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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238화 (239/251)

238화. 포 더 킹(1)

마탑이 자리한 대평야의 중심.

우웅! 우우우웅!

그곳에서 나지막한 공명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받아, 받으라고!”

지로시가 사뭇 다급한 얼굴로 통신용 수정구를 매만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쾅! 쾅!’ 하는 폭음이 재차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 도마뱀 새끼는 대체 뭘 하는데 여태 반응이 없는 거야!?”

마치 1시간과도 같은 5분이 흘렀을 뿐이다.

다만, 이런 지로시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적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제아무리 앤그리라도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테니까.

“병신 같은 새끼.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이 개똥만도 못한 흑 파충류 자식!”

광룡(狂龍).

다른 이름은, 블랙 드래곤 라크제.

이제 믿을 건 그밖에 없었다.

오직 그만이 저 성가신 레드 드래곤을 때려눕히고, 이그드라실을 파괴할 수 있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

직후,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은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라크제. 이 개좆같은 도룡뇽 새끼야. 좀 받으라고오오오오오오오오!”

콰직!

그 순간, 통신용 수정구에 쩌저적 실금이 갔다.

지로시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동하여 힘 조절을 못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젠장… 앤그리, 미안하다. 이러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일단 자리를 피한 뒤에 뒷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동료가 위기에 처했는데, 이대로 도망갈 생각이냐?”

“……!”

순간, 지로시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곧 그의 고개가 홱, 하고 들어 올려졌다.

어느새 지면 위로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

기다려 마지않던 사내는, 이미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라, 라크제…?”

“어쩐지 귀가 간지럽다 했더니, 참 상스럽게도 내 욕을 잘하더군.”

“아, 아니, 그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지로시를 보며, 새로이 나타난 사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흑요석을 닮은 흑안(黑眼)에 허리까지 기른 흑발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미남자였다.

그런 그의 손에, 불길한 기운을 물씬 자아내는 한 폭의 대도(大刀)가 쥐어져 있었다.

“뭐, 그 부분은 됐어. 그보다, 레드 일족을 베는 건 처음인데 말이지.”

이윽고 사내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줄기차게 힘의 파장이 느껴지는 호수의 중심부.

“…너도 기대되느냐?”

마치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듯, 제 검을 보며 속삭인 그가 미소 지었다.

번-쩍!

그리고 곧, 사내는 한줄기 흑선이 되어 호수를 향해 쏘아져 갔다.

“거기서 잘 지켜보고 있도록. 같은 드래곤이라도, 존재의 ‘격’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줄 터이니.”

***

리비아의 북문 인근.

페르의 지시에 따라 일단의 무리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중심에, 살아남은 마탑주들이 있었다.

연합군을 이동시킬 게이트를 설치하기로 했지만, 일반적인 미스릴 건축물은 필요치 않았다.

드래곤 하트 조각.

그 사기적인 아이템이라면, 일회성 프레임 정도는 충분히 대신할 수 있었으니까.

특히나, 각 마탑주들은 워프에 필요한 ‘마법진’을 담당했다.

거기에 쓰일 복잡한 수식은 오직 이들만이 계산해 낼 수 있었으니까.

허튼 수작은 불가능하다.

만일에 있을 불상사에 대비해, 세타는 마탑주 하나하나와 일일이 ‘마나의 맹세’를 맺고 갔으니까.

실로 철두철미하기 그지없는 녀석이었다.

“이봐, 초월의 마탑주.”

“뭐냐, 삐죽 머리.”

“게이트를 완성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

“…….”

전(前) 뇌전의 마탑주의 돌발 질문이었다.

맹세 때문이라도 일단은 명을 따르고 있으나 뒷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

“글쎄… 그 부분은 우리 새로운 마탑주 님으로부터 별도의 지시를 받아봐야겠는데?”

“뭔 씹… 언제부터 네가 그딴 핏덩이의 명을 따랐다고? 그리고, 통합 마탑주는 지랄…!”

“말조심해라, 엑스토나 제우스.”

“……!”

직후, 엑스토나 제우스가 입을 다물었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농도 짙은 마나는 별론으로 하고서라도.

두 팔을 구속한 ‘마력 속박구’는 반항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젠장. 나 안 해! 그냥 지금 죽여라! 어차피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뒈지는 건 매한가지일 텐데 게이트는 니미…!”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만, 감당할 수 있겠냐?”

“감당은 뭔 씹 놈의 감당?”

“나와는 달리, 우리 통합 마탑주는 ‘흑마법’에도 나름 조예가 깊어서. 혹시 또 모르잖아? 네 육신을 이용해, 전설의 ‘리치’라도 만들어 낼지.”

“……!”

장난기 가득한 페르의 말에 모두가 하던 행동을 멈췄다.

거기에는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던 반(反) 제국 성향의 마탑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 리치?”

“페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세타에게 우호적인 탑주들의 반응이 이러할진대,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방금 그 말, 제정신으로 지껄인 소리인가요, 초월의 마탑주?”

“끌끌끌. 리치라… 꽤나 흥미가 동하기는 하다만, 내 스스로가 피 실험체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는데 말이지.”

“이 미친 새끼야! 뭐, 리치? 나름 마탑주씩이나 해 먹었던 놈이, 감히 흑마법 따위를 운운해!?”

허나, 페르는 도리어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러는 너네도 마왕의 끄나풀과 어울렸잖아? 칠악 말이야.”

“……!”

“설마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할 생각은 아니지?”

“…….”

