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35화
“좀 심한 거 같아요!”
이다비는 착했다. 이세연이 간절하게 말하자 일단 따라주고 봤다.
“그래? 심한가?”
“그래!”
“넌 닥치고 있어.”
브리그스는 동의했다가 태현의 말에 움찔했다.
차갑게 한 마디씩 던지는 게 오히려 살벌하게 협박하는 것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다.
“시간은 충분히 끈 것 같습니다. 이제 처리해도 될 것 같은데요….”
류다영까지 말하자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태현은 브리그스를 그대로 붙잡고 치명타를 넣었다.
그냥 끝내는 게 아니라 넘어뜨린 다음 짓밟으며 치명타 넣기!
보던 케인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렇게 하면 딜이 더 들어가?”
“아니. 기분이 더 나쁘지.”
“…….”
케인은 순간 오싹했다.
‘진짜 까불지 말아야겠다.’
평소에 태현이 얼마나 화를 안 냈는지 실감이 될 정도였다.
* * *
사람들에게 눈이 달려 있는 이상 방금 경기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평소랑 좀 다르지 않나?”
“그러게?”
무슨 원수라도 진 것처럼 브리그스를 박살 내는 태현의 모습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난 이해가 간다. 김태현도 사람이지. 브리그스가 경기 시작하기 전에 얼마나 입을 털었냐?”
“아…!”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이해가 간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영국대표팀은 경기 전에 어그로를 끄는 게 일상화가 된 팀.
이제까지는 이겨서 그 뒷감당을 하지 않아도 됐지만, 지면 몇 배로 더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브리그스 같은 경우는 유난히 입을 놀린 편 아닌가.
“브리그스가 뭐라고 했더라? 김태현 무시했나?”
“바보들아. 김태현이 자기 무시한 걸로 화내겠냐?”
“그러면….”
“케인을 무시해서지.”
“과연!”
보고 있던 팬들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논리가 완벽했던 것이다.
브리그스야 한국 선수들을 거의 다 깠지만 그중 케인을 깐 게 가장 주목을 많이 받았다.
워낙 조목조목 깐 만큼 사람들의 기억에도 케인 디스가 가장 선명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태현은 이다비 관련해서 인맥빨이라고 욕한 것에 분노한 거였지만….
-김태현 선수는 언제나 냉정하게 플레이하던 선수였는데, 상당히 의외입니다. 저런 식으로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는 않았는데요?
-아마 브리그스 선수가 사전에 한 인터뷰 때문에 저렇게 대응하는 것 같습니다. 김태현 선수도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까는 분명 김태현 선수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할 사람이 아니라고….
-앗! 지금 다시 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세 번째 격돌.
그러나 브리그스의 부활 동선이 꼬인 데다가 한 번 기세가 무너진 영국대표팀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5인 딜러처럼 극단적인 공격의 팀은 기세를 타면 어떤 상대도 위협할 수 있었지만, 한 번 무너지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접한 모습을 보여주기 마련.
추태를 보여주며 다시 한번 전멸하자 대회를 보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체 어떻게 본선 진출한 거임? 저기 올라온 조는 다 저렙들만 모여 있었나??
-그렇게 자신감 있게 입 털었으면 뭐라도 보여줘야지. 이게 뭐하는 짓이냐! 너희들한테 기대한 내가 부끄럽다!
-그러니까 한국대표팀 같은 상대한테는 입 적당히 털어야 한다고. 이렇게 되잖아. 얼마나 망신이냐.
-그냥 영국대표팀 하지 말고 프랑스대표팀 하면 안 돼?
-브리그스 프랑스 게임단에서 뛰고 있으니 사실 프랑스 선수라고 하자고. 영국의 수치야.
악당 역할도 실력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
실력 없는 악당은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았다.
지금 구도는 깝죽대는 영국대표팀을 한국대표팀이 묵직하게 혼내준 구도 그 자체.
태현이 브리그스 상대로 보여준 거친 공격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김태현이 그럴만 했지’ ‘팀원을 건드리니까 저러는 거 아닌가?’ 같은 호평을 들을 정도!
마지막 라운드까지 마친 이세연은 바로 인터넷 게시판부터 켰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무난히 잘 이겼잖아? 왜 그래?”
