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36화
“지금 웃으시는 겁니까?”
“그러면 저 상황이 안 웃기나?”
“솔직히 웃기긴 합니다.”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 상황에서 팀 KL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긴 선수를 꿈꾸는 입장에서 팀 KL 들어가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는 완벽한 팀.
성적도 성적이지만 선수의 복지가 거의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게임단 입장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터치 안 하고 선수들에게 나눠주는 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짓이었던 것이다.
자선봉사하는 게 아니라 사업하는데 저게 뭐하는 짓인가.
무엇보다 열 받는 건 팬들이나 선수들이 팀 KL 소문 듣고 ‘여기는 그렇게 안 해줘요?’ ‘완전 악덕기업이네 ㅡㅡ’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다른 게임단보다 분명히 더 조건 좋은 편인데도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소문에 따르면 팀 KL 때문에 1부 게임단들 선수 대우가 상향평준화되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다들 차이가 커서 정확히 확인하기는 힘들었지만, 매킨리가 보기에는 꽤 그럴듯한 말이었다.
궈아이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말문이 턱 막혀서 한동안 머뭇거렸다.
“아니… 그… 보십시오. 장원상 선수.”
궈아이오는 간신히 침착을 되찾았다.
“꿈은 크게 가지는 게 좋다! 이걸 제가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장원상 선수. 현실은 따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팀 KL이 선수들을 얼마나 영입했습니까? 0명입니다. 0명. 이번 판온 올스타 슈퍼플레이어에서 김태현 선수가 막 데리고 가고 싶어한 선수가 있었습니까?”
“그건 아니긴 해요.”
장원상은 시무룩해졌다.
확실히 그건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장원상도 꿈이 팀 KL인 거지, ‘팀 KL에 못 들어가면 게임 접겠다’ 정도는 아니었다.
꿈과 현실 정도는 따로 놓고 보는 것이다.
“이해해 주시니 정말 잘 됐습니다. 자. 그렇다면 베이징 파이터즈가 현재 가장 좋은 선택이란 걸 아시겠지요? 장원상 선수. 저를 믿고 솔직하게 말해주시죠. 지금 다른 게임단 관계자들 중에 먼저 접촉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그거 보세요! 그만큼 베이징 파이터즈에서 장원상 선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단 뜻입니다. 다른 게임단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저희는 행동에 나선 겁니다.”
뒤에서 듣고 있던 매킨리가 이를 갈았다.
“저 자식이….”
치사하게 주최 측에 정보 받아서 먼저 와놓고 저딴 소리를 하고 있으니 분노가 치솟았다.
뻔뻔하기가 아주….
“저대로 두고만 보실 겁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저희가 나서서 끼어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원래 게임단 관계자들끼리 직접적으로 다투는 건 암묵적으로 피하는 편이었다.
서로 업계에서 볼 일 많은데 굳이 억지로 힘싸움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예외.
한쪽이 치사하게 앞서나가려고 한다면 이쪽도 상황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기다려봐라.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
비서는 의아해했다. 매킨리가 아까부터 스마트폰만 연신 내려다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달칵-
“김태현 선수!! 여깁니다!!”
“풉!”
“컥!”
매킨리 옆에 있던 비서뿐만 아니라 카페에 있던 전원이 놀랐다. 궈아이오와 장원상은 아예 마시던 커피를 뿜을 정도였다.
“김, 김태현 선수? 정말 김태현 선수 맞습니까? 팬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제… 제가 뭐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뭐 해드릴 게 없….”
“음료 주문 받아주시면 될 것 같은데요.”
태현은 간단한 즉석 사인회를 연 다음 매킨리한테 다가왔다.
“흠… ‘완전초대박정보너만오면고’라고 문자를 보내주셔서 왔는데. 뭡니까?”
매킨리가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라서 일단 왔는데, 태현 입장에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완전초대박정보가 뭐길래?
“김태현 선수! 우연입니다!”
