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87화
“저희도 혹시 끼어도 될까요?”
“어… 그래라.”
그 이후에 갑자기 또 길드 동맹 쪽 파티 몇 개가 머쓱한 표정으로 찾아왔다.
다음에도 또 몇 개.
또 몇 개….
“우리도 혹시….”
“그래라.”
“으흐흠. 으흠. 김태현.”
“퀘스트 끼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안 말린다.”
“고맙다!”
호다닥 달려가는 파티원들을 보며 태현은 신기해했다.
“생각보다 참가하는 길드원들이 많다?”
“진심은 통하는 겁니다. 김태현 선수.”
배장욱 PD가 은은한 감동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현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러자 이다비가 옆에서 말했다.
“아마 길드 동맹 상황이 안 좋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했는데 진 것에 충격을 받아서 아닐까요?”
“하긴 그럴 수 있겠군.”
이기거나, 혹은 지더라도 좀 정정당당하게 지면 달랐을 수도 있었다.
굶주린 혼돈의 힘까지 빌려서 지는 건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찬성하던 사람도 반대하던 사람도 모두 다 포기하고 도망치게 만든 결과!
어쨌든 그런 식으로 길드 동맹이나 가끔 미다스 쪽 길드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찾아왔다.
태현이 안 쫓아내고 받아준다는 말이 퍼지자 더더욱 많이 찾아왔다.
솔직히 태현도 놀랄 정도였다.
‘이 정도로 많이 왔나?’
“김… 김태현.”
“?”
길드 동맹 쪽 랭커가 주저하는 표정으로 태현에게 말을 걸었다.
“뭐냐?”
“정말 들어가도 되냐?”
“된다고 했잖아? 뭐야, 굶주린 혼돈 쪽 첩자라도 되냐?”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근데 그게… 음….”
옆에서 보고 있던 이다비가 속삭였다.
“저 사람, 길드 동맹에서 태현 님 욕하던 사람이에요.”
“아. 그렇군.”
길드 동맹이 태현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좀 과격한 사람들은 있는 법이었다.
-우리의 적은 김태현이다! 언젠가 원수를 갚아야 한다!
-김태현 놈 그거 완전히 거품이다! 이번에 절대 우승하지 못할 거다!
-내가 김태현하고 1:1로 붙게 되면 본때를 보여주겠다. 먼저 김태현이 공격하길 기다린 다음 놈이 공격하면 어설픈 검술을 피하고 접근해 등 뒤로 돌아가서 훅훅!
원래 입으로는 드래곤도 혼자 잡는 게 사람 아니던가.
앞에 있는 길드 동맹 랭커, 흑랑은 그런 걸로 좀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태현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길드 동맹에서 나 욕한 놈이 한둘도 아니고… 신경 안 쓴다. 들어가라. 퀘스트 방해하지 말고.”
“고… 고맙다!”
흑랑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평소에 김태현 욕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고마울 뿐이었다.
이걸 봐줄 줄이야….
한 명이 저렇게 넘어가자 다른 사람들도 슬며시 자수를 시작했다.
“김, 김태현. 나도 사실 케인을 욕했는데….”
“신경 안 쓴다니까.”
“그렇다잖아. 김태현 선수. 사실 저는 파워 워리어 길마를 좀 욕했는데 용서해 주셔서 감사….”
“그건 안 되지 새끼야.”
태현은 넘어가려다가 정색했다.
넘어갈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 것이다.
“어?! 어!? 하, 하지만 방금은….”
“뭘 방금이야. 야! 이놈 붙잡아서 밖에 집어 던져 버려라!”
성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길드원을 끌고 나갔다. 이다비가 당황해서 말리려고 했다.
“저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아. 말하는 걸 보니 나중에 굶주린 혼돈 쪽으로 배신할 놈이군.”
“…….”
배장욱은 황당하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 * *
“지금 우리는 다른 교단의 전력이 사라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흡수하면서, 동시에 굶주린 혼돈의 관문도 파괴해야 한다.”
태현은 사람들을 불러놓고 퀘스트 설명을 시작했다.
워낙 대규모인 만큼 여러 파티장들이 다 퀘스트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물론 이런 만큼 밖으로 새어 나가긴 하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이용할 수 있다.’
