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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될놈이다-1633화 (1,632/1,826)

§ 나는 될놈이다 1633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현의 표정은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푸르네우스는 뭐….’

솔직히 구시렉도 푸르네우스가 따라잡힌 걸 그렇게 걱정하진 않을 것이다.

푸르네우스가 따라잡혀서 조금 놀라긴 했겠지만, 정말 걱정이 됐다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서 구하러 갔을 터.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는 게 구시렉의 진심을 드러냈다.

놀랍긴 한데 자기 목숨 걸어가면서 구해주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그건 태현도 마찬가지였다.

“구시렉. 그렇지만 난 푸르네우스를 믿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냐?

구시렉은 실제로도 미친놈 보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아키서스의 후계자 놈이 진지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니 소름이 쫙 돋을 정도였다.

누가 뭘 믿어?

“푸르네우스는 알아서 따돌릴 수 있을 거다.”

-…아니!!!

구시렉은 뒤늦게 태현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푸르네우스를 미끼 삼아서 버리고 가자고?!

‘뭐 이런 미치광이 놈이 있단 말이냐?’

마계 대회의에서 악마 공작들 모였을 때 ‘우리 같이 힘을 합쳐서 굶주린 혼돈을 막아내자!’ 하고 외치던 놈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하긴 악마 공작들도 나서겠다고 말한 것치고 아키서스를 많이 방해하긴 했지만….

“왜, 네가 가서 도와주려고?”

-…….

구시렉은 태현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당연히 구시렉도 가서 도와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 보니, 푸르네우스는 알아서 따돌릴 수 있을 거다. 놈은 강하니까.

“그렇지? 납득해 줘서 고맙다.”

태현은 웃으면서 구시렉을 칭찬해 줬다.

구시렉은 뭔가 찜찜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광기공 에슬라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괜히 더 거슬렸다.

* * *

-이런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푸르네우스도 악마 공작인만큼 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앞에서 빠져나가고 있던 놈들이 도와주기는커녕 그냥 계속 달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도 황당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푸르네우스를 놓고 다시 쫓을 수는 없었다.

꿩 대신 닭이지만 이 악마 공작이라도 잡아야 했다.

“이 악마 공작은 무조건 잡겠습니다!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망을 구축하십시오! 직접 쓰러뜨려서 굶주린 혼돈에게 바치겠습니다!”

-보자 보자 했더니 아주 한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구나, 이 발칙한 모험가 놈들아!!

푸르네우스는 건방지게 덤비는 스미스와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을 보며 분노했다.

하찮은 인간 모험가 놈이 감히 건방지게 지껄이는 꼴을 도저히 용납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지금 작정하고 덤비고 있는 상황.

각종 스킬로 버프된 스미스는 무시무시한 괴력을 발휘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방패에 깃듭니다!]

[공격을 흡수합니다!]

[굶주린 혼돈의 힘이 파동이 되어 주변을 휩쓸고 나갑니다!]

[……]

[……]

아이스 드래곤을 타고 적을 대번에 제압하려던 푸르네우스가 뒤로 밀려날 정도의 괴력.

푸르네우스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사로서, 마법사로서 균형 잡힌 올라운더 타입의 악마 공작인 푸르네우스가 이깟 인간 모험가 하나를 잡지 못하고 밀리다니!

-악마 놈들 별 것 아니구나!

-오늘 네놈이 죽을 자리다!

-저놈을 잡으면 마계로 돌려보내지 말고 영원히 가둬버리자!

[굶주린 혼돈의 하수인들이 기세가 오릅니다!]

[……]

스미스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다른 하수인들도 사납게 푸르네우스한테 덤벼들었다.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푸르네우스 입장에서는 이런 공방 자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감히….

감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놈들… 너희뿐만 아니라 아키서스 놈까지! 전부!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푸르네우스의 목소리가 얼음보다 더 차갑게 서늘해지자 스미스는 눈치를 채고 외쳤다.

“모두들 조심하십시오!”

[빙결공, 푸르네우스가 <진설(眞雪)의 다섯 번째 조각>을 사용합니다!]

[냉기의 진정한 주인이 찾아옵니다!]

콰직-!

구슬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멀리서 튀고 있는 태현 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냉기의 핵이 완전히 깨어납니다!]

* * *

‘실패하면 안 돼. 실패하면 안 돼.’

