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3화 (14/251)

13화. 데뷔

천천히 심장의 써클을 휘돌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람들의 조소 어린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그때의 감각을.

그 선명했던 마나의 기운을 온몸으로 떠올릴 뿐.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이제 ‘각성’까지 마친 전설 속 용혈의 마법사가 아니던가?

“큭… 고작 1써클도 마스터하지 못한 버러지 새끼가 뭘 하겠다고.”

때마침 비웃음으로 가득한 상대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의 주력은 독(毒).

맹독의 마법사를 꿈꾸는 녀석답게, 특히나 접촉계 독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분명 까다로운 상대였으나, 지금의 내게는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다.

‘캐스팅과 동시에 상대를 중독시키는 시전계 독 마법은 최소 5써클 이상. 단기전으로 단숨에 짓밟는다.’

이내 상념을 마친 내가 크게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리즈.”

휘청!

“……!”

거짓말처럼 내 몸이 당장이라도 넘어질 듯 출렁였다.

3써클 마법사답게, 시전어만으로 1써클 마법을 펼쳐 낸 스네이크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짐승도 일단 다리부터 묶어놓고 패는 게 순서지.”

“보조 마법에도 재능이 있었나?”

“뭐? 푸하하! 그리즈는 공용 마법이야, 멍청한 새끼! 이런 기초 중의 기초도 모르는 빡대가리가 뭐? 나를 어떻게 하겠다고?”

한껏 폼을 잡던 내 얼굴 위로 낭패감이 떠올랐다.

그리즈가 공용계 마법이었나?

기초고 뭐고,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있어야 알지!

고유의 주력과는 상관없이, 어떤 마나와도 상충을 일으키지 않는 게 공용계 마법이었다.

내친김에 작정을 했는지, 상대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최대한 고통스럽게 뭉개주마.”

“입담에 거침이 없네? 이미지 관리하던 것 아니었나 봐?”

“크크크. 내가 너 같은 머저리인 줄 아느냐? 소리 증폭 마법이라면 이미 해제된 지 오래다.”

비리의 온상이 여기 있었네.

일개 생도가 아카데미 관계자를 제 입맛대로 구워삶을 줄이야.

“준비성이 상당히 철저한데?”

“그뿐일까. 네놈을 짓밟을 계획도 철저하게 세워왔으니 기대하라고.”

“기대는 되네.”

“뭐라?”

“듣는 귀도 없겠다, 나도 눈치 안 보고 너를 밟아줄 수 있을 테니까.”

“미친놈.”

더 이상을 들어줄 수 없겠다는 듯,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녀석이 곧장 입을 웅얼거린다.

“어디 독에 중독되고도 그리 지껄일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바위조차 녹여내는 맹독의 마나여, 생을 무로 돌리는 필멸의 방울이여. 그 힘을 내 앞에 살포하라, 포이즌 드롭!”

뭉클!

스네이크가 영창을 마치는 순간, 허공에 생성되는 수십, 수백 개의 진녹색 액체.

이건 위험하다.

일견 보기에도 인체에 상당히 치명적일 듯한 맹독성 물질.

방울진 독의 마나가 먹잇감을 찾는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살기를 내뿜는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향해 쏘아져 온다.

“뒈져라!”

스팟!

아직도 바닥은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하여, 본능적으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엑스자로 교차하여, 일단은 중요 부위만이라도 막아낼 생각이었다.

만약 내가 전설 속 용혈의 마법사라면.

그 드래곤의 가죽이라면, 독 따위는 코웃음도 치지 않을 테니까.

허나, 그런 내 행동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상당히 무모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이 멍청아! 독이 그런 방법으로 막아지겠냐!? 까짓거, 나 같으면 그냥 다 태워 버리겠다!”

“……!”

언제부터 접근해 있던 것일까?

어느새 연무장 바로 아래까지 다가선 유리나가 일침을 가했다.

내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번뜩이며 스쳐 지나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앞의 녀석이 유리나에게만큼은 유독 저자세로 굴었던 이유.

