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560화
“사실 지금 팀 KL은 그렇게 많은 선수들을 후보로 데리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 괜히 여기 입단하겠다고 다른 제안을 거절하시는 건 추천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태현의 솔직담백한 대답에 선수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억지를 부리진 않았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었으니까.
대신 태현에게 물었다.
“그러면 제게는 어느 게임단이 좋을까요?”
“…….”
“…….”
“잠깐. 김태현 선수. 이야기 좀 합시다.”
“어허. 이 사람… 왜 이러시나?”
“주최 측 권한으로 이야기 좀 하시죠?”
갑자기 우르르 달려들어서 태현을 데리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선수는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니….’
* * *
“설마 알 거 다 아는 분들이 자기네 게임단 추천해달라고 이렇게 부른 건 아니라 믿습니다?”
태현의 말에 사람들은 멈칫했다.
너무 아픈 곳을 정확하게 찔렸던 것이다.
“꼭… 그러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묻기 전에 혹시 모르는 게 있을까 봐 꺼낸 말이지.”
“저기서 물으면 서로 방해될 테니 이렇게 따로….”
그래도 아직 양심이란 게 남아 있는 심사위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에 비해 좀 더 솔직한 심사위원도 있었다.
“김태현 선수. 얼마 드리면 되겠습니까? 돈으로 드릴 테니까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
“…….”
다른 심사위원들은 <베이징 파이터즈> 스카우트의 화끈한 발언에 경악했다.
미쳤나!?
“농… 농담도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알 게 뭡니까! 돈으로라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당신들처럼 가만히 있어도 선수들이 굴러 들어오는 게임단과 우리 게임단은 다르다고! 우리 게임단은 어디서 사고 친 놈들만 자꾸 들어와!”
한이 맺힌 베이징 파이터즈 스카우트의 외침에, 다른 심사위원들은 반성했다.
‘조금 챙겨줄 걸 그랬나.’
‘베이징 파이터즈 이미지가 조금 그렇긴 하지….’
“어차피 주최 측도 중국 쪽인데 들킬 일도 없습니다! 김태현 선수. 이번 기회에 한 번….”
“이미 갔다.”
“…….”
베이징 파이터즈 스카우트는 태현이 사라진 걸 뒤늦게 깨닫고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에 있던 심사위원들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위로에 나섰다.
“음. 베이징 파이터즈도 나쁘지 않은 게임단이니까 분명 들어가려는 선수가 있을 걸세.”
“맞소. 베이징 파이터즈만의 장점이 있지 않소.”
“…그게 뭡니까?”
스카우트는 순간 솔깃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심사위원은 당황한 눈빛으로 주변을 쳐다보았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연봉이 높지!”
“…….”
선수들이 잘 안 와서 돈 비싸게 준다는 게 과연 장점인가?
* * *
“그럼 유성 게임단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게임단이란 게 아무래도 선수들하고 팀워크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유성 게임단 선수들과 제가 잘 맞을까 봐 걱정입니다. 이세연 선수는 어떤 선수입니까?”
“음… 지독하고 비열한 선수라고 해야 하나….”
“!??!”
태현의 말에 선수는 경악했다.
사실 이세연이 그런 선수였단 말인가!?
“그, 그런 사람이라면 절대 안 맞겠군요.”
“아니. 다른 선수들 대할 때는 공과 사 구분해서 아주 잘 대해주는 편입니다.”
“그러면 지독하고 비열한 선수가 아니지 않나요?”
“글쎄. 속마음이 지독하고 비열한 편에 속하지.”
“그런 게 드러나는 말을 한 적이 있나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
앞에 앉아 있던 선수는 슬슬 이상함을 느꼈다.
어라?
김태현 선수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에이, 그 김태현 선수가 설마 헛소리를 하겠어.’
“그러면 어떻게 아신 거죠?”
“눈빛만 봐도 지독하고 비열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게 느껴진달까?”
“…그, 그러면 추천은 안 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유성 게임단 좋아요. 게다가 같은 마법사이니 여러모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거고, 네크로맨서와 포지션이 겹치지도 않을 테니 주전 가능성도 높아질 겁니다.”
