐으며 [태초의 신격]을 걷고 있는 중의 수준이다.
- 딩동!
“치킨이다! 치킨!”
하얀이는 붕 날아서 현관으로 갔다.
요즘은 능력자가 하도 많은 시대이기도 해서 배달원이 놀라는 일은…….
“끄아아아아!”
“악!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한성과 이지현이 급하게 달려나갔더니, 그냥 혼자 놀라서 비명과 함께 주저앉은 것뿐이었다. 하얀이가 허공에 떠서 큼지막하고 화려한 검 하나를 빙빙 돌리고 있으니 그럴 만하지.
배달원은 허공에 치킨이 떠 있는 걸 보곤 후다닥 도망갔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자.”
하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치킨이 안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컸겠지.
“치킨이나 먹자.”
판도라에 있을 때, 한성이 그렇게 안 먹이긴 했다. 하긴, 그때는 이것저것 항상 바빴지.
요즘은 배달 음식에 빠져서 이지현이 자기도 같이 살찌겠다고 난리다. 한 번씩 부모님이 오셔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데, 꽤 단란한 게 보기 좋았다.
한성은 최근에 계속 판도라에 있었고, 이번에야 서울에 꽤 오래 머무는 거라 부모님이 굉장히 좋아하신다만…….
“엄마는?”
“아빠랑 놀러 갔지.”
한성과 함께하는 걸 좋아한 것도 잠깐이었다.
요즘엔 말도 없이 해외여행을 가시고 전국 팔도를 돌고 이번엔 크루저 여행을 간다네.
“잘됐네.”
그동안 고생한 게 얼마인가.
그것도 이한성 때문에.
“잘 적응하셔서 다행이야.”
“그러게.”
처음엔 얼마나 어색해했는지.
한성이 마당이 있는, 말이 마당이지 정문에서 현관까지 차를 타고 5분 정도 가야 하는 집을 산다고 보러 갔을 때는 기겁을 하셨다.
그렇게 몇 군데를 다녔지만, 너무 불편하고 부담된다는 어머니의 말.
한성은 그게 좀 너무한가 싶어서 한남동에 120억 정도 되는 작은 집. 지하 2층에 위로 3층 정도 되는 저택을 보러 가기도 했다.
하도 큰 걸 보고 다녀서 그런지, 그 정도면 괜찮아 보였는지 바로 계약했다.
물론, 그곳은 부모님의 집이었다.
이곳은 강남에 있는 83층 펜트하우스. 그래도 그렇게 크지는 않다. 아래는 호텔이라 이것저것 서비스도 좋고 보안도 철저하다.
이제 돈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처음엔 판도라의 돈을 이곳으로 어떻게 옮겨야 할까 고민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두 세계는 적극적으로 교류했고 한성의 돈을 만드는 것은 제현 그룹에서 알아서 해 줬다.
“누나는 이번에 어떻게 됐어? 일 새로 구한다면서.”
“일보다 그냥 공부하는 게 낫지 싶어.”
이 상황에 일을 해봤자, 시간 낭비긴 하다.
차라리 더 배우는 게 낫지.
하지만 한성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게 낫지. 누나도 이능이나 좀 배우는 게 어때?”
“그게 공부니?”
“그것도 공부지. 솔직히 혼자 두는 것도 걱정되고. 자기 몸을 지킬 힘은 있어야 하잖아.”
“……자기 몸 지킬 정도가 어느 정도 수준인데?”
이지현은 한성의 말에 눈을 흘기며 물었다.
도대체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못해도 위대한 신격에는 닿아야지, 그래야 어디 가서 눈먼 마법에 안 죽지.”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 정도면 지구 70억 인구는 다 자기 몸 지킬 힘도 없겠다.”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이지현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하지만 한성은 진심이었다.
특히,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강했으면 좋겠다. 언제나 한성이 곁에서 지켜줄 순 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런 소중한 사람이 한두 명이어야지.
“공부도 좋은데, 훈련도 조금씩 했으면 좋겠어. 마법이든 이능이든 검이든.”
“……그래, 생각해볼게.”
이지현은 계속 장난식으로 말하다 진지해지는 한성의 표정과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하다.
솔직히 상상이 안 간다.
한성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그 세계를 구한 것인지.
가끔 강남에 몬스터가 등장하고 외곽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생길 때는 지옥 같았다. 처음 균열이 생기고 수백만의 사람이 죽었을 때는 더욱더.
무서웠고 괴로웠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동생이 사라졌고 부모님이 동생을 위해 절실하게 살아남았으니 겨우 삶을 붙잡았다.
그런데 동생은.
이한성이라는 놈은.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야. 나도 뭐, 좀 해보지.”
“오! 좋아. 뭐 하게? 하고 싶은 거 있어? 마법은 좋긴 하지만, 공부 시간이 너무 필요하고 검이야 뭐 나쁘지 않지만…… 누나 몸치잖아? 그럼 이능이 나을 수도 있겠다.”
“……예예.”
이지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걱정했다.
저런 놈인데.
