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400화
“지금 깨어나면 안 되지 않나요?”
“…그렇지.”
태현은 이다비와 함께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게다가 그냥 깨어나는 게 아니었다.
굶주린 혼돈으로 오염된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상태가 멀쩡할 리가 없겠지?’
[카르바노그가 미친 사람이 굶주린 혼돈의 기운을 받아들이면 제정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참신한 이론이긴 한데 그걸 기대하진 말자.’
쿠르릉!
경주장의 바닥이 쩍쩍 갈라지더니 안에서 거대한 굉음과 함께 전차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유령 페가수스들이 이끄는 화려한 고대 제국의 전차!
그리고 그 전차 위에 타고 있는 건 위풍당당한 왕자였다.
-너는….
왕자는 태현을 발견하고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태현과 이다비도 동시에 긴장했다.
과연 고대 제국의 왕자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경기에서 다른 쓰레기 같은 상대들을 두 명이나 탈락시키고 멋지게 우승한 것처럼 생긴 모험가로군.
“…….”
“…….”
태현과 이다비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대체 뭘 보고 알아차린 거야?
-하지만 아직 멀었다. 더 빨라져야 하느니. 수많은 적들과 싸워 이길수록 강해질 것이다.
“감… 감사합니다?”
왕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넘어가나?’
그러나 태현의 예상은 틀렸다.
왕자가 벼락같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콰르르릉!
거대한 천장에 부딪히자 그 두꺼운 암반이 그대로 모래처럼 부서져나갔다.
어마어마한 파괴력이었다.
-가자! 가자! 더 빨리 달리려무나!
전차의 바퀴가 돌고 유령 페가수스들이 힘차게 울부짖자 암반은 순식간에 뚫려나갔다.
“…잠깐. 저거 왜 밖으로 나가는 거지?”
* * *
쾅!
하늘섬 경주를 위해 오순도순 줄 서 있던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렸다.
지하에서 솟아 나오는 위풍당당한 전차!
“??”
“어. 이벤트인가?”
“와. 여기 도시 이벤트 잘하네. 저런 이벤트도 해주고.”
-모두 도망쳐라!!!
하늘섬 경비병들이 소리치고 나서야 플레이어들은 이벤트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 이벤트가 아니었어?!”
“저게 뭐하는 놈인데?”
-진정하라, 나의 신민들아! 나는 너희들의 주인이다!
왕자가 그렇게 외쳤지만, 웬 미친 언데드가 나타나서 칼을 휘두른다고 해서 권력 체계가 성립되는 건 아니었다.
권력은 대다수의 시민들에게서 위임받는 것이지 택도 아닌 언데드의 칼춤에서 나오는 게 아닌 것이다.
-미친 언데드다!
-공격해! 지원을 불러와!
-이런 어리석은 놈들. 내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한단 말이냐!
왕자가 아무리 말한다 하더라도 도시의 경비병들은 바로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분노한 왕자는 자신이 누군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나, 페르소텔턴이 누군지 보여주겠다. 보아라!
[가장 빠른 왕자, 페르소텔턴이 <제국 쾌속의 진격>을 사용합니다!]
콰르르르르릉!
순간 왕자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어마어마한 빠르기로 주변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 궤도에 있던 건물들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되어버렸다.
-으아아악! 미친 언데드다!!
-어디서 저런 놈이 나온 거야!
아무리 말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경비병들의 모습에 왕자는 더더욱 분노했다.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냐. 모험가 놈들아! 내게 무릎을 꿇지 못할까! 나를 감히 일어서서 쳐다보다니!
“아. 아니. 당신이 누군데….”
“일단 엎드리고 보자!”
플레이어들은 경비병보다 눈치가 빨랐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한 번에 도시를 갈아버릴 정도면 일단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 바로 이게 올바른 태도인 것이다.
-왕자 전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뒤늦게 장로들이 달려왔다.
슈라익 장로와 크라스비 장로였다.
하늘섬의 두 장로들은 갑자기 깨어난 왕자의 모습에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오! 너희는 누구냐!
-저희는 왕자 전하의 무덤을 지키기로 맹세한 가문의 후손입니다. 왕자 전하! 무덤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슨 건방진 소리냐. 감히 내게 무덤으로 돌아가라니! 용서할 수 없는 망언이다!
-왕자 전하께서는 가장 빠른 후계자를 찾으시고 싶어했지 이렇게 일어나서 도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다!
-맞습니다!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지금 굶주린 혼돈이 왕자 전하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는 겁니다!
두 장로의 애타는 말에도 왕자는 코웃음을 쳤다.
-나는 아주 멀쩡하다. 굶주린 혼돈이라니!
원래 미친 사람치고 자기가 미쳤다고 인정하지는 않는 법.
