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개를 쳐드는 신격들. >
- [히든 퀘스트 : ‘밤부’를 찾는 동해의 해룡을 잠재워라!]
-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되어야 할 대나무가 [밤부]로 돌아왔습니다. 한반도의 수호신, 해룡은 밤부를 찾아갈 때까지 서울을 주시할 겁니다.
- 당신은 ‘밤부’를 찾아 해룡의 분노를 잠재워야 합니다.
- 성공 시 : 해룡의 도움 1회권 + @
- 실패 시 : 지속적인 시민의 죽음, 한국 국력의 약화, 해룡의 도움 시간 축소.
퀘스트가 발동되었다.
하늘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천둥이 곳곳에서 번쩍인다. 마치 하늘이 분노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 분노는 서울 중앙을 가리킨다는 듯 도심 하늘엔 거대한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삐져나온 것은 기다란 수염이었다.
한 가닥만으로 서울을 반토막 낼 수 있을 것만 같이 웅대한 그것. 이어서 등장한 것은 길게 솟아난 송곳니, 그리고 그것에 물려있는 은빛 여의주(如意珠).
하지만 등장은 거기까지였다.
아직 이 세계가 해룡(海龍)의 존재력을 받아낼 수 없다.
해룡도 그것을 알고, 이곳이 한국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더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만파식적의 그 [밤부]를 회수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무슨 일이지······?”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체육관에서 한도석의 수업을 받던 후보생 모두 밖으로 뛰쳐나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형체가 어찌나 크던지, 서울 전역에서 선명히 보일 정도였고 이웃 나라에서조차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 대단한 건, 그 형체의 ‘격’이었다.
신라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를 지키기 위해 동해에 잠들었던 문무왕. 그는 이 작은 나라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거대해지는 한국의 힘 덕에 오롯한 ‘신격’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어설픈 압박(壓迫)이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 존재한다.
그러니 너희는 조아린다.
자연스러운 위엄이자 왕(王)의 기세였다.
그 증거로, 한도석은 물론이고 모든 후보생은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 그들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그 모든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디아. 따라와.”
한성은 달랐다. 온전한 [전설]에 다다랐기에 그 완전한 제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속이 진탕되고 머리가 띵하니 아찔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아직 ‘인간’인 존재가 ‘신격’을 마주했을 때의 어쩔 수 없는 종족적 본능이었으니까.
한성은 나디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도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시선이 둘에게 꽂혔지만, 한성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나디아는 한성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룡(海龍)이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한성의 전 회차에서도 단 두 번뿐이었다.
‘그때도 나름 다 운이 좋았지.’
한 번은 이처럼 [밤부]가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였는데, 그때는 한국 정부에서 발로 뛰어 밤부를 얻어 해룡에게 바치며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때도 큰 피해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비행기를 몰던 이들. 위험한 곳에서 일하거나 레이드를 하던 사람들까지. 순간적인 압박에 사고로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성은 다행인 것이었다.
다른 튜버는 밤부를 빼돌려 중국으로 도망쳤다가 한국의 서울과 중국의 땅 일부 자체가 사라졌었으니까. 세계에 개입한 해룡은 그 ‘반동’에 소멸해 버렸다.
그것은 또 하나의 재앙이었다.
해룡은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 중 하나였으니까. 그는 다시 살아나 게임을 이어갔지만, 엄청난 리스크를 안아야 했고 결국 끝을 보지 못했었다.
‘어우, 그건 절대로 안 되지.’
그런 루트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두 번째는 세계 대전이 일어나 한국이 멸망 직전까지 갔을 때였다.
난장판이었던 그때. 한국은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수많은 나라의 연합은 쉽게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나라에서 가장 강하다는 한성과 메인 캐릭터들은 신격의 강림을 막기 위해서 검은 땅으로 간 후였으니까.
그때 해룡은 다국적 연합의 영웅과 신격들을 단숨에 물리치고 한 줌의 재로 화해 버렸다.
