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00화 (100/251)

100화. 테라로(1)

그 시각.

쿵! 쿵! 쿵! 쿵! 쿵!

웅장한 북소리 속.

하늘 높이 우뚝 솟아오른 제1마탑을 십만의 군세가 뱅하니 둘러쌌다.

아예 작정이라도 한 건지, 그 한편에는 수백여 개의 군막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중앙 군막.

“폐하는 자리를 비우신 겁니까?”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오신다 하셨습니다.”

“흠…….”

페일 폰 트쉬베르.

1황자가 정면을 바라봤다.

천막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향해 예를 갖추는, 단 한 명의 귀족만 제외하고.

눈치 빠른 귀족이 빠르게 말을 덧붙인다.

“내부 진압은 현재까지 성공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다만, 치유와 정신의 마탑주 외에 나머지 마탑주들은 놓치고 말았답니다. 믿고 맡겼던 출입구 한 축이 뚫리는 바람에…….”

“놓친 마탑주가 네 명이라. 나름 선방했군요. 다른 이들은요?”

“그에 앞서, 관중으로 참가했던 검사와 마법사도 각 한 명씩… 나머지 어지간한 고위급 인사들은 모두 사로잡았습니다.”

“검사 하나와 마법사 하나? 마탑주들이 뚫어놓은 퇴로를 이용한 건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뭐라고요?”

“최초 출입구를 뚫은 이들이 그 두 사람입니다.”

“허어, 고작 둘이서 그 괴물을…?”

이번만큼은 놀랐다는 듯 페일이 가볍게 눈을 치켜떴다.

“그중 한 명은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올해 마법 대전 참가자이자, 자유 연합 소속의 마법사로요.”

“자유 연합의… 마법사요?”

“예. 조금 더 알아볼까요?”

잠시 고민하던 페일이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요.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도 가만히 계시는 마당에, 제가 나설 수는 없지요. 무릇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고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지금은 본연의 일에 충실해야 할 때겠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황자 전하.”

예의 귀족이 예를 다해 허리를 숙였다.

사실상 그는 이미 1황자 쪽 사람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페일이 이내 천막을 나섰다.

“전하.”

기다리고 있던 트라오레 후작이 재빨리 다가섰다.

“폐하께서는 안 계시는군요.”

“하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돌아오시는 대로 계획을 전해드리지요. 한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런 말씀 마시지요. 고국을 위해서라면, 그깟 자식이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그것도 이미 죽은 자식인데요. 오히려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죽은 녀석도 크나큰 영광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페일은 얼마 전 한 가지 비보를 접했다.

자신 쪽 사람인 파동의 마법사, 트라오레 후작의 자식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그것도 마탑의 영역에서.

그때 페일이 느꼈던 감정은, 안타까움이 아니라 짜릿한 쾌감이었다.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으니까.

하여, 그 생각을 트라오레 후작에게 넌지시 던진 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한데, 고작 제 자식의 시신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아니요. 기껏해야 나라 하나 정도 엮는 게 전부겠지요.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시작입니다.”

“예…?”

“한 나라가 무너지면,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위기의식을 느낄 테니까요. 뭉치려 하겠지요. 분명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들 겁니다. 기회는 바로 그땝니다.”

말을 잇던 페일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대에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들이 있다. 그들은 제국의 실력 있는 귀족들을 하나둘 암살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 피해자 또한 발생했다. 악당들의 목적은 제국을 몰락시키고 대륙을 집어삼키는 것. 이에, 제국은 더 이상 이번 일을 묵과할 수가 없다.”

“대륙인들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까요?”

“믿든 안 믿든 상관없습니다. 이미 각 왕국에 저희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하니까요. 그들에게 적당히 연기도 시켜야겠지요.”

“…….”

이 시점에서 트라오레 후작은 생각했다.

뭇 사람들은 1황자가 무능한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그거야말로 완벽한 연기라고.

그가 봐온 페일 폰 트쉐비르는, 제국의 그 누구보다 영악하고 치밀한 인물이었다.

하여, 트라오레 후작은 이번에도 그를 믿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완전 대우가 달라졌는데?”

더 이상 주변에 기사들은 없었다.

손님으로 대접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각 개인마다 시종들이 붙어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냐고 물어오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귀찮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유리나는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세타가 행했던, 그 어마어마한 마법의 향연들이 아직도 눈앞에서 아른거렸으니까.

