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행운은 만렙이다-73화 (73/200)

<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

한성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너, 산장지기가 아니구나.”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어떻게 알았지? 그가 딱히 알 수 있는 틈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온 거다.

‘들켰다면?’

제페토는 그리 강하진 않다. 하지만 한성이 이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양산박의 땅이지 않은가.

“무슨 말이라니, 전 산장지기는 너처럼 행동하지 않아.”

역시 연기는 아닌 모양인가.

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이렇게 남 따라 하는 것도 몸이 베베 꼬였다. 못해 먹을 짓이라는 거다.

아예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놈이랑 지낸 게 벌써 수십 년이야. 모를 리가 있나. 그건 그렇고 정말 누구신가?”

다행히 제페토는 한성을 적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미래에서 왔습니다.”

뭐, 앞뒤 상황은 다르지만 전 회차는 미래나 다름없지 않은가. 연기하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낫다.

“······.”

제페토는 장난하지 말라는 듯이 한성을 보고만 있었다.

“진짠데. 순영진 할아버지.”

“······!”

“그거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죠?”

“······.”

한성은 그럴 게 아니라 증거를 보여주기로 했다.

블랙 키리윰 1kg 덩어리를 작업대에 올려놓고 마법진을 구성했다. 8개의 마법진이 작업대를 감싸자 블랙 키리윰은 ‘액체’로 변한다.

한성은 그 액체를 [대단위 광학 주포]에 들이부었다.

“자, 잠깐! 그러면······.”

“두고 보십시오.”

“뭘 하는 건가! 제대로 공정을 거치지 않으면 주포 자체가 망가진······ 응?”

위이이잉.

[대단위 광학 주포]는 블랙 키리윰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발사 연료도 블랙 키리윰이다. 물론, 설계만 그랬고 아직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은 없다.

실험 발사로 몇 번.

그것도 몇 개월의 공정 과정을 거친 블랙 키리윰 연료를 사용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한성은 눈앞에서 겨우 몇 분의 공정 과정으로 [대단위 광학 주포]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자, 여기서 문제. 제가 천재일까요? 미래에서 왔을까요. 순 할배.”

“······너 진짜구나.”

이곳은 ‘신격’, ‘이능’, ‘마법’, ‘몬스터’가 존재하는 세상이다. 몇 명이 미래에서 왔고 누가 과거에서 왔다고 해도 그렇게 이상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거다.

“딱 세 번만 쓸게요.”

“······블랙 키리윰은?”

“정기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겠죠?”

“당연하지. 그 마법진은?”

“그것도 제공하겠습니다. 대신, 그건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거래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다른 놈들이 속았다는 걸 아는 것도 일단은 제페토가 덮어주기로 한 거다. 일단 한성은 이곳에서 ‘전 산장지기’의 역할이라는 것.

연기하기 귀찮지만, 제페토가 인증한다면 지금처럼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산장지기가 아니더라도 제페토의 인증이면 산장지기인 거다.

이곳에서는 제페토가 정신적 지주니까.

제페토는 한성을 믿었다. 아니, 한성을 믿는다기 보다는 이름을 알려줬다는 것이 컸다.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나 ‘신뢰’와는 다른 큰 의미가 있었으니까.

한성은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주포부터 발사했다.

*  *  *

하늘에서 기다란 줄기가 두 번 더 뿜어지자 입구 주변의 ‘백’들은 대부분 타버렸고 일행은 명계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은 성시연.

- 명계로 진입합니다.

- 수많은 [죽음의 신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이곳은 명계입니다.

- 신격의 연결이 끊깁니다.

- ‘죽음’과 ‘어둠’이 당신에게 반응합니다.

- 특수 능력 [명계화]가 개화를 시작합니다!

성시연은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주변에 무언가가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헤일렌에게도 벌어지고 있었다.

- 익숙한 공간에 들어 왔습니다.

- ‘죽음’의 기운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 오래전 봉인되었던 기억이 일부 돌아옵니다.

[헤일렌(영혼)]

설명 : 대륙과 대륙이 부딪히던 고대 시대를 풍미하던 ‘소환’술사. 그녀는 ■■■였으며 ■■■의 ‘제왕’이기도 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대륙을 떠돌다 ‘이계’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 ‘세계’를 ■■ 누군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장도 : 43%

현재 등급 : 상급

- 그대는 소환 술사였으며 오랜 시간 ■■를 찾고 있습니다.

- 봉인된 권능이 해제됩니다.

- [죽음의 지배자(SS)]가 개화합니다.

