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47화 (147/251)

147화. 폐하를 구출하라(2)

“…응?”

순간,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름이 브룩 백작이라고 했던가?

생긴 건 꼭 해골을 연상케 할 정도로 비쩍 골은 그의 품 안에서,

풀썩!

지금 막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돌멩이?”

“……!”

브룩 백작이 ‘흡’ 눈을 치켜떴다.

아직 수십 배 중력이 유지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필사적으로 돌멩이를 다시 움켜쥐려 했다.

“이, 이런…….”

시전자가 나였기에, 내 주변의 중력만큼은 정상이었다.

하여,

저벅, 저벅, 저벅.

나는 거침없이 그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곤 예의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건 평범한 돌멩이가 아니라, 마석이었다.

그것도 최소 수백 년?

아니, 적어도 천 년은 묵은.

“이리 다오. 그건 내 것이다!”

“…사람 심리라는 게 있죠.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시면, 오히려 더 흥미가 동한다는 말이죠?”

“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큭… 일단은 이 중력부터 원래대로 되돌려 놓거라. 이 이상은…….”

브룩 백작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마나를 운용하여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지만, 그조차도 이제 한계인 듯했다.

뭐, 나도 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한 가지.

“그럼 이거 저한테 주실래요?”

“뭣…! 네놈이… 감히 귀족의 물건을… 강탈하려는…….”

“일종의 전리품이죠. 승자의 당연한 권리 아닌가요? 이리 기습까지 당한 마당에요.”

“나는 그저… 얘기나… 하려고…….”

“헹. 무려 6써클 대마법사님께서, 고작 대화나 나누시려고 이런 으슥한 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고요? 지나가는 개가 웃겠네.”

“오… 해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저한테 무슨 물건이 있는지 들어는 보셨죠?”

직후, 나는 품 안에서 둥그런 물체를 슬쩍 내밀어 보였다.

“…기억… 저장구…!”

브룩 백작이 이를 앙 다물었다.

아직 내 신분은 평민이다.

그런 내 앞에 무릎 꿇은 귀족.

비록 불가항력이라고는 하나, 이런 ‘흑역사’를 만들고 싶은 높으신 분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물론 지금은 써먹지도 못하는 물건이지만.’

속으로 절로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기억 저장구는 이미 이전의 기록들로 용량이 꽉 찬 상태였으니까.

눈앞의 광경은 기록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만,

상대는 그걸 모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려선. 끝까지 안 내어주시겠다면 그냥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고요. 여기 이 기억 저장구를 이용해서.”

“빌어… 먹을…!”

“그럼, 잘 놀다 갑니다~ 중력은 앞으로 딱 30초 뒤에 풀어드릴게요.”

“네… 놈은… 악마…다.”

이어지는 저주에 가까운 사내의 절규에,

“꺼~억.”

나는 능청스레 헛트림으로 응수해 줄 뿐이었다.

***

한편, 레이브 성 4층의 집무실.

세타가 떠나갔음에도 그곳은 여전히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화두는 단연 세타가 던져 놓고 간 하나의 수정구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그 골든 버드 상단의 관계자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거지?”

“어. 레베카라고, 무려 황금의 주인이 애지중지하는 외동딸이야. 그 아이와 직통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실비아의 물음에, 유리나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내 착각인가? 고생은 다른 사람이 했는데, 왜 유리나 네가 유세를 부리는 것 같지?”

“그야, 나도 골든 버드 상단을 구하는 데 한몫 거들었으니까?”

실제로 공은 세타가 다 세웠고, 유리나는 피해 다니는 데 급급했지만.

기실 이건 녀석을 위한 일이었다.

저 위의 노인들은 이 엄청난 공을 또 평민이니 어쩌니 하며 깎아내리려 할 게 뻔했으니까.

허나,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리나와 루나가 전면에 나선다면 얘기는 또 달랐다.

물론 피치 못하게 공은 나눠 먹어야겠지만.

‘어디까지나 메인은 세타가 될 테니까. 짜식, 너는 나한테 항상 고마워해야 한다니깐.’

속으로 중얼거린 유리나가 이내 수정구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내가 연락하는 게 맞겠지?”

“…그게 좋겠네.”

유리나가 이내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잠시 신호처럼 ‘우웅! 우우웅!’ 하고 공명음을 흘려대던 그것은 곧,

화아악!

한 여인의 얼굴을 투영시켰다.

“레베카?”

- 유리나! 역시 무사히 도착했구나!

“고럼. 내가 누군데. 머지않은 미래에 대 불꽃의 마법사가 되실 유리나 벤 아리에나 님 아니겠냐.”

- 물론 유리나도 대단하지만, 세타 님이 함께 계시면 어디 군대가 무섭겠어?

“…크흠.”

실비아 앞에서 폼 좀 재보려던 유리나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터뜨렸다.