“야.”

“왜.”

“너 말이야, 혹시…….”

“……?”

“써클이 오른 거냐?”

“…….”

세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리나는 꼴딱꼴딱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기다렸다.

추정컨대, 이전 세타의 경지는 최소 6써클이었다.

거기서 또 경지가 오른 거라면……

7써클.

최소 상위 20위 이내의, 준 마탑주 급이다.

“왜 대답이 없냐?”

“안 알랴줌.”

“…….”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속에서 짜증이 치솟았다.

이 녀석은 왜 항상 그냥 알려주는 법이 없을까?

“루나.”

“……?”

“내 의뢰도 받아주면 안 되냐?”

“의뢰?”

“너네 정보원들 많잖아. 내가 사람 한 명에 대해 좀 알고 싶거든? 의뢰 내용은 세타 쿤 이그니스에 대한 모든 것.”

앞서가는 녀석에게 마치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유리나는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뒤통수를 후려갈겨서라도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다.

“…그건 내가 더 궁금하군.”

“오, 그럼 받아주는 거야?”

“일단 네가 내 궁금증부터 풀어준다면 생각해 보지.”

“엉…? 궁금증? 나한테?”

순간 유리나의 얼굴 위로 의문스러움이 번져 갔다.

나한테 궁금할 게 뭐가 있다고?

“일전에 세타 쿤 이그니스와 둘이서 밤을 새고 들어온 적이 있었지? 멀쩡한 숙소까지 잡아두고.”

뜨끔.

찰나 유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니, 얘가 이걸 어떻게 알아?

일단 시치미를 떼고 보기로 했다.

“무, 무슨 소릴 하는 줄 모르겠네?”

“너희 둘, 혹시 사귀나?”

“……!”

유리나의 입이 대번에 쩌억, 하고 벌어졌다.

앞서 걷던 세타도 홱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으로 둘의 시선이 딱 마주친다.

“절대로 아니거든!?”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유리나와 세타가 차례로 반응했다.

“흠…….”

물론,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루나로서는 의심만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 켕기는 게 많을수록 더 발끈하는 법이니까.

***

접객실.

드디어 손님에게 어울릴 법한 방 안에 들어섰다.

말끔하게 치워진 20평 남짓한 방.

그곳에는 이미 지크 공작과 데니스 자작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아, 아까 봤던 금발의 아가씨도.

“자네들의 말을 모두 믿겠네.”

곧장 본론을 끄집어내는 지크 공작을 보며, 나는 냉큼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 말씀은?”

“자네들은 우리와의 동맹을 원하는 것이겠지? 제국군이 국경을 넘은 것이 사실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연합 전선이 중요할 테니까.”

역시 얘기가 쉬웠다.

공작쯤 되는 인물이라면, 이 정도 판단력은 있어야지.

“말씀대로입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네.”

“예?”

“나라 대 나라로서의 동맹은 무리야.”

“그게 무슨…?”

“테라는 아직 내전이 한창이라고 들었네. 우리가 자네들을 정식 사자(使者)로 대접한다면… 결국, 해방군을 인정한다는 뜻과 마찬가지 아니겠나?”

제국이 정복 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내전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만은.

제노스가 있는 반란군은, 제국이 대륙을 집어삼켜도 종전은 선언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마침내 왕국을 점거하지 않는 이상.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이해합니다.”

“해서, 제안을 하나 하고 싶네만.”

“제안이요?”

“국가 대 국가 말고. 개인 대 개인으로서의 동맹은 어떤가?”

“……?”

“그저 일반적인 동맹을 말하는 것이 아니네. 혈맹이야, 혈맹.”

말을 마친 지크 공작이 짐짓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받아들인다면, 나도 손 닿는 데까지 자네들을 도와주겠네. 제국은 물론이고, 테라의 해방을 위해서도.”

“……!”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강대국 중 하나인 자이툰 왕국.

그곳 2인자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는다?

이건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물론 조건이 있겠지요?”

“눈치가 빠르군.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동맹을 넘어 혈맹을 원하네. 여기 엘리나는 내 조카 손녀인데, 혈육이라서가 아니라…….”

지크 공작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삼촌! 아, 아니. 공작 각하. 진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제 엘리나도 슬슬 시집을 보내야지. 너도 말하지 않았느냐? 네 나이 때 장가를 갔었다고.”

“그건 그냥 해본 소리고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마음에 차는 사람이 없으면…….”