이다비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오스턴 왕국의 중앙 루트를 맡아서 공략에 들어간 이다비.

혼자면 모를까 수많은 파티들이 참여한 지금 책임감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다비는 내색하지 않았다.

파워 워리어 운영할 때도 느낀 거였지만, 원래 약한 점은 남들한테 드러내서 좋을 게 없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보는 눈이 많은 입장에서는 허세라도 부려야 했다.

‘일단 전력은 충분해.’

이다비는 다시 한번 상황을 점검해 보았다.

골짜기 랭커들로 구성된 대형 파티 여럿에, 아키서스 교단 NPC들. 그리고 다른 교단의 대주교급 대형 NPC들까지.

이 정도면 절대 약한 전력이 아니었다.

특히 다른 교단의 대주교급 되는 인물들이 여럿 있는 게 대단했다.

원래 대주교쯤 되면 NPC 한 명 있어도 파티 몇 개는 그냥 굴러가는 수준이었다.

그 정도로 주교의 버프나 힐 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주교급 되는 NPC들이 여럿 있다는 건….

‘지하 통로는 지금 바로 쓰면 들킬 테니까 참아야겠어.’

이다비는 태현한테 들은 덕분에 오스턴 왕국 지하에 연결되어 있는 통로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있다고 하더라도 평소부터 쓸 수는 없었다.

쓰는 건 어디까지나 필요할 때!

-아키서스의 황금주교.

“네?”

이다비는 NPC가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으아아… 아크락스잖아.’

태현과 같이 있을 때 이미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이다비는 아크락스가 얼마나 미친 NPC인 줄 알고 있었다.

파이토스 교단 속 망치기사단 단장 아크락스!

파이토스 교단에서도 과격파를 상징하는 아크락스는, 나름 미친 NPC를 많이 만나 본 이다비 입장에서도 정말 미친 NPC처럼 느껴졌다.

오죽하면 베레타르바 교단이나 타이란 교단, 데메르 교단의 주교들이 아크락스를 피해 다니겠는가.

-황금주교는 무엇을 믿소?

<파이토스 교단의 아크락스-파이토스 교단 퀘스트>

파이토스 교단의 망치기사단 단장, 아크락스는 혼란과 동료들의 배신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은 진정한 파이토스 교단의 전사이다.

‘너무 과장이 심한 것 같은데?’

이다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퀘스트 설명대로 따지면 아키서스 교단의 펠마스는 교단이 망했을 때도 신앙심을 버리지 않고 화신을 찾아다닌 충신 중의 충신 아니야?

…그런 아크락스는 한시라도 빨리 굶주린 혼돈을 쓰러뜨리고 숨어 있는 동료들을 일깨우고 싶어한다.

본격적인 토벌에 앞서 아크락스에게 인정을 받아라! 인정을 받는다면 아크락스는 당신에게 교단의 비전 스킬들을 전수해 줄 것이다.

보상: ?, ???

“!”

이다비는 깜짝 놀랐다.

공적치 포인트나 명성, 친밀도 같은 게 아니라 교단의 비전 스킬을 전수해 준다니.

이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아크락스한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수상했다.

태현만큼은 아니어도 이다비도 온갖 괴팍한 퀘스트들을 봐오면서 단련된 직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수상수상한데….’

-무엇을 믿냐고 물었소만.

“아, 네. 저는 아키서스 믿죠.”

이다비는 일단 대답했다.

-그런 당연한 대답을 물어본 게 아니오. 싸움에 앞선 자들은 모두 다 자신이 유리한 점을 찾소. 그리고 그런 유리한 점을 믿지. 황금주교는 어떤 점을 믿는 건지 궁금하오.

한마디로 ‘우리 이렇게 끌고 왔는데 무슨 자신감이든 있겠지?’란 뜻.

이다비가 그 말뜻을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도 종종 많이 보여주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길마님. 지금 길드에서 진행되고 있는 성벽 보수 퀘스트, 이거 다들 왜 하는 겁니까? 보상도 적어 보이고 나오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 퀘스트? 나도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해가 안 가면 참가하지 마.

-…그렇게 말하시는 거 보니 갑자기 하고 싶어지는군요. 뭔가 있으니까 다들 하는 거겠죠? 참가하겠습니다!

-아니, 참가하지 말라니깐….