“너 욕먹고 있을까 봐 걱정한 거거든!?”
1라운드 압승하고 2라운드 때도 상대가 워낙 정신이 탈탈 나가 있어 위기감은 들지 않았다.
하면서 ‘아 김태현 욕 먹고 있으면 어떡하지? 뭐라고 설명하지?’라고 고민했을 뿐.
그러나 이세연의 걱정보다 세상은 훨씬 더 따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국대표팀을 비웃고 태현을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세연 선수 걱정이 너무 쓸데없는 거 아닌가?”
케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태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세연 기준이야 판온 1 때일 테니까,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하지.”
이세연한테 태현은 여전히 판온 1 때의 이미지가 좀 강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저런 짓을 했을 때 욕먹는 게 아닌가 걱정해 준 거겠지.
하지만 이세연은 태현 곁에서 직접 대하느라 태현의 이미지가 달라진 걸 잘 느끼지 못할 때가 있었다.
태현의 이미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모범적이고 견실했던 것이다.
“나도 내 이미지가 이렇게 탄탄한 게 신기할 정도야.”
선수로서는 최고 중 하나로 꼽히고, 게임단 대표로 놓고 보면 선수들한테 정말 아낌없이 퍼주는 대표였다.
팀 KL 선수들이 인터뷰 때 말하는 수익 배분 이야기만 들으면 기자들 입에서 ‘어 그럼 게임단은 돈 안 가져가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으니까.
게시판에 태현이 어떠냐고 질문이 올라오면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판온 최고의 딜러!
-팀 KL의 소년가장.
-근데 선수들한테 그렇게 퍼주면 김태현은 대체 뭐가 남는 거지?
-선수들이 남습니다….
-케인 같은 선수 남아봤자 별 볼 일 없지 않나?
-너 어디 사는 새끼냐??
-아니. 이건 좋은 지적이야. 팀 KL 팬들이 자꾸 쉴드를 치는데 솔직히 일류 선수들 좀 영입해 오자고. 내가 이세연 사오자는 게 아니잖아. 좀 비싼 선수 사오면 안 돼?
-김태현 성격에 동고동락한 선수들 절대 안 버리지.
-동고동락…? 즐거움을 같이 한 건 알겠는데 괴로움은 뭘 같이 했냐? 김태현이 처음부터 게임단 만들어서 버스 태워주지 않음? 자기 사비 털어서 월급 줬다던데.
-근데 그런데도 지가 밥을 안 해먹고 사장님한테 밥을 해달라고 한 거야?? 진짜 어떻게 방출을 안 당한 거지??
“흠… 아니. 생각해 보니 케인 너 때문 같기도 하고…?”
케인은 그 말에 살짝 감동 받았다.
맨날 태현이 ‘아 넌 왜 혼자서 다섯 명을 못 죽이냐’ 구박을 했지만, 나름 생각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냐?”
“그래. 네가 하도 욕을 먹어서 내가 좀 이미지가 좋아진 거 같아.”
“…….”
그런 뜻이었어?
옆에서 듣던 이다비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태현 님은 이미지 좋으신 게 당연하죠.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이다비. 그런 말 들으면 내가 너무 부끄러우니까 그러지 말아줄래? 누가 들으면 팀 KL 대표가 협박해서 그렇게 말하는 줄 알 거야.”
“그렇지만….”
이다비는 매우 억울하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당연하지 않아요?”
“어….”
케인은 순간 멈칫했다.
어제 태현한테 당했던 지옥훈련이 순간 떠오른 것이다.
“김태현 선수. 케인 선수 방금 망설였습니다. 분명히 봤습니다.”
“응. 나도 봤다.”
“잠, 잠깐. 아니야!”
* * *
-김태현, 팀원을 모욕한 선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김태현, ‘케인은 최고의 선수, 브리그스의 말은 무례해’
-불꽃처럼 뜨거웠던 김태현의 리더십… 동료 케인 선수를 향한 모욕에 분노….
“와. 진짜 이런 선수 하나만 건지면 좋겠는데.”
“바랄 걸 바라십쇼.”
뉴욕 라이온즈의 스카우트 총괄팀장 매킨리.