- 죽음에 가장 가까운 자 ‘백’이 당신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둘은 변화를 목격한 안톤은 참을성 있게 옆을 지켰다. 성시연이 눈을 뜨자 사방에서 달려들던 ‘백’들이 타올랐으며 헤일렌이 눈을 뜨자 주변에 있던 ‘백’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성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무언가 생겼습니다.”

헤일렌도 놀란 듯 보였다.

그리고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기억에 두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내, 그 정보는 끊겼고 통증은 사라졌다. 하지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은 헤일렌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러는 도중 한성이 도착했다.

“······이게 뭔 일이야.”

한성은 [정보 열람]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성시연이 가진 [명계화]의 발동 조건을 알고 있었으니 놀랄 건 없었다. 하지만 헤일렌의 변화는 예상 밖이었다.

그때, 한성은 알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운]이 좋은 한성에게 ‘명계화’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작전을 변경한다.”

이제 ‘흑청’을 구하는 건 일도 아니다. ‘백’들의 방해가 없으니 ‘케로베로스’와 몇몇 문지기만 공략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린 명계를 닫지 않는다.”

한성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온 거다. 바로 [신화] 등급의 업적을 세우고 마계의 영역을 대량으로 쓸어버릴 기회.

물론, 그 전에 숙련도 작업을 해야 할 필요성은 있었다.

*  *  *

한줄기 빛살.

수많은 괴수 떼 속에 홀로 난입한 이가 있었다. 다른 길드에서는 좌우로 비스듬히 방어진을 형성해 괴수들을 밀어붙이는 상황이다.

그런데 홀로 괴수 무리를 헤집는 자.

그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꼬리를 달고 괴수 떼를 뒤집어 놨다. 주먹을 한 번 휘두르면 괴수 머리 하나가 터져나가며 그가 지나간 자리엔 수십의 고깃덩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홀로 모든 걸 막을 수 없었다.

길쭉하게 자라난 게이트에선 공중 괴수가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저것들은 마법이나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영웅 혹은 용병만 상대할 수 있었다.

저것들은 이들의 공격망을 뚫고 도심으로 난입할 것이다.

하지만.

우우웅!

게이트 주변, 그리고 길드 방어선 안쪽의 모든 공간이 강하게 울렸다. 그리곤, 하늘을 유유히 날던 괴수가 우수수 떨어졌다.

무리 안에 괴수를 죽이던 그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뭉개버리고 있었다.

진훈과 한별의 콤보였다.

그들은 이미 C등급의 능력치로 수많은 이능을 획득했으며 S등급으로 다가가는 희미한 격을 얻은 후였다. 일반적인 영웅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명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론 그것을 모두 막을 순 없었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수는 점점 강해졌고 특정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콰과과과.

그 먹구름은 금빛 번개를 만들어냈다. 그것들은 먹구름 사이를 오가며 힘을 비축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쾅. 콰과과과광!

수십 줄기의 번개가 괴수를 향해 떨어졌다. 그것은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방어선을 구성하는 ‘인간’을 절묘하게 피하며 괴수들만 정확하게 요격했기 때문이다.

수백의 괴수가 검게 타버렸다.

얜 샤를이었다. 하늘에서 파지직 거리는 갑옷과 긴 창을 지닌 상태였다.

그 번개에 당했지만 죽지 않은 강한 괴수는 극도로 화가 난 상태로 가장 가까운 인간인 진훈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다른 괴수를 상대하느라 그 괴수를 보지 못했다.

그때.

핏. 피비비빅.

어디선가 날아온 붉은 눈의 여인이 그 괴수를 토막 내 버렸다.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 괴수, 다음 괴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괴수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도살자]가 되어버린 안혜림.

그게 시작이었다.

3m에 달하는 오러를 뿜어대며 절도있게 괴수들을 베는 세르게이. 기다란 창의 양쪽으로 2m의 오러를 뿜으며 화풀이를 하듯 괴수를 찢어발기는 나디아.

하늘에서 수십 개의 마법을 뿌리며 내려오는 길성현까지.

그들은 한 장소에 모였다.

한성이 알려준 던전을 모두 클리어하면서 희미한 격을 얻어, 웬만한 용병보다 강해진 이들이었다.

진훈은 5m짜리 괴수의 머리를 뒤로 꺾어 버리곤, 그 괴수 밟고 서서 지평선을 바라봤다. 동쪽에서부터 남쪽으로. 그곳엔 수십 개의 게이트가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멸망의 전조인가.”

항상 밝은 진훈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후보생에 불과한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였다.

전국. 아니, 전 세계엔 게이트가 솟아나고 있었고 영웅과 용병을 모두 끌어모아도 감당하기 힘들었기에 후보생인 이들까지 방어 작전에 합류해야 했다.