‘밤부 에피소드만 아니면 수호신 그 자체다.’
애초에 시스템이 플레이어를 위해 안배해 둔 설정 중 하나다······. 물론, 밤부 에피소드를 잘 마쳤을 때지만 말이다.
“저쪽이야.”
나디아는 스마트 워치로 아버지의 위치를 파악해가며 길을 안내했다.
나디아는 한성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왜 아버지를 찾아가는 거냐며 묻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다 왔어.”
나디아가 도착한 곳은 국제 워프 게이트 인근이었다. 그쪽에서도 이쪽을 파악한 것인지, 우람한 체구의 백인 남성이 이쪽으로 뛰어 왔다.
“나디아!”
“아빠!”
창신은 작은 나디아를 껴안았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깨닫고 한성과 나디아를 바라봤다.
“······혹시 네가 말한 그 이상하게 설렌······?”
“꺄악! 아니야! 무슨 말이야!”
퍽.
나디아는 팔꿈치로 창신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분명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창신은 허허 웃으며 훈련을 많이 했다며 칭찬했다.
“그보다, 창신님.”
“반갑습니다. 이한성 후보생.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예상외로 창신은 한성을 좋게 보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분명 한성은 트라우마를 건드렸고 도발하기까지 했으니까.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극복했기 때문일까.
“초면이지만, 급한 용무 때문에 왔습니다.”
“무엇을······?”
“잠깐, 나 좀 놓고!”
나디아가 창신의 품에서 바둥거리다 창 뒤쪽으로 팔의 근육과 신경 몇 군데를 강하게 치더니 창신의 근육이 뒤틀리며 나디아가 빠져나왔다.
“······.”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가족 같았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저기 위에 보이시죠?”
“아주 잘.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는 한성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했다. 나이가 한성의 세 배는 많으면서 사회적. 아니, 국제적 지위까지 있는 사람이 그러기 힘들 텐데 말이다.
통역이라고 해도, 존칭이 있어야 존댓말이 나오게 된다.
“한국의 수호신. 동해의 해룡입니다.”
“들어본 적 있습니다.”
창신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등 뒤에 메여진 검은 대나무 창을 슬쩍 바라봤다.
“설마······?”
“네, 그것 때문입니다.”
“그럴 리가. 내가 이걸 가진 지 10년이 지났는데······?”
“한국에 들어왔기 때문이죠.”
동해의 해룡은 온전한 ‘신격’을 이뤘지만, 그 힘은 한반도에 국한된다.
그럼 창신이 다시 러시아로 도망치면 어떻겠냐고? 아무리 힘에 제한이 있다고 하지만, 러시아의 도시 하나 없앨 정도의 힘은 있다.
그 전에 워프 게이트가 작동도 안 하겠지만 말이다.
한성은 나디아에게 창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네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지금 시작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그것도 해룡에 의해 압도적으로 상승한 난이도의 시나리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의 시나리오가 합쳐진 그 시나리오가 지금 발동해도 괜찮은 걸까.
검은 땅, 아마존, 북극, 남극, 남아메리카, 시베리아 등등. 모든 오지에 잠들어 있는 재앙급 괴수와 신격이 깨어나는 게 맞는 것인가.
그 전에.
막고 싶다면 막을 수 있는 것인가.
한성은 하늘을 바라봤다.
해룡은 흔들림 없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움직일까? 그 전에 직접 가져오는 게 좋을 거다. 어떻게 움직일지 한 번 보겠다.
그렇게 청명한 눈동자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신, 밤부를 넘겨주십시오.”
창신도 하늘을 바라봤다.
그도 알 거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격’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화신체를 빌려 이 땅에 도달한 ‘신격’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정말 신이라도 내려온 것처럼.
그 압도적인 기세와 위엄은 창, 신(神)이라는 이명 또한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도 [전설]의 격에 든 십선(十善) 중 하나다.