그는 지금 비서들과 함께 현장에 나와 있었다.
스카우트가 현장에 나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선수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그런데 이렇게 미리 접촉해도 되는 겁니까?”
“이봐. 세상에 안 되는 건 없어. 안 들키면 그만이지.”
판온 올스타 슈퍼플레이어.
여러 중국 대기업들이 후원하고 쑤닝 길드가 주최해서 대박을 친 이 오디션 프로그램도 점점 후반을 향해가면서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여러 게임단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유는 게임단 홍보도 있었지만, 재능 있는 선수들에게 접촉하기 쉽다는 이유도 컸다.
생각해 보라.
재능 있는 원석 같은 선수들에게 심사위원 자격으로 쉽게 접근해서 친분을 쌓고 게임단으로 초대할 수 있는 위치라니.
누구나 겉으로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배고픈데 뭐 좀 먹고 가면 안 됩니까? 저기 포장마차 냄새가 그럴듯한데.”
“저 떡볶이는 너한텐 매워서 안 돼.”
“한국인들은 뭔 놈의 음식이 다 그리 매운 겁니까? 그런 걸로 훈련해서 게임을 잘 하나?”
“그보다는 PC방이… 잠깐.”
비서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던 매킨리는 깜짝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한국 경찰도 흑인 보면 총부터 겨누나요?”
“저놈 저거 베이징 파이터즈 스카우트 궈아이오 아니냐?”
비서는 매킨리의 기억력에 혀를 내둘렀다.
중국 게임단의 일개 스카우트까지 기억할 줄이야.
“그렇게 들으니 그런 거 같기도 합니다.”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이야기 할 때가 아니야! 따라와!”
매킨리는 모자를 푹 쓰고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놈은 심사위원에 참가도 안 한 놈인데 이렇게 올 줄이야. 중국 놈들 진짜 비겁하고 더러운 놈들이군!”
매킨리는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판온 올스타 슈퍼플레이어는 중국 쪽이 주최하고 있는 상황.
베이징 파이터즈 같은 중국 게임단은 그 사이가 친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주최 측에게서 정보를 얻고 미리 접촉하기 위해 이렇게 나온 게 분명했다.
“이런 젠장….”
“근데 우리도 미리 접촉하려고 했잖습니까.”
“우린 선수한테 정보 듣고 미리 접촉하려고 한 거고 저놈들은 아예 반칙을 쓴 거잖나!”
뻔뻔한 매킨리의 태도에 비서는 감탄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대형 게임단 총괄팀장 하는 걸까?
둘은 조심스럽게 궈아이오를 미행했다.
잠시 후 궈아이오는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
“저기… 장원상 선수입니다!”
장원상.
이번 판온 올스타 슈퍼플레이어에 참가한 플레이어 중 하나로, 꽤 잠재력이 엿보이는 편이었다.
성적이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매킨리는 몇 가지 지표로 장원상이 갈고 닦으면 빛을 발할 원석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지표입니까?”
“김태현 선수한테 물어봤다.”
“…….”
비서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농담한 거다. 멍청한 놈아. 설마 이런 중요한 일을 김태현 선수 말만 들었겠나?”
“너, 너무 리얼하게 말하셔서….”
“물론 김태현 선수의 말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장원상 선수의 지표는 상당히 훌륭해.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주고….”
둘은 카페로 들어가 뒷좌석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궈아이오는 아주 유창한 한국어로 장원상 선수를 홀리고 있었다.
-이건 정말 기회입니다. 장원상 선수. 중국 리그의 연봉이 전 세계에서 손꼽힌다는 거 알고 계시지요? 베이징 파이터즈는 그중에서도 일류 중의 일류입니다. 이런 게임단에 들어올 기회는 흔히 오는 게 아닙니다. 장원상 선수. 기회를 잡으셔야 합니다.
데뷔 못한 선수에게 저런 말들은 커다랗게 와닿을 수밖에 없는 상황.
매킨리는 이를 갈았다.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다니…!’
“근데 저….”
“예. 말씀하세요. 장원상 선수.”
“저는… 그 팀 KL에 들어가고 싶은데….”
“…….”
상상 밖의 말을 들은 궈아이오는 정색했다.
매킨리는 뒤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