옆으로 다가온 세르게이가 괴수 하나를 베곤 입을 열었다.

“어쩔 거야?”

“검은 땅?”

“응, 그곳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이곳을 지키는데 힘을 보태야 하나.”

“······모르겠다.”

이곳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게이트는 쉽게 닫을 수가 없다. 정말 강력한 ‘격’이 필요했으며 그 정도로 강한 이들은 몇 없다.

“검은 땅도 지금 난리라는데.”

“아, 봤어. 며칠 전 이상한 구멍이 나서······ ‘명계’라고 했던가?”

“응. 근데······ 그 구멍 왠지 익숙하지 않나?”

“구멍? 난 처음 보는데.”

“아, 그래? 아니면 말고.”

진훈은 뉴스에서 봤던 그 ‘어둠’이 계속 생각났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분명 처음 보는 건데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그리고 가슴 한쪽이 아리다.

무언가 쿡쿡 찌르는 듯했고, 기이한 꿈을 꾸기도 한다. 악몽이랄까. 그곳에서 봤던 ‘백’이라 칭해지는 시커먼 유령 같은 걸······ 아주 어렸을 때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진훈은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게이트에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전에 본 적이 있다.

성시연이 무언가에 씌워졌을 때.

작지만, 강력했던 ‘신격’의 존재감.

바로 그거였다.

“다들 뒤로 물러서!”

진훈의 말이 뒤로 전달되기도 전, 강력한 폭발이 그들을 덮쳤다.

*  *  *

“뭐야?”

한성은 순간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명계에 들어온 지 벌써 5일째다.

한성은 안톤을 옆에 두고 세르비체를 위한 ‘비약’ 제조에 힘썼고 성시연은 [명계화]와 각종 어둠 관련 이능의 숙련도를 잔뜩 올렸으며 헤일렌도 [죽음의 지배자]를 A등급까지 올릴 수 있었다.

둘의 상성은 대단했다.

‘백’은 명계가 아닌 지상에서 ‘육체’를 따로 구하지 않는다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 말은 성시연이 펼치는 [명계화]가 있다면 현실에서 얼마든지 ‘백’을 부릴 수 있다는 이야기.

헤일렌은 벌써 ‘소환수’로 거둬들인 수백의 ‘백’이 있었다.

“왜 그래, 한성?”

성시연이 옆을 다가왔다.

무척이나 지친 표정이었지만,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겨우 5일 전과는 전혀 다른 ‘격’이 몸속 가득 느껴졌기 때문이다.

성시연이 지닌 ‘업적’은 죽음, 어둠과 큰 관련이 있었기에 더욱 큰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무언가 심장을 찌르는······.”

혹시나 한성과 관계된 사람 중에 누군가 다친 것일까? 밖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긴급 퀘스트도 한성 주변에 있어야 발동된다.

먼 곳에서 누군가 죽는 것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나 잠시 다녀와야겠어.”

한성은 마음먹었다.

성시연과 헤일렌은 숙련도 작업을 더 해야 한다. 한성이 명계를 닫지 않으며 ‘백’의 유출을 제지하면서까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때까지는 둘의 숙련도를 더 올려야 한다.

“······세르비체는 어차피 안정을 더 취해야 합니다. 비약도 숙성 시간이 필요하고요.”

안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안톤은 그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 되겠어?”

“혼자는 아닙니다. 서울엔 친구들이 있거든요.”

하얀이도 데려갈 거다.

한성은 셋을 바라봤다.

헤일렌이 있는 한 이곳에서는 문제가 없다. 더 깊이 들어가면 위험할 수 있지만, 셋은 그런 문제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한성은 그렇게 말하곤 명계를 빠져나왔다. 검은 공간을 빠져나와 며칠 만에 맡는 누린내 나는 검은 땅의 바람이 폐를 적셨을 때였다.

뚝.

한성은 그 자리에 멈췄다.

그의 눈앞에 아주 익숙한. 그러면서도 이곳에서는 만나선 안 될 얼굴이 보였다.

“······.”

“너 뭐야.”

날카롭게 찢어진 눈과 또렷한 이목구비. 검게 탄 피부에 곳곳에 보이는 문신들. 그리고 검은 가죽 장비들이 눈에 띄었다.

엘 포른.

정연의 한구본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 정연 전체가 추적하고 있으며 [황혼의 늑대]의 길드장이지만, 현재는 검은 땅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 추측되는 사람.

그리고 한구본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강자.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걸까.

한성은 손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 끝

ⓒ [동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