독은 불에 약하다.

하면, 나 또한 그 상성의 관계를 이용한다.

우우웅!

생각과 동시에 마나가 움직였다.

심장의 써클이 거칠게 회전한다.

한 바퀴, 그리고 또 한 바퀴.

두 바퀴 이상은 단 한 번도 돌아본 적 없던 마나가, 지금만큼은 거침이 없었다.

단숨에 2회전을 거듭한 마나는, 이내 무형의 힘이 되어 가슴을.

거기서 더 나아가 내 목울대를 타고 위로 솟구친다.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잿더미로 만드는 화염의 마나여.”

처음 시전하는 마법이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부족하다.

단순히 구(球)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여기에 한 가지 힘을 더한다.

“타올라라. 한데 뭉쳐라. 그리고, 터뜨려라. 그 분노를 쏟아내, 눈앞의 적을 폭멸(爆滅)하라.”

순간, 마치 팔이 통째 타버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마도 주력이 아닌 마나를 사용한 부작용이겠지.

허나, 고통은 금세 사라졌다.

“영창이라고…?”

곧 눈을 크게 뜨는 스네이크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반응이 다소 늦은 편이었으나,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평소의 그 성질머리답게, 녀석은 제 마나를 이용해 살포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있었으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더 두려움을 느끼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제 무덤을 판 꼴이 되어버렸지만.

이런 종류의 완급 조절은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이미 제 손을 떠난 마법이니, 그 속도를 마음대로 조정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파이어 볼!”

마침내 영창을 끝낸 내가 시전어를 외쳤다.

화르르르륵!

그와 동시에, 허공에 생성되는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화염의 구.

불이 독을 삼킨다.

마나가 이종의 마나를 태워 멸한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의 코앞까지 쇄도한다.

“이런 개 같은…!”

스네이크는 채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콰아아아앙!

제법 커다란 폭음과 동시에, 예의 화염의 구가 그대로 녀석의 몸에 작렬했으니까.

***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연무장을 지켜보던 유리나가 떠억하니 입을 벌렸다.

한 말이 있지만, 막상 자신이 내뱉고도 실소가 나오던 참이었다.

이 점은 대전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파, 파이어 볼?”

“어떻게 쟤가 화염계 마법을…?”

“1써클 유저라고 하지 않았어? 파이어 볼은 최소 2써클은 되어야 흉내나 낼 수 있잖아!”

“실력을 숨기고 있던 건가?”

특히나 여러 관중들 중에서도 같은 7년차 생도들의 놀라움이 컸다.

사실 자연계.

그중에서도 원소 마법의 대표격인 화염계 마법사들은 조금만 둘러봐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희귀성만 놓고 따지면, 그리 특별한 주력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 가지 더.

명문이라 불리는 테라 아카데미답게, 7년차 생도들은 경지 또한 대부분 2써클 이상이었다.

기존의 1써클이라고 해봐야 세타와 그 룸메이트인 바이커 정도가 다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3써클 이상이 수십 명씩 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생도 대다수가 2써클 유저에서 마스터 사이.

3써클 이상은 그야말로 극소수였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극단적 마름모 구조라고 해야 할까?

그 모든 점들을 감안하고서라도, 만년 낙제생인 세타가 파이어 볼을 시전했다는 건 충분히 경악할 만한 사안이었다.

“가, 각성이라도 한 건가?”

“음, 그런 거라면 축하할 일이긴 한데… 스네이크 녀석. 방심하다가 쪽만 제대로 팔린 것 같은데?”

“불쌍해도 어쩔 수 없지. 정보가 전혀 없었으니. 하필이면 상성도 최악이었고…….”

폭발의 위력으로 저만치 날아간 스네이크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리나가 후다닥 위로 뛰쳐 올라갔다.

“야!”

“…응?”

“너 뭐야, 방금 그 파이어 볼!”

“그게…….”

유리나의 물음에,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세타가 대답한다.