“김태현! 지금 길드 동맹의 남은 성들이 있다. 사악하고 비열한 스미스 놈이 그곳들을 함락하려고 하고 있어!”
“맞아! 거길 구해야 해!”
길드 동맹 쪽 파티장들은 손을 들고 말했다.
전투에서 져서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갔지만 그렇다고 스미스가 순식간에 왕국을 장악한 건 아니었다.
길드 동맹의 남은 영주들과 랭커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격렬하게 버티고 있었다.
-네놈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잡놈한테 성을 줄 거 같냐! 꺼져라!
-김태현이 왔을 때도 버틴 곳이다!
스미스가 놀랄 정도로 길드 동맹의 영지들은 방어가 잘 되어 있었다.
누구 때문에 하도 지긋지긋하게 시달린 덕분이었다.
“길드 동맹의 남은 성이나 도시는 지금 중앙이나 동부 쪽 아닌가?”
“거길 구하러 가라니. 미친 짓 같은데.”
그러나 다른 파티장들은 부정적이었다.
지금 오스턴 왕국의 대부분은 굶주린 혼돈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길게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위험한 상황.
언제 어디서 기습받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걸 뚫고 쭉 달려서 남은 성과 도시를 구하러 가자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었다.
“하, 하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NPC들부터 아이템들까지 많은데….”
“정말 소중한 곳이라고!”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키운 성과 도시에 애착이 있어서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확보하면 이득이기도 했고.
…하지만 너무 가능성이 희박했다.
“교단 NPC들도 구할 수 있어!”
-사람은 죽는 법이지.
“……”
아크락스의 반응에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노려보았다.
뭐 저런 새끼가…!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아쉽지만 길드 동맹의 도시나 성은 포기한다.”
“크흑!”
“울지 마. 어쩔 수 없지.”
“스미스 놈한테 피땀으로 키운 도시를 넘겨줘야 한다니…! 김태현한테도 뺏긴 적 없는데!”
“그 마음은 이해하는데 지금 우리 노려보는 사람들 많으니까 김태현 언급은 하지 마!”
* * *
그렇게 모임이 일단락된 후, 태현은 은밀하게 몇몇을 불렀다.
각 파티에서 도적이나 암살자 직업을 가진 랭커들이었다.
“길드 동맹의 도시로 잠입해서 구출하려고 한다.”
“!!!”
태현의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아, 아까는 안 한다고….”
“그야 보는 눈이 많으니까. 지금도 견제가 많은데 그걸 방송에서 보면 얼마나 견제가 심하게 들어오겠냐.”
생방송으로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만큼 다른 식으로 역이용도 가능했다.
가짜 정보를 날리는 것이다.
지금 다음 퀘스트를 위해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해놓고, 태현은 조용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우리를 이렇게 따로 부른 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믿을 수 있어서구나…!”
“믿어줘서 고맙다. 김태현!”
랭커들은 감동한 눈빛으로 태현을 쳐다보았다.
누구 한 명이라도 입을 놀리면 새어 나갈 수도 있는데 이렇게 믿고 불러주다니.
‘…도적하고 암살자라서 부른 거지만, 해명하지 말아야겠군.’
태현은 좋아하는 걸 보니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었다.
“여기 길드 동맹 랭커들이 길을 안내해 줄 거다.”
“…….”
“…….”
원정대 랭커들은 길드 동맹 길드원들을 보고 매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길드 동맹 랭커들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보는 거냐?!”
“네놈들이 이제까지 한 짓을 생각해 봐라. 이렇게 쳐다보기만 하는 게 더 신기한 거지.”
“…….”
평소라면 성질을 냈겠지만 길드 동맹 랭커들도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건 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우리도 진심을 다해서 도울 거다. 지금 여기서 스미스와 그 패거리 놈들을 제일 싫어하는 게 누구일 거 같냐!”
“오….”
“제법…?”
원정대 랭커들은 살짝 감탄했다.
길드 동맹 길드원들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던 것이다.
절절한 호소력!
“난 반드시 스미스 놈의 계획을 방해하고 도시를 지키고 말 거다.”