그래도 자기 몸 지킬 정도는 배워둬야 할 듯했다.
그리고 맞는 말이기도 했다.
이지현은 몸치였으니까.
“마법도 공부니까. 마법도 하면서 이능도 조금씩 해볼까?”
이지현은 솔직히 만만히 본 거였다.
이한성이. 그러니까 자기 동생이 이것저것 다 잘하고 엄청나게 강해져 있으니까. 동생이 하는데 자기도 못 할까 싶은 거였다.
“괜찮지. 그것도 나쁘지 않아. 크게 어려운 건 없으니까.”
문제는 이한성도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비정상인이었다는 것.
“그래? 그럼 한 번 해볼게.”
이지현은 얼마 가지 못해서 그 말을 두고두고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 * *
결국, 한성이 잡은 컨셉은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며 [마력]이 아닌 [영력]이라는 이능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오, 그러니까 마력은 없지만, 검술은 짱짱맨이다?”
안진희.
이 녀석은 어떻게 된 건지, 첫 등교. 등교라고 하는 게 맞자? 하여튼 학교를 처음 가는 날까지 마주쳤다.
이 정도면 일부러 기다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검술은 솔직히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을 자신이 있지.”
“대박 자신감? 그 정도면 자만심 아님?”
솔직히 자신감이다.
한성이 [태초로 향하는 길]에서 가장 처음 마스터했던 게 검술이었으니까.
“아, 오빠. 혹시 기숙사 들어가요?”
“…….”
한성은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싶은 눈빛으로 진희를 쳐다봤다. 진희도 본인이 말하고도 민망했는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런 반응이 더 이상해. 그냥 욕을 해.”
“제가 언제 욕을 했어요!”
“넌 항상 눈빛으로 나한테 욕했어.”
“진짜 말로 한 번 해줘요!?”
“……미안.”
“아저씨, 기숙사 안 와요?”
“안 갈 건데.”
“……그럴 거면 왜 그런 반응이었어요. 그냥 안 간다고 하면 되지. 아저씨!”
“근데 그건 왜?”
“검술 잘한다니까. 대련이라도 자주 할까 했죠. 하긴, 블랙키리윰 시험이나 몬스터 잡는 시험을 보니까 제가 한참 모자라겠지만.”
“많이 모자를 걸?”
“……사람이 겸손이라는 게 없네요. 원래 성격이 그래요?”
“이것도 많이 겸손한 건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들면서 학교에 도착한 둘은 각자 수업을 위해 강의실로…….
“왜 따라와요!?”
뭐가 그렇게 뿔이 났는지 말투가 날카롭다.
“나도 검 쓰잖아.”
한성은 진희 등에 달린 거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진희도 민망했는지 고개를 쓱 돌려 가 버린다.
‘재밌네.’
친구를 만들러 온 학교다.
판도라에선 영웅 아카데미가 있지만, 이곳엔 아직 대학에 과가 신설된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영웅 육성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곳은 대학뿐이다.
첫 수업엔 역시 간단한 설명과 인사였다.
신기했던 건 ‘강사’가 판도라의 사람이었다는 거다.
판도라의 중국인이었고 그쪽 아카데미 강사로 일하다가 인류 최후의 재앙이 시작되었을 때, 중국 정부가 쪼개지면서 한국으로 들어왔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다 판도라와 이곳의 교류가 시작되고 어떻게 흘러들어왔겠지.
“아저씨. 여기 아저씨만큼 나이 많은 사람이 많아!”
“……그게 신기하냐?”
“당연하지! 저렇게 나이 많은 낯선 사람이 내 동기가 된다니. 이상하잖아!”
“…….”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아까는 기분이 안 좋았다가 지금은 뭔가 기분이 좋은 것인지 계속 주변을 둘러보면서 실실 웃는다.
그러다 한성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묘한 살기.
아주 흐릿한 살기였다. 살기를 충분히 숨길 줄 아는 자의 살기인 것이다. 그 살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살폈다.
‘전체……?’
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이게 운명인 것인가.
분명 [운]이 만렙이다. 악운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 ‘운’이 위기를 주기도 했지만, 결국 하나의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도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여기서도 이렇게 사건을 몰고 다닌다.
‘코난이나 남도일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한성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강사와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몰렸다.
하지만.
콰아아앙!
왼쪽 창들이 산산 조각나면서 보랏빛 촉수가 강의실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 들이닥쳤다. 그리고 반대 앞과 뒤쪽 문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괴수가 ‘크르릉’하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한성은 중얼거렸다.
“친구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
참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때, 진희가 한성의 앞을 막았다.
“오빠, 조심해요. 마력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 거에요.”
“응? 저것들 본 적 있어?”
“네, 저것들 이능이 먹히지 않는 괴수거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마력을 씹어먹는 몬스터는 본 적 있어도 ‘이능’ 그 자체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 듣는다. 염력이 안 통하거나 환상이나 중력 등. 어느 하나가 안 통하는 것은 있어도 말이다.
“뒤로 물러요.”
어디서 봤는지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괴수들이 학생들을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