“…그냥 써지던데?”

“그냥 써져? 웃기지 마. 분명 신체 변형 마법으로 각성하는 걸 내가 다 봤는데…!”

“쉿! 잠깐만 멈춰 봐.”

“……!”

순간 유리나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입가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물감.

순식간에 다가선 상대가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느, 느으으. 으그 므흐는…….”

“비밀, 지켜주기로 했잖아?”

파앗!

곧장 손을 떼어낸 유리나가 세타를 노려봤다.

“너, 최악이야! 숙녀 얼굴에 함부로 손을 가져다 대다니. 조금 생겼다고 기고만장하지 말라고!”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최소한 나는 사내놈 얼굴이나 쫓는 반푼이가 아니니까!”

홱!

세타가 채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유리나가 연무장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려갔다.

햇빛을 직선으로 받은 그녀의 얼굴은, 오늘따라 유달리 붉게 물들어 있었다.

***

관중석의 또 다른 한편.

한참이나 연무장 위를 노려보던 미남자가 일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녀석, 역시 내가 데려가야겠어.”

“네!?”

예의 미남자, 에이스의 말에 곁에 앉은 세실리아가 화들짝 놀랐다.

“본인이 거절했잖아요? 싫다는 사람 억지로 데려다 안 키우시겠다면서요.”

“생각이 바뀌었어.”

“그 생각이라는 거, 저쪽은 그대로일 텐데요?”

“자존심이 있지, 나도 두 번은 안 권해. 한데, 저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재능이야.”

“무슨 뜻이에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바람’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거든?”

“그 바람이 혹, 바람기는 아니시죠?”

“농담하는 것 아니고.”

“알고 있어요. 괜히 질풍의 검객이라 불리는 에이스 님이 아니시니까요.”

“내가 녀석에게 느낀 건, 다름 아닌 바람이었어. 그 이질적인 힘이, 심장뿐만 아니라 신체 전반에 걸쳐 머물러 있었거든.”

“네? 그 말씀은…….”

“네 생각이 맞아.”

“…….”

“근데 불을 사용하네?”

말을 마친 에이스가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가볍기 그지없던 얼굴 위로는, ‘욕심’이라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감정을 한가득 떠올린 채.

허나, 에이스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왔다는 소식은 들었네만.”

“……?”

바로 뒤쪽에서부터 드리워진 그림자에, 세실리아가 먼저 반응했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이 곧 놀라움으로 번져 갔다.

“아, 아즈문 사트리노 학장님?”

“오랜만이군, 세실리아. 연합 창설 기념식 때 이후로는 처음이니, 근 8년 만인가?”

“바, 반갑습니다. 여기서 이리 뵐 줄은 몰랐네요.”

제법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곧바로 자신을 알아보는 상대를 보며, 세실리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즈문 사트리노가 장난스레 말을 잇는다.

“내 집 앞마당까지 찾아와서는, 그 무슨 섭섭한 말인가?”

“그, 그건… 죄송합니다.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됐네. 노인네가 심술 한번 부려본 것이니. 맹한 구석이 있는 것까지, 자네는 하나도 안 변했군.”

“그거… 칭찬이시죠?”

“물론이네. 그보다, 인사는 조금 미루고. 잠시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나?”

“대화요?”

아즈문 사트리노의 용건은 명확했다.

말은 세실리아에게 하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줄곧 에이스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순간적으로 망설이고 있자, 에이스가 먼저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죠.”

“에이스 님…?”

“뭐, 짐작되는 바가 아예 없지도 않거든.”

힐끗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둔 에이스가 제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 할까요?”

“아니. 귀한 손님을 바깥에 세워둘 수야 있나. 내 집무실로 가지.”

“이거, 그 유명한 대지의 마법사가 직접 우려낸 차를 얻어 마실 수 있는 겁니까?”

“원한다면 식사도 대접하지.”

흔쾌히 대답하는 아즈문 사트리노를 향해 에이스가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그거 좋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