길드 동맹의 성기사 랭커, 곤잘레즈가 이를 갈며 말했다.
쑤닝의 심복이기도 했던 그는 이번 전투에서 아끼던 갑옷을 뺏기기까지 했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김태현. 내 숨겨진 스킬들을….”
“잠깐. 미안한데 넌 못 와.”
“…???”
“넌 성기사잖아. 몸 느리고 둔해서 들켜.”
“……”
곤잘레즈는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그게 그렇게 되나??
“그, 그게. 어떻게 극복할??”
“극복이고 뭐고 지금 조용하고 은밀하게 들어가서 최대한 챙겨서 나올 생각인데 너같이 둔한 놈을 데리고 가면 안 되지….”
태현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성기사는 은신도 못 할 거고 이속도 느리고.”
“같이 못 가긴 하겠군.”
심지어 다른 길드 동맹 길드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 됐네. 곤잘레즈.”
“…야! 진짜 이러기냐!?”
* * *
정말 이랬다.
태현은 길드 동맹 랭커들 중 가볍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랭커들까지만 데리고 이동을 시작했다.
-이다비. 잘 부탁해.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태현 님 안 보여도 사람들은 또 이상한 폭탄 만들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걸요.
-…내…내가 그런 이미지였어?
[굶주린 혼돈의 어둠이 시야를 가립니다.]
“젠장. 평소 지나가던 길인데….”
“잠깐만 불 켜면 안 되나?”
필드에 나온 랭커들은 오랜만에 초보자가 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를 때 멋모르고 마을 밖에 나왔다가 밤이 찾아온 순간.
초보자한테 캄캄한 판온의 밤은 공포 그 자체였다.
-으헝헝! 마을로 돌아갈래! 마을로 돌려보내줘!
-뭐 이렇게 실감 나게 만든 거야!
그리고 지금 그런 밤이 주변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스킬이나 아이템을 써서 주변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태현은 그걸 엄격하게 막았다.
‘굶주린 혼돈이 어떻게 쫓는지는 몰라도, 스킬하고 아이템을 쓰는 건 좋지 않아.’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태현은 최대한 아끼고 싶었다.
추적이 붙어서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 얼굴을 가리고 이동하고 있는데….
“아. 길드 동맹 놈들 이름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이게 그러니까 음… 청룡단? 신검단? 웅매단? 아. 더럽게 어렵네. 그냥 1번단 2번단 3번단 하지.”
“그건 네놈들이 영어 같은 꼬부랑 글자를 쓰니까 그런 거다! 하나도 안 어려운 단어야!”
길드 동맹 랭커들은 발끈했다.
나름 길드 동맹 랭커들은 자기들 이름이 제일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룡단’이나 ‘주작단’, ‘웅매단’이나 ‘비룡단’같은 품위 넘치는 이름들.
물론 그중에는 ‘김태현척살단’ ‘김태현저격단’ ‘김태현암살단’ 같은 쪽팔리는 비공식 이름도 있긴 했지만….
“김태현. 이걸 꼭 외워야 하나?”
“외워야 해. 원래 이런 디테일에서 차이가 난다.”
태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일행은 아예 다 길드 동맹 길드원들로 위장하고 있었다.
태현이 여기 있는 것과, 길드 동맹 잔당이 여기 있는 건 그 주목도가 달랐다.
철저하게 길드 동맹 길드원으로 행동한다!
“크윽. 김태현이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청룡단 소속의… 김 마루오까다?”
“그건 중국 이름이 아니잖아 이 새끼야!”
“중국 이름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
“없어도 그렇지 저렇게 근본 없는 이름을 지으면 누가 속아! 김태현! 저놈한테 뭐라고 해줘!”
“어? 무슨 일인데?”
지도 보고 고민하고 있던 태현은 말다툼에 고개를 돌렸다.
“넌 뭘로 이름을 지었지? 저놈들한테 알려줘.”
“난 덩샤오핑이라고 지었는데.”
“그래! 저렇게 그럴듯하게… 아, 아니. 너무 그럴듯한 거 아니냐?”
“그럴듯한 게 좋은 거 아닌가?”
“그, 그렇긴 한데.”
태현의 화끈한 가명에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당황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어?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