마물의 숲을 무사히 통과한 이후, 나이가 같았던 둘은 친구가 되기로 한 상황이었다.

쯧, 근데 친구라는 게 눈치도 없이…

- 유리나가 목적지에 잘 도착했고, 이렇게 나한테 연락까지 했다는 말은… 역시 군수품 때문이지?

“엥?”

순간 유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리스와 실비아, 루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나?”

- 응? 그야… 세타 님이 나한테 미리 언질을 줬으니까?

“…걔는 뭐, 지 혼자서 일을 다 해놓고 있는다냐? 우린 뭐 하라고?”

- 어머, 그만큼 든든한 우군이 또 어디 있니? 배부른 소리 하지 마.

“고건 인정하지만…….”

- 아무튼, 그 부분은 내가 확실하게 도와줄게. 근데 피치 못하게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아.

“왜?”

- 제국에 맞서 이쪽도 본격적으로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거든. 군수품이라면 이쪽도 빠듯해서. 그래도 잉여 자원이 제법 있으니까, 정리되는 대로 부족하지 않게 보내줄게. 늦어도 한 달?

“아하. 그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지.”

그제야 일행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 근데, 나도 한 가지 부탁을 좀 해도 될까?

“엉? 부탁?”

- 특별한 건 아니고, 그쪽도 급한 불을 어느 정도 끄고 나면, 리비아로 사람 하나만 보내줬음 해서.

“아 뭐야, 괜히 쫄았잖아.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 정도 힘은 있지. 한 명이 아니라, 한 백 명 정도는 거뜬히…….”

순간, 실비아가 유리나의 말을 중간에서 막았다.

“…제발 입방정 좀 그만 떨어. 아직 그 한 명이 누구인지는 얘기하지도 않았잖아.”

“에이, 그래 봐야 한 명인데 누구를 보내주라 한들…….”

찰나, 말을 잇던 유리나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문득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 벌써 눈치챘나 보네?

“자,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끼리 상의를 좀…….”

- 상의는 얼마든지 해도 되는데,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군수품 얘기도 없던 걸로 할까 싶어.

“……!”

- 미안. 급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속,

- 세타 님은 우리 왕국에도 반드시 필요하거든. 테라에서 가지지 않겠다면, 여기 리비아에서 영입할 생각이야. 수천 금에 고위 작위까지 약속해서라도.

레베카가 사뭇 밝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마쳤다.

***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국경 지대에 도착했다.

이미 소식을 접한 것일까?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병사들은 이전과 판이하게 다른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시선이 마주칠 때면 가볍게 목례를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 병사들을 지나쳐 나는 곧장 스승님부터 찾았다.

“…거참, 고작 며칠 사이에 무지막지한 일들을 겪었구먼.”

내 기나긴 얘기들을 모두 들은 두 스승님이 동시에 고개를 흔드셨다.

“그래서, 이제는 테라의 수도로 갈 거라고?”

“정확히는 왕궁(王宮)이죠.”

“설마 내 제자의 입에서 한 나라의 왕을 구하겠다는 미친 소리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장 저도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뭘.”

“에이스. 이제 내가 뭐라고 말할 것 같아?”

세논 스승님의 물음에, 때 아닌 날벼락을 맞은 에이스 스승님이 움찔 몸을 떨었다.

“아니지?”

“역시 척하면 척이네.”

“아니, 대장. 난 지금 환자야. 저 미친 행동에 나더러 동참하라는 거야, 지금?”

“그럼, 제자 혼자 사지로 뛰어드는 것을 스승이란 놈이 두고만 보고 있으랴?”

“그럼 대장이 직접 가든가!”

“내가 가면 뒤늦게 합류하는 우리 연합원들은? 네가 나 대신 다 안심시키고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고?”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이대로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하여, 나는 곧장 두 스승님의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제 일행이라면 이미 정해뒀습니다.”

“넌 가만히 있어. 스승으로서, 이 이상의 위험한 행동은 엄금한다.”

“그, 일단 한번 보기나 하실래요?”

“…일행이 이곳에 있다는 거냐?”

“넵. 잠시만요.”

직후 고개를 뒤쪽으로 돌린 나는,

“야, 바이커!”

마나를 담아 있는 힘껏 고함쳤다.

내가 국경 지대에 완전히 들어섰을 무렵부터 줄곧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이 있었다.

물론 바이커다.

허나 녀석은 일정 거리를 두고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녀석이 내 목소리에 반응한다.

“일로 와 봐.”

“……!”

이런 상황은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일까?

혼자 안절부절못하던 녀석이, 갑작스레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금세 이쪽으로 다가섰다.

“크, 크흠. 형님에게 얘기는 모두 들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녀석은 아직 내가 어색한 모양이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가 불편하냐?”

“그, 그건 아니다만…….”

“그럼 뭐, 또 내기라도 할래? 네가 나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하지 않는다로.”