-다들 참가하는 거 보니까 정말 뭐가 있긴 있나 봐! 나도 할래!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대신 남이 하면 그거 보고 ‘어 뭔가 있나?’ 하고 따라 하는 길드원들.

그리고 그런 만큼 이다비도 이런 상황의 대처법을 잘 알고 있었다.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이기!

상대한테 해석을 맡기면 상대가 알아서 잘 해석해 주는 것이다.

-…그 표정을 보니 정말 믿는 게 있는 것 같소.

[설득에 성공합니다!]

[화술 스킬이 오릅니다!]

[퀘스트 기간이 연장됩니다!]

[……]

[……]

‘휴.’

이다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크락스한테 완전히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퀘스트를 미루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지금 더 중요한 퀘스트들이 많은 만큼 모든 퀘스트를 다 깰 필요는 없는 것이다.

“황금주교님.”

“아 왜 또요…!”

이다비는 자신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오는 걸 느꼈다.

남들이야 저런 NPC와 한 번 대화하는 걸 판온 목표로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다비에게 지금 진영에 있는 고위 NPC들은 솔직히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싸움 벌어지면 듬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면 되지 뭐하러 쉬는 시간마다 계속 발발발발 돌아다닌단 말인가.

-황금주교님. 저는 베레타르바 교단 출신의 알로페라고 합니다.

“앗. 네.”

상대가 주교란 걸 깨달은 이다비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원래 기본적으로 대주교급 NPC들은 이렇게 대접을 받는 것이다.

아크락스가 좀 유별나게 특이한 경우였고….

<베레타르바 교단의 알로페-베레타르바 교단 퀘스트>

베레타르바 교단의 연정사제단 단장, 알로페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가르침을 잃지 않고 전파하려고 애쓰고 있다.

본격적인 토벌에 앞서 알로페에게 인정을 받아라! 인정을 받는다면 알로페는 당신에게 교단의 비전 스킬들을 전수해 줄 것이다.

보상: ?, ???

‘이건… 할 만한 것 같은데.’

이다비는 손가락으로 지팡이를 톡톡 두드려가며 생각했다.

아크락스 관련 퀘스트는 무시했던 이다비였지만, 그건 딱 봐도 퀘스트가 깨기 어려워 보여서 무시했을 뿐.

그에 비해 알로페 대주교는 사람도 좀 선해 보이고 퀘스트 난이도도 비교적 좀 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황금주교님께서는 지금도 대단한 영웅이시지만, 더 대단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 아직 부족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이다비는 솔깃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지간해서는 알로페가 시키는 임무를 해낼 생각이었다.

-황금주교님에게는 지금 사랑의 힘이 부족합니다.

“…….”

이다비는 그제야 베레타르바 교단이 무슨 교단이었는지 떠올렸다.

커플천국 솔로지옥의, 사랑의 교단!

베레타르바 교단은 다른 교단들과 심하게 다투는 편도 아니었고, 신전도 대륙에 널리 퍼져 있었지만, 가끔 게시판 보면 욕이 꾸준히 올라오곤 했다.

-뭐 이딴 교단이 있어요?? 내가 지금 애인 없다고 그냥 신전 들어오지 말라는데!?

-야. 그건 진짜 일부다. 난 애인 없다고 사제가 축복 마법을 안 걸어주더라.

-애인 없으면 사제가 아이템도 안 팔아….

-혹시 베레타르바 교단 같이 가입하실 분 있으신가요? 같이 가입하신 다음에는 헤어져도 상관없습니다. 버프가 필요해서요.

-다들 베레타르바 교단처럼 사회의 미풍양속 해치는 교단은 솔직히 금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음?

-그거 정말 옳은 생각인 듯.

“아. 네. 부족하네요….”

이다비는 슬슬 뒷걸음질 칠 준비를 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 퀘스트도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었다.

-제가 이 반지를 드리겠습니다.

[아이템을 얻었습니다!]

-이 반지를 같이 낄 상대를 찾아보십시오, 황금주교님. 그렇게 한다면 사랑의 힘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반지를 받은 이다비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고는 말했다.

“혹시 소환수한테 끼워도 인정이 되나요? 참. 그리고 만약 그게 된다면 같은 반지를 몇 겹이고 껴서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을까요? 상대는 하나여야 하나요 여럿이어야 하나요?”

-…사랑의 힘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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