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악의 소멸(2)
리비아의 왕성(王城).
스실라 씨와 실비아는 그나마 멀쩡한 1층 로비에 있었다.
해방군은 바로 그곳에 부상자들을 위한 임시 병상을 마련했으니까.
“에, 에이스 님…?”
마침 스실라 씨는 입구 근처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막 스승님을 업고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세, 세상에…….”
그녀가 빠르게 다가선다.
어느새 저 멀리 있던 실비아도 종종걸음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럴수록 내 눈빛은 깊게 침체되어 갔다.
“무리겠지요?”
“…….”
스실라 씨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대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스승님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이리 눕히세요.”
“감사합니다.”
한쪽 구석에 빠르게 병상 하나가 만들어졌다.
곧장 스승님을 그곳에 누인 내가 몸을 일으켰다.
언젠가부터, 로비 내 사람들의 시선이 대부분 이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하면, 저는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오, 오자마자 어디를 간다는 거야?”
곧장 실비아가 불안한 낯빛으로 물어왔다.
아마 참모로서 염려스러울 테지.
제국군이 언제 또 이곳을 급습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허나, 의미 없는 걱정이다.
지금부터 내가 할 행동이 바로 그들과 관련된 것이었으니까.
“복수는 해야지.”
“복수…?”
“황제가 스승님의 다리를 베었다면, 나도 똑같이 되돌려줄 생각이야.”
“……!”
직후, 실비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는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미, 미쳤어? 선발대도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어. 보고받기로, 제국군은 피해조차 극히 경미하다고 해. 그런 상황에서 또 혼자 적진으로 쳐들어가겠다고?”
“누가 혼자 쳐들어가겠대?”
“뭐…?”
“이대로 나머지 연합군들부터 설득하러 가야지. 이곳에 있는 예비대가 아닌, 진짜 ‘본대’ 말이야.”
“그 말은…?”
“듣자 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지금은 게르힘의 왕성에 대부분 모여 있다고 들었는데…….”
실비아가 내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그 돼지들이 말을 들을 것 같아? 리비아가 이 지경이 되도록 움직이지 않던 이들이야.”
“이번에는 들을걸. 혹여나 안 듣는다면…….”
직후, 내 입가로 서늘한 미소가 번져갔다.
“이번에는 줘패서라도 모조리 끌고 올 예정이니까.”
“……!”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들을 일별하며, 이윽고 내가 몸을 돌렸다.
“아무튼, 한 가지 일만 처리하고 바로 출발할 거니까 뒤는 부탁 좀 하자.”
***
열두 마탑의 중심에 자리한 거대 호수.
“후욱, 후욱, 후욱…….”
뜨거운 열기가 사방을 잠식한다.
호수는 마치 바다라도 되는 양, 연신 성난 파도를 일으켰다.
물론 인위적인 재해(災害)였다.
두 존재에게서 뿜어지는 투기가, 그것을 가능토록 만들었으니까.
“…놀랍군. 그래 봐야 육신은 인간일 진데,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일 줄이야.”
“…….”
“계속할 생각이라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여전히 호수 한가운데 오연하게 떠 있는 적발 사내는, 처음과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깔끔하게 묶어 놓았던 머리칼은 사방으로 나풀거렸고.
민소매나 다름없던 상의는 걸레짝이 되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상태였다.
그마저도, 피부 여기저기에는 긁힌 상처가 선명했으니.
“진짜 사탄이라도 현현했다면, 도리어 내 쪽이 위험했겠어.”
“……!”
찰나, 앤그리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역시 저자는…
“…지로시.”
“뭐야. 대체 저 괴물은 뭔데?”
“지금 당장 광룡(狂龍)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뭐? 광룡이라면, 그 미친 드래곤?”
“그래. 연락 수단이라면 대공에게 이미 받은 것으로 아는데.”
“아니, 아니, 잠깐만. 너무 이르지 않나? 그 도마뱀 새끼, 알다시피 어마어마한 미치광이잖아. 대공도 진짜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연락은 자제하라고 했는데?”
“그 진짜 특별한 상황이 바로 지금이다.”
“……!”
그제야 지로시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 말하는 앤그리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하게 굳어 있었으니까.
“무, 물론 앤그리 너와 싸우는 모습만 보면 저놈도 충분히 괴물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이건 좀…….”