“우연은 무슨 그쪽이 불렀…?”
“아니! 궈아이오 씨! 여기 계셨습니까!? 이런 우연이!”
“…….”
궈아이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매킨리만 있어도 계획이 꼬이는데 김태현까지 여기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반갑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두 분 다 한국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왜 한국 카페에서 만나고 있지?”
태현은 신기하다는 듯이 둘을 쳐다보았다.
매킨리나 궈아이오나 둘 다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왜 여기서 만나는지 신기했던 것이다.
“저 한국 음식 좋아합니다.”
“…저도 좋아합니다.”
궈아이오도 일단 매킨리의 변명을 따라 했다.
차마 ‘판온 올스타 슈퍼플레이어 정보 미리 듣고 선수 빼가려고 왔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매킨리는 궈아이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졸렬하고 치사한 사람이었다.
“한국 음식 뭐 좋아하는데요? 치킨 피자 김밥 떡볶이 갈비 냉면 김치찌개는 다 빼고 이야기합시다. 셋. 둘. 하나. 에이. 좋아하는 거 없으신 것 같은데?”
‘아니 뭐 이런 양반이…!’
궈아이오는 훅 들어오는 매킨리의 말에 당황했다. 그는 다급하게 떠오르는 아무 음식이나 말했다.
“저는 그… 뭐더라, 청국장찌개 좋아합니다.”
“오… 신기하네요. 외국에서 오셨는데. 아버지가 좋아하는 청국장집이 있는데, 거기 소개해드릴 테니까 한 그릇 드시고 가세요.”
태현은 친절하게 말했다.
해외에서 한국을 찾아온 손님인 만큼 이런 건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저 식사를….”
“안 하셨다면서요?”
장원상 선수가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말했다.
아까 이야기하면서 아직 식사 안 했다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 했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저런. 대화 끝나면 안내해 드릴 테니까, 그때 식사하시죠.”
매킨리는 속으로 낄낄댔다.
청국장이 뭔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우연히 김태현 선수도 이렇게 만났는데,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합시다.”
매킨리는 궈아이오가 반응하기도 전에 재빨리 엉덩이를 밀고 의자를 붙였다.
순식간에 세 게임단 관련자들이 자리에 모인 곳이 됐다.
장원상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태현을 보고 말했다.
“김태현 선수. 정말 팬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이야….”
“아. 그러셨군요. 포지션이 어떻게 되시죠?”
“탱커입니다. 그래서 케인 선수를 많이 보고 배우고 있….”
“…롤모델이라면 다른 선수가 낫지 않을까요?”
“!?”
그렇게 태현과 장원상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매킨리와 궈아이오는 2라운드를 붙고 있었다.
“이야. 선수 개인 정보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
“그러는 매킨리 씨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저야 장원상 선수한테 직접 들었지요! 심사위원이니까! 그런 궈아이오 씨는?”
“저… 저는….”
아무래도 궈아이오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장원상도 듣고 보니 신기했는지 궁금해했다.
“그러고 보니 제 연락처는 어디서 구하셨어요?”
“기… 기억이 잘….”
“뭐 스팸으로 중국에 유출된 개인정보라도 사셨나 봅니다?”
“아니 말씀이 좀….”
매킨리는 궈아이오의 말을 못 들은 척 하고 말을 돌렸다.
“장원상 선수. 사실 저희도 장원상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올스타 슈퍼플레이어도 좋게 보고 있었고, 김태현 선수한테 추천의 말도 들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예.”
순식간의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뉴욕 라이온즈나 베이징 파이터즈나 모두 1부 리그에서 뛰고 있는 초대형 게임단이었지만, 아무래도 선수 입장에서는 중국보다는 미국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김태현의 이름까지 섞어 넣자 어감부터가 다르게 느껴졌다.
‘당했다…!’
궈아이오는 매킨리가 왜 바로 안 끼어들고 김태현을 불렀는지 깨달았다.
