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테라로(2)
뒹굴, 뒹굴.
“왜 잠이 안 온다냐.”
한편, 유리나는 때 아닌 잠을 설치고 있었다.
단기간에 너무 많은 일들을 겪은 부작용일까?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
내전을 넘은, 대륙발 전쟁.
거기에 더하여 동기생의 이해할 수 없는 급격한 성장까지.
문득 유리나는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걘 아직도 접객실이려나? 진짜 혼인이라도 할 생각은 아닐 테고.”
아니, 가만 생각해 보면 썩 나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세타 입장에서는 오히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테지.
무려 강대국의 2인자를 뒷배로 두는 것이니까.
다만, 테라의 입장에서라면 그 반대다.
언젠가는 나라도 안정기에 접어들 테고.
그 무렵에는 이미 자국의 인재를 타국에 빼앗긴 뒤일 테니까.
“결혼이라…….”
지크 공작은 분명 그 녀석을 데릴사위로 맞이하고 싶다고 했다.
조카의 하나뿐인 외동딸이니, 장차 자작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 가문은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부호다.
“근데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거야?”
애써 상념을 털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유리나는 이미 세타가 7써클에 도달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자랑스러운 테라인으로서, 그런 어마어마한 인재를 타국에 빼앗기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볼 것인가?
벌떡!
“절대로 안 되지.”
순간 유리나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전 이후의 테라는 어마어마한 인력난에 시달릴 것이다.
그건 지나온 역사가 말해줬다.
누가 승리하든, 약해질 대로 약해진 테라는 결국 제국에 잡아먹히게 될 운명일런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했다.
“애국자로서 그 꼴은 못 보지.”
지금 이 순간, 유리나는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는 열사가 되기로 했다.
그래, 이건 테라를 위한 일이다.
그 녀석 따위가 신경 쓰여서 이러는 게 결단코 아니라.
“테라, 파이팅!”
주먹을 불끈 말아 쥔 유리나가, 이내 방문을 나섰다.
***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멈칫.
“…뭐야?”
유리나는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복도 한복판을 웬 인영들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곳은 영주성 3층이었다.
데니스 자작의 배려로, 유리나와 일행들은 한 개 층을 단독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지금 3층에는 그녀가 아는 얼굴들만 묵고 있다는 의미다.
“…역시.”
눈을 부릅뜨고 보자, 희미한 달빛 아래로 언뜻 실루엣이 내비친다.
저 흑단 같은 머리색하며,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동그란 에메랄드까지.
틀림없었다.
세타와 루나다.
“아닌 밤중에 둘이서 내 욕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발소리를 죽이고 후다닥 벽면으로 옮겨 붙었다.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저 괴물 같은 루나가 눈치챌 수 있으니.
적당한 시점에,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길 작정이었다.
“…아무튼 나는 네가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
적막한 오밤중이었다.
순간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연스레 귀가 쫑긋하고 세워졌다.
상처를 받아?
누가?
“걘 그럴 녀석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 미리 얘기해 주는 거다. 아카데미 때부터 서로 의지를 많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순간적으로 유리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러니까 잠시 추측하자면…
아카데미 시절에 일종의 그렇고 그런 사이가 있었다는 건가?
저 세타가?
‘그럴 리가!’
쟨 한낱 낙제생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때는 얼굴도 못생겼었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 또 상처를 받지 말라느니 하는 말은 앞뒤가 안 맞았다.
‘…이런!’
때마침 루나가 뒤로 돌아섰다.
빈방은 모두 출입문이 열려 있는 상태였고.
그중 하나를 골라 유리나가 잽싸게 몸을 숨겼다.
아니, 아예 방 안으로 전신을 내던졌다.
철푸덕!
“으으…….”
바닥에 찧은 턱이 쓰리다.
허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틈은 없었다.
“……?”
잘 걸어가던 루나가, 곧장 그 자리에 멈춰 섰으니까.
쌕쌕 몰아쉬고 싶은 숨을 가까스로 참았다.
잠시 후,
저벅, 저벅, 저벅.
이내 멀어져 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흐어어억!”
유리나가 참았던 날숨을 토해냈다.
인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심장은 여전히 콩닥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들어서는 안 될 비밀스러운 얘기를 접한 것 같아서…….
“호, 혹시 저 녀석. 그것 때문에 결혼을 미룬 것은 아니겠지?”
이제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심히 궁금해 미칠 지경인 유리나였다.
***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나는 지크 공작을 다시 찾아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른 아침부터 복장을 갖춰 입은 그가 유독 눈에 띄었다.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폐하께 보고를 드리고 오는 길이네.”
“아하.”
“폐하께서도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시더군. 곧장 다른 왕국들에게도 연락을 취해보겠노라 말씀하셨네. 이르면 오늘 내로 답이 올 테지.”
“그것 정말로 잘됐습니다!”
내가 손뼉까지 쳐대며 기뻐했다.
직후,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지크 공작이 묻는다.
“그대들은 이대로 테라로 귀국할 생각이겠지?”
“일단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노력했다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면 어제 내가 했던 제안은…?”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 나선 내가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
허나, 예상외로 지크 공작의 표정은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더 탐이 나는군.”
“그게, 잠시 사정을 설명 드리자면…?”
가만, 방금 뭐라고…?
“나라 위에 그 어떤 개인도 존재할 수 없는 법. 아마도 자네는, 몰락해 가는 고국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는 거겠지?”
“에?”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준비한 변명들이 산더미같이 많았는데, 오히려 상대 쪽에서 먼저 이리 평가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혹,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건 아니시죠?”
심지어 곁에 선 예의 엘리나라는 아가씨가 이리 물어오기까지 했다.