“지금 나는 전력을 다하고 있다. 내 짐작이지만, 그에 비해 상대는 아직 제 능력의 절반도 끌어내지 않았어.”
“저, 절반?”
“그래. 저 사내는…….”
순간, 앤그리가 입을 다물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다시금 폭발적인 투기가 전방에서 쇄도해 왔기에.
“둘이서 계집애들마냥 뭘 속닥대고 있는 거야? 니네 사귀냐?”
쉭!
그저 가벼운 주먹질 한 방이었다.
허공에 잽을 날리듯, 단순하기 그지없는 동작.
허나, 결과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뻐어어어어어어어어엉!
“…큭!”
엑스자로 교차한 앤그리의 팔 위를, 미증유의 힘이 거칠게 두들겼다.
공간을 격하고 날아드는 마나.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일 정도의 어마어마한 파괴력이었다.
“…드래곤.”
“……!”
사방에서 불어닥치는 풍압에 절로 인상을 구기던 지로시가 곧 눈을 크게 떴다.
“드래곤…? 설마…….”
“설마가 아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은 드래곤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그럼 저게 레드 드래곤이라는 뜻이야?”
“확실하다. 즉, 여기서 이그드라실을 취하지 못한다면…….”
순간, 말끝을 흐리던 앤그리가 두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그와 동시에, 내면의 모든 마기가 폭발적으로 들끓어 올랐다.
“칠악(七惡)이라는 이름은, 오늘로 끝이다.”
***
왕성을 나선 나는 곧장 리비아의 성도 북문(北門)까지 벗어났다.
원래는 피난민들의 임시 대피소였던 장소.
내가 찾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이곳으로 옮겨뒀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왔냐?”
가장 먼저 페르가 나를 반겼다.
가볍게 목례한 내가 정면을 바라봤다.
네 남녀는 전신이 포박된 채 그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새끼들… 언제까지 이리 묶어 둘 생각이냐!?”
성정이 거칠기로 유명한 전(前) 뇌전의 마탑주, 엑스토나 제우스가 목청을 높였다.
“협상을 할 생각이라면, 기본적인 예우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마탑주 체면이 있는데 말이에요.”
“끌끌끌. 정확히는 전대 마탑주겠지. 당대에 마탑주는 이제 단 한 명뿐이라고들 하니까.”
“…나는 그딴 얘기를 인정한 기억이 조금도 없습니다만?”
“네 인정 여부가 무에 중요하겠느냐? 저기 방금 도착하신 ‘통합 마탑주’ 님께서 그리 정하신 것을. 세상은 철저한 힘의 논리이니, 그 힘이 없다면 따라야지.”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은 다른 법이니까요. 간다르 테이들러. 당신은 평생 그렇게 비굴하게 사세요. 자존심도 없이, 지금처럼 여기저기 빌붙고 다니면서요.”
“끌끌끌… 이 얼음 할망구가 오래 살더니 입도 너덜한 걸레가 되었구먼.”
“뭐라구요?”
전 빙결의 마탑주 에르사 아인하르트.
그리고, 전 조합의 마탑주 간다르 테이들러까지.
마지막으로…
“진짜 유치해서 못 듣고 있겠네. 원수를 눈앞에 두고 병신같이 지들끼리 싸우고 있어.”
“뭣…!? 레이나 더글린.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 좀 닥쳐 봐요. 나도 할 말은 해야겠으니까.”
그리 말한 전 소환의 마탑주, 레이나 더글린이 사납게 한쪽을 노려봤다.
직후, 가만히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제노스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 개 같은 애송이 새끼들아.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이리 끌고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마음대로는 안 될 거야. 내 자존심이 니네 생각보다 상당하거든?”
“풋.”
“…방금 웃은 새끼 누구냐?”
대번에 레이나 더글린의 도끼눈이 내 쪽을 향했다.
어이가 없네.
아무래도 저 여자는 스스로의 처지를 아직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다만, 의외로 저 여자가 가장 다루기 쉬울 터였다.
내가 전해 듣기로는…
“레이나 더글린. 죽기 전에 드래곤 하트를 다뤄보고 싶지 않나요?”
“…뭐?”
거짓말처럼, 그녀의 얼굴이 멍청하게 변했다.
강한 자존심만큼이나 허영심이 많은 인물.
레이나 더글린은 그런 유형의 여인이었다.
우웅! 우우우우웅!