순식간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페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마저도 통합 마탑주가 싫다고 하면 나는 그 명을 따를 거야. 대장은 내가 아니라, 그 녀석… 아니, 우리 통합 마탑주니까.”

“…….”

마탑주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생각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이었으니.

세타 쿤 이그니스는 그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아무튼 탑주가 돌아오면 이 얘긴 다시 해보지.”

“…….”

“걱정하지 마. 실컷 일 시켜놓고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자자, 빨리빨리 움직이자고. 나도 옛 동료들이 한낱 언데드가 되는 광경은 추호도 보고 싶지 않으니까.”

***

한편, 대륙 동부의 강국 게르힘 왕국(王國).

이미 국토의 절반을 빼앗겼음에도, 이곳 연회장에서는 때 아닌 성대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어제, 이들은 ‘목숨’과 ‘명예’, 둘 모두를 손에 넣었으니까.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순간, 연회장 한가운데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게르힘의 현 국왕, 아놀드 3세였다.

그런 그의 주변에 남은 각국의 왕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남부 트루크 야만국의 왕, 와카.

남동부 노르망의 국왕, 트린다미어.

마지막으로, 옛 아르바할의 후예를 자처하는 신성국 메데이아의 교황까지.

“진즉 이랬어야 하거늘… 이제야 이리 마음이 편합니다.”

아놀드 3세의 말에, 나머지 왕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이들은 이제 한배를 탔다.

같은 날, 한마음으로 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까.

그는 상벌이 확실한 인물이었고,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폐하께서 각국의 자치권을 모두 인정해주기로 하셨다지요?”

“예. 심지어 속국과는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의 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기존의 왕들은 모두 ‘대공’의 지위를 보존하고 후계 세습권 또한 허하셨으니까요.”

“그분의 배포는 실로 감탄스럽소. 원래 우리 트루크는 강자를 숭상해 왔으니. 그런 의미에서, 폐하는 뭇 대륙인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오.”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는 전쟁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생명을 살려야겠지요. 그것이야말로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차례로, 각 나라를 대표하는 왕들이 제 의견을 내뱉었다.

고위급 인사인 최측근들도 주변에서 맞장구만 쳐대기 바빴다.

“…….”

그리고, 나는 천장의 한쪽 구석에 숨어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니 연합군이 밀리지 않을 턱이 없지.”

마주한 현실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존재감을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내 은신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겠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나름 각국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이었다.

이런 수준이라면, 아마 진심으로 제국군과 맞붙었더라도 금세 패했을 테지.

애당초 ‘게르힘이 고작 일주일 만에 영토의 절반을 빼앗겼다’라는 정보 자체가 거짓이었던 거다.

현실은, 제국과 연합군이 작정하고 짜고 만든 체스판이었으니까.

“…안 되겠다. 얘들은 단순히 줘 패는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겠어.”

하여, 나는 다시금 생각을 고쳐먹었다.

전시에는 힘이 곧 법이었으니.

지금부터 이 막강한 힘을 이용하여 오직 나만의 법전(法典)을 만들 생각이었다.

이름하여, 대(大) 이그니스 법이다.

휘릭!

상념을 마친 내가 이내 천장에서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예의 각국의 왕들이 모인, 연회장의 중심으로.

“누, 누구냐!?”

“……!”

네 명의 왕이 대번에 대경하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처처처처처처처처척!

곧 무수한 기사들이 물밀듯이 사방을 에워쌌다.

내게는 익숙한 광경이었고, 그래서 긴장 따위는 쥐똥만큼도 되지 않았다.

깽판을 치기로 했으면 확실히.

첫 마디는, 뇌리에 강렬하게 박힐 수 있도록.

“자존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연합의 버러지들아.”

“뭣…!?”

“니들이 그러고도 일국의 왕이냐?”

당장에 기사들의 안색이 샛노래졌다.

그와 반대로, 네 왕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신이시여, 어찌 이런 삿되기 그지없는 종자를…!”

“놈! 네놈은 누구냐? 누구이기에 곧 죽을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게냐!?”

“아앙!?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 새끼가 뭐라고? 지금 당장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먹어주랴?”

연이어 왕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유일하게 게르힘의 국왕, 아놀드 3세만큼은 한껏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연신 제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하면서.

“자, 잠깐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 말입니까?”

내게는 퍽이나 의외인 물음이었다.

머릿속을 되짚어 봐도 게르힘의 국왕과 만났던 기억은 없었으니까.

“제 이름은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합니다만?”

“세, 세타 쿤 이그니스…?”

더듬더듬 중얼거리던 아놀드 3세의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다른 이들조차 흠칫 몸을 굳혔으니까.

곧 연회장 내부에 경악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 대륙 제일마(第一魔)!?”

“…대륙 제일마…?”

얼떨결에 따라 중얼거리던 내가 픽, 실소를 터뜨렸다.

대륙 제일마.

문자 그대로, ‘대륙에서 제일가는 마법사’라는 꽤나 그럴듯한 칭호였다.

“나, 그새 어마어마한 거물이 되었나 본데?”

“모, 모두 물러서라! 대륙제일마다! 8써클 대 마법사 세타 쿤 이그니스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직후, 나는 빠르게 써클을 휘돌렸다.

밀폐된 공간.

밀집한 전력.

그리고 인질로서의 가치가 차고 넘치는 네 기의 킹(King)까지.

“이런 기회를 놓치면, 당장 마법사는 때려치워야지.”

콰콰콰콰콰콰콰콰!

이윽고, 내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체크 메이트(Check mat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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