아, 죄 많은 남자여…….
“그런 거 아닙니다. 엘리나 씨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이성이니까요.”
“아…….”
인사치레나 다름없는 내 말에 엘리나의 얼굴 위로 희미한 홍조가 어려갔다.
“다만, 공작님의 말씀대로 제가 처한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부디 아가씨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테라의 세타 쿤 이그니스 님이시죠?”
“예? 아, 예.”
“그러시다면, 전쟁이 모두 끝나고 다시 한번 저희 영지에 방문해 주실 수는 있으신가요?”
“그게 무슨…?”
“그땐, 제가 제대로 대접을 하고 싶어서요.”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본인을, 어느 비극적인 연극의 여주인공쯤으로 생각하는 듯싶었다.
특히나 주변인들의 반응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지크 공작의 저 흐뭇해하는 얼굴 하며.
마치 쓰레기라도 문질러 댄 듯한, 데니스 자작의 썩어 문드러져 가는 표정까지.
자작님, 저는 그 마음 다 이해합니다.
“커, 커험. 기회가 되면 언제든 방문하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약속하신 거예요? 꼭 와주셔야 해요!”
“아, 알겠습니다.”
이내 엘리나가 뒤로 물러서자, 지크 공작이 손을 흔든다.
“살펴 가시게. 급한 일이 생기면, 알려준 주파수로 연락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 마지막 인사까지 마치곤, 우리는 곧장 데니스 영주성을 나섰다.
한데,
“……?”
영주성을 나서자마자 왜인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어딘지 모르게 묘한 유리나의 표정이 시야로 들어왔다.
“…또 얼빠니 험담할 생각은 하지 마라. 의외로 순수한 아가씨 같으니까.”
“그게 아니고. 너야말로 의외로 순정파였냐?”
“뭔 소리래?”
“부끄럽냐? 괜히 모르는 척하기는.”
피식.
유리나의 입가로 옅은 웃음이 맺혀졌다.
그게 너무나 거슬려 나는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보다, 여기서 어떻게 테라까지 돌아가냐?”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루나가 대신 답해줬다.
“우리가 있는 곳은 자이툰과 스란의 국경지대다. 자이툰의 북부 국경선을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제국군과는 제법 거리가 있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만, 여기서 테라로 귀국하려면 또 한 번 스란의 영토를 거쳐야 한다.”
“음…….”
이건 조금 문제였다.
제국과 이미 한통속이나 다름없는 공국이다.
더욱이, 이제 우리는 스란의 공적으로 낙인찍혀 있는 상황이었다.
“워프를 이용하면 안 되나?”
“불가. 반란군은 바보가 아니다. 작금에 이르러, 테라의 영역 대부분에 워프 방해막이 펼쳐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돈 지랄 한번 어마어마하게 하신 모양이네.”
“하니, 우리는 다른 경로를 뚫어야 한다.”
아무래도 루나 나름의 생각이 있는 듯싶었다.
그러니 저리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이겠지.
한데, 바로 다음으로 이어진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검은 마물의 숲.”
“……!”
“아무래도 그곳을 관통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직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와 유리나가 동시에 반응했다.
“뭐!?”
***
검은 마물의 숲은, 데니스 자작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위치해 있었다.
말을 타고 꼬박 반나절만 내달리면 금세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으니까.
참고로,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검은 마물의 숲은 무려 7개의 국가를 인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륙의 그 어떤 나라도 숲을 점령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곳에서 서식하는 마물들이 여타 생명체들과는 수준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루나! 진짜로 숲을 통과할 생각이야?”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방법은 무슨, 가다가 죽을 판이구만!”
“쉿.”
찰나, 유리나를 조용히 시킨 루나가 정면을 가리켰다.
저 멀리, 나무마저 흑목(黑木)인 숲 앞에 일단의 무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대략 일백여 명 정도?
분위기로 보아 저들 또한 숲에 볼일이 있는 듯싶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표식인데…….”
그들을 발견한 루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5대나 되는 마차들이 정차해 있었고.
최선두의 마차 위에는, 한 장의 상단기가 나풀거리고 있었다.
대게 중소 상단들은 기(旗)를 숨기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지만, 이름 있는 대상단들은 보란 듯 깃발을 걸어놓고 움직이곤 했다.
가령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니, 알아서 기어라… 하는 무언의 경고.
실제로 산적들이 기를 보고 머리를 돌리는 경우도 많았기에,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이제 기억났다. 저들은 골드 버든(Golden bird) 상단이다.”
“……!”
순간 나와 유리나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골든 버드 상단?
그 대륙 5대 거상이라는 황금왕이 있는?
“대박. 저런 초거물 상단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유리나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사나 마법사가 아닌, 일개 장사꾼 앞에 단독 칭호가 붙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중에서도 황금왕.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었다.
하니, 이런 동요도 당연한 것이겠지.
“호오…….”
왠지 느낌이 좋았다.
“내심 데니스 자작가라는 배경이 아쉬웠던 참인데… 잘됐네.”
“뭐?”
“너네 돈 많아?”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냐?”
“그러니까, 테라로 돌아가면 군자금이 많이 남아 있냐고.”
“…아니.”
내 물음에 현실이 떠올랐는지, 유리나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참, 그리 안일해서야. 전쟁에서 동맹보다 더 중요한 게 돈 아니겠냐?”
“뭐 어쩌라고.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
“그게 아니라, 이참에 돈줄을 만들어 보자는 거지.”
“…너 설마…?”
유리나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내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잘만하면 무려 5대 거상을 호구로 잡을 수 있을,
…아니, 인맥으로 둘 수 있을 거라 확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