그녀의 반응과는 별개로, 순간적으로 뒤쪽 공간에서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장거리 텔레포트를 운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곧 그곳에서 일단의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외팔인 전투의 마탑주 로마르니.
정신의 마탑주 저스틴 브레이너.
파괴의 마탑주 잭 디스페로우는 물론이고, 이들의 이동을 도운 화이트 드래곤 이리니까지.
기존에 자리해 있던 페르와 에반젤린까지 포함하면, 살아남은 전 열두 마탑주가 모두 모인 셈이었다.
물론 스승님의 치료를 맡고 있는 스실라 씨는 제외하고.
“…대체 이건 무슨 수작질이죠?”
에르사 아인하르트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제력을 동원한, 통합 마탑주로서의 첫 소집령.
지금 이 순간, 나는 잠시간 ‘폭군’이 되려 한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알고 있겠지?”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흐응~”
묘한 콧소리를 낸 이리나가 이내 한 나무 위로 올라 걸터앉았다.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 무슨 꿍꿍이인지는 나도 궁금하니까.”
“딱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겁니다.”
말을 마친 내가 이내 몸을 돌렸다.
이미 죽은 염화와 바람의 마탑주까지 제외하면, 도합 아홉 명.
“…지금부터 이곳에 ‘대규모 워프 게이트’를 설치할 계획입니다.”
“……!”
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장에 아홉 쌍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워, 워프 게이트?”
“연합군의 남은 본대는 약 20만. 기존의 10만을 포함해서, 도합 30만의 병력이 이용할 수 있는 역사상 유래없는 게이트를 만들 겁니다.”
“미, 미친. 뭔 말 같지도 않은 씹 소리야?”
쿠구구구구구구구구!
나는 곧바로 기세를 뿜어냈다.
“…컥! 컥컥컥!”
사방에서 조여오는 미증유의 압박감에 욕지거리를 내뱉던 사내가 제 목을 움켜쥐었다.
“당신에게 질문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엑스토나 제우스.”
“…….”
“특히 네 분은, 그나마 남은 마나 써클을 모두 쥐어짜야 할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곧장 죽여 버릴 테니까요.”
“자, 잠깐만. 내가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
로마르니였다.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온도 차이 무엇?”
페르에게 속닥대는 에반젤린의 목소리는 한 귀로 흘렸다.
잠시 헛기침을 한 로마르니가 이내 말을 잇는다.
“거리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만한 머릿수라면 상당한 마나석이 들 텐데. 그 부분은 어떻게 충당할 생각인지 듣고 싶다. 평균적으로 국가 간 이동은, 사람 하나를 이동시키는 데 최하급 마나석 하나는 소모되는데…….”
우우우웅!
나는 대답 대신 아공간을 활짝 열었다.
그곳에서 그간 모아두었던 마나석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세, 세상에…….”
최소 상급부터 그 귀하다는 최상급 마나석까지.
어림잡아도 수천 개는 되는 양이었다.
가히 아공간 자체를 ‘마나석 광산’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팔자에 없는 도둑질까지 하면서 그간 모아둔 마나석들입니다.”
“과, 과연 이 정도 양이라면…….”
“설명이 되었을까요?”
“아니. 문제는 한 가지 더 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짧은 거리가 아닌 국가 간 이동이라면, 프레임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게이트를 이루는 구조물 말이다. 보통 마탑의 주도하에, 수년에 걸쳐 미스릴을 쏟아부어야 게이트 하나를 겨우 만들어 내지. 그래서 이용료가 비싼 것이기도 하고…….”
이 부분에서 나는 레이나 더글린 쪽을 돌아봤다.
“뭐, 뭐야? 왜 나를 쳐다보는 건데?”
“아까 말했죠? ‘드래곤 하트’를 다룰 기회를 주겠다고.”
“……!”
그제야 곁의 로마르니가 손뼉을 쳤다.
“과연…….”
“하니, 탑주님들은 마나 운용에만 신경 써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찰나, 말끝을 흐리던 내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네 마탑주님들은 써클뿐만 아니라 생기(生氣)까지 쥐어짜세요. 죽을힘을 다해서 말이에요.”
“뭣!? 우리더러 지금 자살이라도 하라는 말이냐?”
“자살이라니요.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
직후, 내 전신에서 살기가 번져갔다.
“이대로 제 손에 죽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