“이세연 선수가 다른 선수들의 질문에 잘 대답을 해주시나요?”
선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세연의 이미지는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에 가까웠다.
원래 같은 게임단이라고 해도 선수들끼리 가르쳐 주는 게 필수는 아닌 것이다.
과연 정말로 가르쳐 줄까?
“잘 대답해 주는 편이죠.”
‘…그러면 착한 사람 아닌가??’
말 친절하게 해주고 행동도 친절하고 가르침도 잘 주면….
그냥 착한 사람이잖아?
“유성 게임단에 가되 이세연 선수의 행동에는 일거수일투족 주의를 해야 나중에 기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과연….”
선수는 말을 듣다가 ‘혹시 김태현 선수, 이세연 선수한테 판온 1에서 진 것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너무 무례한 질문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 * *
“…….”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아니. 솔직히 아저씨가… 남을 줄은 몰랐는데요.”
태현은 황당한 눈으로 주봉식을 쳐다보았다.
주봉식.
김태산과 같이 게임을 시작한 오크 아저씨들 중 하나였다.
남들이 다 길드 생활할 때 주봉식은 혼자서 ‘청춘의 꿈을 이루고야 말겠다’ 하며 선수 생활에 도전!
다른 사람들은 ‘중년 다 되어서 그게 무슨 짓이냐’ 하며 말렸지만, 주봉식은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그 결과 놀랍게도 이 자리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중년 넘은 선수가 1부에서 뛰는 건 처음 아닌가?’
중년 선수들로 팀을 구성한 게임단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2부 이하에서 보이는 팀들이었고, 쟁쟁한 별들끼리 싸우는 1부 리그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태현은 주봉식을 칭찬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고생 많으셨습니다. 게임단에 들어가게 되면 후보들끼리 다퉈서 뚫고 올라가야겠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거죠. 어느 게임단을 생각하고 계세요?”
“베이징 파이터즈.”
“…예요?”
‘예?’랑 ‘왜요?’가 동시에 나오는 바람에 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주봉식은 그 말을 용케 알아들었다.
“주전에 올라갈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니까!”
“과연….”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베이징 파이터즈는 지금 주전 라인이 붕괴해서 새로 선수들을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이것저것 조합을 찾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오죽하면 팬들이 반쯤 체념한 채 포기할 정도였다.
-무슨 일 년에 12번도 넘게 주전 라인이 붕괴하냐?? 대나무 철근으로 지은 빌딩도 저렇게 붕괴하진 않겠다!!
-그냥 주전 라인의 의미가 없지 않냐? 룰렛 만들어서 매일매일 컨디션 좋은 놈 하나씩 골라서 내보내자!
-요즘 다른 팀들이 ‘베이징 파이터즈의 2군은 다른 팀의 1군과 비슷한 수준이라니 대단하네요’고 놀리는 거 암?
그런 만큼 주봉식처럼 화제성 높은 오디션을 통과하고 입단한 선수는 한 번쯤 올라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돈을 많이 주잖냐.”
“어? 돈 많으시잖아요.”
“내 돈과 별개로 무슨 제안이든 간에 돈 많이 주는 제안을 더 생각해야 하는 거야.”
“아저씨께서 다 고민하고 결정 내리신 거라면 더 말리지 않겠습니다. 힘내세요. 거기 이것저것 텃세 좀 있을 텐데.”
“후. 걱정하지 마라. 그런 거에 흔들릴 내가 아니니까.”
주봉식은 일어서서 외쳤다.
“베이징 파이터즈로 고르겠습니다.”
“…예요?!”
옆에 있던 스카우트가 깜짝 놀라 그렇게 반응했다.
* * *
“유성 그룹에서 나온다고!? 설, 설마 유성 게임단 3군으로 쓰려는 건가?”
“그건 아니랍니다. 유성 게임단 관계자가 아니라는데요.”
“뭐야. 다른 계열사야? 그럼 이런 다 망한 게임단에 뭔 관심이 있다고 찾아오는 건데?”