내 말에, 바이커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 이제 내기는 절대로 안 한다. 너랑은.”

“왜? 자신감 하면 바이커 론 인버스였는데, 그 자신감이 다 어디로 가신 걸까나?”

“시, 시끄럽다! 안 한다면 안 하는 거다. 안 그래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쪽팔려 죽겠는데…….”

“하긴, 나라면 구정물에 얼굴 처박고 진즉 죽었지.”

“…남의 흑역사 얘기는 이제 그만하지.”

직후, 우리 둘의 시선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그 순간,

“풋.”

“…훗.”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둘은 실소를 터뜨렸다.

곧이어,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다. 정말로 미안했다, 세타.”

바이커 녀석은 내게 고개까지 숙여댔다.

“됐어. 너도 사정이 있었잖냐? 친구끼리 사과는 무슨.”

“친구니까 더더욱 확실하게 사과해야지. 그리고…….”

“……?”

“고맙다. 내 형님을 도와줘서.”

“…….”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던 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괜찮겠냐? 피치 못하게 내가 네 아버지 체면을 조금… 아니지. 아주 많이 깎아 먹었는데.”

“이미 잃을 체면도 없으신 분이다.”

“그건 맞지.”

순순히 동의한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지? 대 국왕 폐하 구출 작전.”

“…그래.”

“그리 대놓고 심각한 얼굴을 할 필요는 없고. 세디스는 혼자서도 충분히 도망칠 능력이 있는 녀석이지만, 넌 아니니까. 혹시나 위급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먼저 발을 빼도 좋아.”

“…나도 일인분쯤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나보다 약하잖냐.”

“재수 없는 놈.”

“큭큭큭. 아무튼,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해 가며 내가 너를 데려가려는 이유는 단 하나야.”

“……?”

“남들이 괴물이라 부르는 나도, 은신 능력이 뛰어난 세디스도 가지지 못한 것을 네가 가지고 있으니까.”

바이커의 눈이 대번에 반짝였다.

“그게 뭐지?”

“생각해 봐. 설령 폐하를 구해내더라도, 근본도 명확하지 않은 우리 둘을 쉽사리 믿으려고 하시겠냐? 적어도 명문가의 자제 정도는 되어야 신뢰를 얻을 수 있겠지. 그게 아는 얼굴이면 더더욱 좋고.”

“아하.”

순간, 바이커가 언젠가 본 적 있는 재수 없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그런 일이라면 내가 제격이지.”

더 나아가 미묘하게 어깨마저 치솟아 있었다.

이 극심한 온도 차이에 한편으로는 어이도 없었지만, 어느새 내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비로소 내가 알던 아카데미 시절의 바이커로 돌아온 듯했으니까.

“아주 꼴갑들을 떨고 있네. 육시랄 것들.”

다만, 세논 스승님은 그런 우리가 무척이나 탐탁지 않으신 모양이지만.

***

다음날 깊은 자정.

나는 지금에서야 미뤄왔던 일을 시도하기로 했다.

내면에 잠들어 있는 힘.

칠죄종 중 하나인 색욕의 이능을 일깨우기로 한 거다.

능력의 사용 방법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건은 두 가지.

반드시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장소여야 하며.

최소 수십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생기(生氣)가 필요했다.

전자는 내가 유년을 보낸 아카데미가 그곳에 있었기에 당연히 충족.

후자는, 자칫 미친 짓 같지만 내 써클에 있는 웅혼한 마나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생기와 마나는 그 궤가 같았으니까.

마족은 애당초 마나를 품을 수 없는 존재였으니,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적어도 나는 아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은 세상 누구보다 순수한, 불순도 ‘제로’의 마나니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정보대로라면, 지금 궁에는 필수 병력 외에는 아무도 없을 거야. 카이클 공작조차 레이브령 인근에 있으니까.”

수도 인근의 야트막한 산 위.

그곳에서 테라의 자랑인 백궁(白宮)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 참, 진짜 실화라고? 이게 가능하다면, 암살자들은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네 능력을 배우고 싶을 거야. 게이트도 없이 원하는 장소로 번쩍 이동한다니…….”

머리끝까지 복면을 뒤집어쓴 세디스가 그리 말했다.

“그렇다고 한계가 아예 없지는 않아. 지금 내 능력으로도 세 명이 최대고, 무엇보다 마나를 무지막지하게 잡아먹거든.”

실제로 내 마나의 무려 절반이 뭉텅 사라져 있었다.

“그래? 아무튼, 폐하와 공주님이 잡혀 있는 곳은 뒤쪽의 별궁이라고 했지?”

“응. 너희 둘은 아까 내가 말했던 계획들만 확실하게 숙지해. 구해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명 받잡지요, 대장.”

장난스레 대답하는 세디스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바이커를 일별한 내가 이윽고 천천히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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