매킨리가 바로 끼어들었다면 싸움은 뉴욕 라이온즈 vs 베이징 파이터즈의 구도로 팽팽하게 굴러갔을 것이다.
뉴욕 라이온즈의 이미지가 좀 더 좋긴 했지만 어차피 둘 다 대형 게임단.
장원상 입장에서는 둘 다 똑같은 부류로 보였을 테니 나름 대결이 팽팽하게 굴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김태현을 데리고 오자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분위기가 저쪽에 쏠려버렸다.
‘후후. 궈아이오. 네 패배다.’
매킨리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분위기를 보니 거의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뉴욕 라이온즈 선수들 엄청 많지 않습니까?”
“그렇죠?”
태현의 질문에 매킨리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장원상 선수는 무엇보다 주전으로 뛸 기회를 많이 원하는 것 같던데요. 안 그렇습니까? 주전으로 뛸 기회가 많이 올까요? 뉴욕 라이온즈는 주전 선수층 너무 두터워서 힘들 것 같은데.”
“어….”
생각지도 못한 태현의 역습에 매킨리는 허를 찔렸다.
그 말에 장원상은 살짝 겁먹은 표정이었다.
“역시 뉴욕 라이온즈는 선수들이 많아서 주전 뚫기가 힘들까요?”
“아닙니다! 장원상 선수. 장원상 선수가 노력한다면….”
“물론 노력도 중요하지만 상황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주전 선수들이 잘나가는 이상 2군 선수들은 기회를 받기가 사실상 힘들잖습니까. 다른 중소 대회 나가서 경험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1부 리그에서 뛰는 것보다는 훨씬 적을 거고.”
“김태현 선수…!”
매킨리는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태현을 불렀다.
같이 대회 진행하면서 쌓은 우정을 떠올려달라는 외침이었다.
그러나 태현은 이런 부분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었다.
“장원상 선수는 연봉이나 대우 같은 게 좀 더 낮더라도 주전으로 더 뛰고 싶죠?”
“예!”
“그러면 좀 더 고민해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궈아이오가 갑자기 기운을 되찾아서 외쳤다.
“그렇다면 저희 베이징 파이터즈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베이징 파이터즈의 주전 선수 라인은 완전히 초토화 상태입니다. 누가 주전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장원상 선수의 실력으로 충분히 주전이 될 수 있습니다!”
“…….”
“…….”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제야 궈아이오는 자기가 한 실수를 깨달았다.
흥분한 탓에 하면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지금 궈아이오 씨가 말한 것처럼 아예 선수 라인이 붕괴해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표류하는 팀도 좀 말리고 싶습니다.”
태현은 냉정하게 잘랐다.
뉴욕 라이온즈처럼 너무 잘나가서 후보가 올라가기 힘든 팀도 위험했지만, 베이징 파이터즈처럼 선수층 붕괴해서 오늘내일 주전후보 뒤집어지는 팀은 그것대로 위험한 것이다.
매킨리가 울먹이면서 하소연했다.
“김태현 선수. 여기 있는 두 게임단을 다 퇴짜 놓으시면… 둘 중 하나는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듣고 있던 태현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장원상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2부 리그 상위권 팀들은 관심 없으십니까? 대우는 크게 차이 안 날 거고, 주전으로 나가기는 더 쉬울 겁니다.”
“관, 관심 있습니다! 기회만 주신다면!”
“LK 갤럭시나 토론토 메이플베어즈 같은 팀들 쪽에 한 번 연락해서 물어보죠. 장원상 선수는 실력 있는 사람이니까 그쪽에서도 좋아할 겁니다. 아까 베이징 파이터즈에서 얼마나 불렀어요?”
태현은 액수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 정도는 받을 수 있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명 후보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장원상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마워했다.
매킨리와 궈아이오는 허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뭐하실 겁니까?”
“…우린 그냥 청국장이나 먹으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