수십 년 동안 세계 최고로 군림해 왔고. 단 한 순간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움직인 적이 없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살아남았으며 업적을 얻어 격을 얻었다.
그런 사람이다.
당연히 자존심이나 자존감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양산박의 [황혼의 용살자]에게 패배했으며 지금은 진정한 ‘신격’을 마주하고 있다.
그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밤부만 있다면 우리는 안전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는 나디아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렵지 않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딸이라는 소중한 존재는 죽음이라는 것을 두렵게 만든다.
“제가 어떻게든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그는 한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어떤 정보 열람 이능도 넘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 믿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성은 그에게 밤부를 넘겨받았다.
검은 대나무로 투박하게 만들어진 창. 2m 정도 되는 대나무의 양쪽을 비스듬하게 자른 게 전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무기는 하나의 [전설]이 된 것이다.
한성은 그 창을 손에 쥔 순간 막대한 힘이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블랙 키리윰을 사용한다고, 한성이 수많은 마법을 때려 넣는다고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신화’ 속에서 탄생한 ‘전설’.
[밤부]가 바로 그것이다.
한성은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무식하게 가지고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한성은 위를 바라보곤 잠시 기다렸다.
“······왜 보고만 있는······?”
“······잠시.”
한성은 궁금해하는 창신을 제지했다.
아직은 기다린다. 때를 기다린다.
해룡이 화가 나지 않으면서, 네 번째 퀘스트가 발동할 수 있는 시간을 번다.
그때.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 [ 네 번째 메인 퀘스트 : 대혁명의 시대! ]
- 본격적인 ‘신격’의 등장이 전 세계에 알려집니다. 정확히 100년 전, 지구에는 ‘포자’가 떨어지며 다른 세계와의 동조가 시작되었습니다.
- 전 세계에 ‘신격’과 계약하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납니다. 선(善)과 악(惡)의 충돌이 가속화되며 세계 전쟁의 전조가 곳곳에서 생겨납니다.
- ‘신격’의 존재력은 ‘세계’의 균형을 망가뜨리기 시작합니다. ‘세계’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연결된 ‘다른 세계’와의 연결을 강화합니다.
- 몬스터 게이트가 생기는 전조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런 문구들이 한성의 눈앞에 연속으로 떠올랐다.
원래는 ‘몇몇 신격이 등장하며 대혁명의 시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라는 정도의 네 번째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지금은, 여섯 번째 시나리오까지 동시에 열렸다.
한성은 눈을 질끔 감았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어차피 열릴 시나리오였다. 그럴 거라면 한성이 주도할 수 있는 선에서 열리는 게 낫다. 그리고 해룡과 거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 히든 퀘스트에 ‘+ @’가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한성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 * *
성시연은 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항상 검었던 하늘이다. [피의 시간]이 올 때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피의 시간이 온 것만 같은 감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옆에 있던 헤일렌도, 세르비체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기묘한 감각.
사방으로는 블랙 키리윰을 토대로 올라가는 방벽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워낙 자재가 좋고 고급 인력이 사용되기에 그 진행은 아주 빨랐다.
성시연은 그것만으로 31번 구역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이제 웬만한 귀족 마족이 오더라도. 전처럼 릴리스의 작은 신격이 화신체를 타고 오더라도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홱!
성시연은 막대한 존재감에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그곳은 한국의 방향이었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
손끝이 부르르 떨린다. 이렇게 먼 곳에서. 지구 반대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거리에 있는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기세가 느껴진단 말인가.
그때였다.
검은 땅에서 그와 비슷한 기세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구우우웅.
구우우웅.
구우우웅.
성시연의 몸은 오들오들 떨렸다. 그것은 옆에 있던 헤일렌과 세르비체도 마찬가지였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이 검은 땅에······ 아니, 전 세계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 고개를 쳐드는 신격들.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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