“반대로 얘기하면, 마음에 차는 사람이 있으면 딸자식 시집도 보낼 수 있다는 말이겠지? 당장 우리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이만한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 인재가 어디 있더냐?”

“그건…!”

“일단 좀 지켜보거라.”

말 한마디로 데니스 자작을 조용히 시킨 지크 공작이 내 옆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자네한테도 내 자식을 소개시켜 주고 싶지만…….”

“전 괜찮습니다.”

루나가 딱 잘라 거절했다.

직후, 지크 공작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이미 내 자식들은 다 장가를 갔다는 말을 하려고 했네. 손자가 있지만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거든.”

“아…….”

루나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설레발은 다른 사람 전문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루나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는…….”

“만약 자네만 받아들인다면, 가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해방군을 도울 것을 약속하네.”

나도 단칼에 거절하려 했는데, 때마침 지크 공작의 타오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의미로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데니스 자작도.

“그… 일단 당사자의 생각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하여, 나는 이 곤란한 상황을 또 다른 당사자에게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만난 사람과 결혼이라니.

그것도 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벤트를 코앞에 두고.

아마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그렇게 확신하며, 예의 엘리나라는 아가씨를 빤히 바라봤는데,

“전… 좋아요.”

정작 믿었던 당사자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부끄러운지 얼굴마저 붉힌 채로.

“그, 그게! 가문을 위해서라면 저 하나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으니까요!”

“…….”

더하여, 누구도 묻지 않은 해명까지 덧붙이신다.

“그렇다는군.”

지크 공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까딱하다간 제대로 코가 꿰일 듯싶다.

***

수 시간이 지난 어두운 밤.

약간의 해프닝이 일단락되고, 나는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혼약 얘기는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아직은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하며.

그렇다고 아예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해방군 일은 별론으로 하고.

제국군에 맞서 정보를 공유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견은 저쪽도 동의했으니까.

일단 확인부터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데니스 자작의 우려도 있었지만, 지크 공작은 잠깐 거짓말쟁이가 되면 그뿐이라며 단칼에 일축했다.

그는 내 생각보다 훨씬 호탕한 사람이었다.

이제 앞으로의 계획이 문제였는데…….

저벅, 저벅, 저벅.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밤이 너무 깊어졌다.

물론 대화의 주된 내용은 예의 엘리나라는 아가씨의 자랑이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어찌나 총명스럽던지… 하는 얘기들.

하여, 자정이 다 된 무렵에서야 뒤늦게 배정받은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타 쿤 이그니스.”

우뚝.

복도 한복판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넓은 저택.

전등마저 빛을 잃은 어둡고 긴 복도.

그나마 달빛만이 시야를 밝히는 창문 아래에서, 루나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 자리 잡고 선 흑발의 미녀.

역시, 분위기 하나는 기가 막혔다.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려? 나를?”

“그래. 이제 곧 테라로 갈 생각이겠지?”

“응? 어… 그래야겠지?”

“하면, 출발하기 전에 충고 하나만 해도 되겠나?”

“충고…?”

내 반문에 루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너무 놀라지는 마라.”

“엥?”

“테라는 많이 변했다. 환경도, 사람도. 혹시나 그곳에서 기분 상할 일들이 더러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인버스 가문은…….”

“인버스 가문?”

“…네게는 익숙한 이름이겠지.”

익숙하다 마다 할 것도 없었다.

인버스 공작가는 실비아나 제노스 녀석과 같은 3대 공작가였으니까.

특히나,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네.”

나랑 같이 꼴찌를 엎치락뒤치락하던 놈.

더하여, 아카데미 시절 내 룸메이트였던 몇 없는 친구.

“바이커 론 인버스. 네가 특히 조심해야 할 사내가 바로 그다.”

“…뭐?”

“3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길다. 당장 같은 해방군이라도 사이가 썩 좋지 않은 것이 현실이야. 더욱이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는 지금에서는…….”

잠시 말끝을 흐리던 루나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무튼, 나는 네가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걘 그럴 녀석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 미리 얘기해 주는 거다. 아카데미 때부터 서로 의지를 많이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말을 마친 루나가 그대로 돌아섰다.

생각이 많아지는 얘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토해내고선.

“음…….”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멍하니 루나의 뒷모습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바이커가 변했다 하더라도…

그 녀석이 내게 검을 겨누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