“글쎄요? 유성 게임단이 워낙 잘 나가니까 새로 하나 더 만들려는 거 아닐까요? 대기업 안에서 굴러가는 일을 저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구정 게임단은 한국의 흔한 중소 게임단 중 하나였다.
게임이 잘 나갈 때는 이런 게임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제법 E스포츠판에서 경력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그걸로 투자를 받은 다음 선수들을 모집!
정말 열정 있는 사람들이라면 낮은 가능성을 뚫고 자리를 잡겠지만, 세상에는 그런 것 없이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강재황과 주대한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예전에 쌓은 경력으로 투자를 따낸 다음 자기 주머니로 챙기려는, 반쯤 사기꾼들이나 마찬가지인 이들!
당연히 시설이나 훈련은 형편없었고 눈치 빠른 선수들은 다 도망친 상태였다.
그래도 나름 3부 리그나 다른 이벤트 대회에 출전한 경험이 있었으니 간판은 아직 쓸 만한 상태.
이 둘은 이 간판을 사용해 어떻게든 마지막 한 탕을 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유성 그룹 같은 대기업에서 관심을 가진다니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그런데 유성 그룹 같은 곳이면 나중에 항의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멍청하긴… 게임단도 아니라며? 총책임자는 나이 많아서 E스포츠 사업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담당자는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자기 책임이라 넘어갈걸. 우리가 받을 돈은 유성 그룹 기준으로 푼돈이라 일 크게 만들지도 않아. 걱정하지 마라.”
“과연…!”
둘은 잘 차려입고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곧 유성 그룹 쪽에서 온 사람이 찾아올 테니 잘 보여야 했다.
이런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겉모습!
외모, 복장, 건물 안팎 등등을 신경 써야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이다.
“…어, 너무 어리지 않아요?”
“동안인가 보지.”
“그래도 이상하게 어려 보이는데… 대학생 아닌가?”
“알 게 뭐야. 더 속이기 쉽겠네. 안내하자고.”
강재황은 주대한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옆구리를 한 번 찔렀다.
그러고는 다가갔다.
“환영합니다! 이거 참. 유성 그룹 같은 곳에서 저희 게임단에 관심을 가져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제까지 했던 고생이 헛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눈에 눈물이….”
강재황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 정도 연기는 바로 나올 수 있어야 했다.
유지수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고생이 많으셨던 모양이에요.”
“예. 아무래도 저희 같은 소규모 게임단은 자금이 열악하다 보니 대형 게임단에 비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저 때문에 고생한 선수들을 생각하면 눈에 눈물이….”
“그러시군요. 마침 소규모 게임단 운영하고 있는 분도 데려왔는데 같이 이야기 나누면 통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엇. 그렇습니까?”
강재황은 긴장했다.
같은 업계 사람이면 아무래도 사기를 칠 때 방해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
“…….”
둘은 입을 떡 벌렸다.
뒤에서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맞나? 맞군. 인사하고 있었어?”
유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둘을 소개해줬다.
“네! 이 두 분이 구정 게임단 대표님들이에요.”
“오. 그렇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구정 게임단이 괜찮은 선수단이라고 들었는데 안에 구경을 해도 괜찮을까요?”
태현의 질문에, 강재황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
“사실 저희 게임단은 양심적으로 다른 분들에게 추천하기 부끄러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
태현과 유지수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양심 고백?
‘새로운 협상 방법인가?’
‘밀당을 이렇게 하나요?’
주대한도 당황했는지 강재황에게 속삭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저러다 진짜 가면 어쩌려고요?!”
“보내려고 그러는 거야, 멍청한 자식아. 일 키우기 싫으니까!”
“그래 봤자 선수 한 명이잖아요! 그냥 구워삶으세요!”
“네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다.”
강재황은 저번에 한국판온협회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선수와 협회가 충돌 났을 때, 협회가 박살 난 경우는 생전 처음 들어봤던 것이다.
괜히 김태현이 구경했다가 ‘여기 뭔가 이상한데?’ 하면 끝장이었다.
“그렇게까지 겸손하시니 오히려 좀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가격을 후려치지 않을 테니 좀 보여주시죠.”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