왕자는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내가 이렇게 깨어났으니 이 도시 또한 다시 내가 다스려야겠다. 느려터진 모험가 놈들과 백성들에게 진정한 빠름이 무엇인지 알려줘야겠구나!
-…왕자 전하를 공격해라!!!
-모두 전하를 막아!
<페르소텔턴의 폭주-고대 제국 퀘스트>
고대 제국의 왕자, 페르소텔턴은 평생을 굶주린 혼돈과 싸운 전사였다.
그는 명예롭게 죽고 후계자를 위해 자신의 무덤을 남겨놨지만, 사악한 굶주린 혼돈은 왕자의 시신을 타락시켜 놓았다.
명예로운 왕자를 위해 그를 무덤으로 돌려보내라!
보상: ?, ???, ???
[긴급 도시 퀘스트가 추가됩니다!]
[퀘스트가 완료될 때까지 도시의 모든 시설 이용이 중지됩니다!]
[……]
[……]
[……]
“…!”
갑작스럽게 나오는 퀘스트창에 도시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보스 몬스터의 출현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기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여기 지금 랭커들만 수십 명 있지 않나?’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 같은데?’
“내가 먼저 간다!”
하늘섬에 와 있던 신진 랭커, 가럼이 나섰다.
단단한 방패검사 직업으로 최근 PVP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플레이어였다.
“가럼이다!”
“가럼! 가럼!”
가럼은 손을 들며 뿌듯해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줄 때만큼 뿌듯한 때가 없었다.
노력해서 레벨 올리고 명성 쌓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런 환호성을 위해서였다.
-너는….
“한 번 붙어보자, 왕자!”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낸 적이 한 번도 없는 쓰레기 주제에 감히 내게 대결을 신청해!? 이런 건방진 찌꺼기 놈이!!
[왕자가 극도로 분노합니다!]
[<제국의 천벌>을 사용합니다!]
콰르르르르릉!
가럼이 반응하기도 전에 왕자가 분노해서 전차로 가럼을 갈아버렸다.
방패를 든 가럼은 바로 로그아웃당했다.
“…….”
“…….”
그러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직 왕자의 수준을 모르는 플레이어들도 한 번의 공격에 파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거….’
‘보통이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랭커를 한 방에 즉사시키는 보스 몬스터는 상대하기 꺼려졌다.
지금 플레이어들이 잡을 수준이 아니라는 뜻 아닌가.
한 700, 800은 가볍게 넘기는 것 같아 보이는데….
* * *
방송을 킨 파렐은 그래도 살짝 기대했다.
물론 멋진 장면은 찍기 힘들었지만, 무려 뒤에 김태현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파렐. 난 널 응원한다. 네가 퀘스트를 말아먹을 때도 응원했지만 이건 좀 아닌 거 같다. 네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해야지.
-이건 뭐하는 듣보잡임? 이름에 김태현 넣으면 다 봐줄 줄 아나?
-듣보잡 아니거든요? 대단한 랭커임.
-이름 들어본 적도 없는데 뭔 자칭 랭커냐?
-김태현 그래서 어딨음?
파렐이 생각하는 것보다 판온 시청자들은 많이 질려 있었던 것이다.
플레이어들의 사기 행각에!
김태현과 같이 한다고 해놓고 동명이인이라고 우기거나, 아니면 김대현을 데리고 오거나, 그도 아니면 진짜 김태현 비슷한 분장을 한 다음 얼굴에 가면 씌워서 김태현이라고 우기거나….
솔직히 태현이 마음 먹고 고소했으면 사칭죄로 여럿 잡혔을 수준이 많았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태현의 이름을 빌려오는 것에 엄격했다.
“아니, 김태현 사칭이 아니야! 내가 그럴 놈으로 보이냐!?”
-원래 다 처음이 어렵지.
-사칭하는 놈이 한둘도 아니었고….
“뒤를 봐! 뒤를 보면….”
파렐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태현과 이다비가 왕자의 뒤를 쫓아 빠르게 위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같이 가자고!”
파렐은 허겁지겁 내달렸다.
-파렐 씨… 너무 추하지 않습니까….
-작작 하자 파렐아.
“저기 김태현 있잖아! 저기!”
-김태현 원래 하늘섬에 있었음. 자기 팀 선수들하고 같이 있느라.
-와. 그걸 이용해서 사기치는 거야?
파렐은 분통이 터져서 죽을 지경이 됐다. 그는 빠르게 달려가서 태현한테 말했다.
“김태현 선수! 나하고 같이 퀘스트 깼다고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음? 아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저기 왕자를 보라고. 미쳐서 날뛰고 있어.”
“지금 그럴 때란 말입니다!!”
파렐은 울기 직전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수상해했다.
-지금 김태현한테 말 맞춰달라고 진상 떠는 거 아니냐?
-와.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너무한데.
-작작 해라 좀. 김태현이 동네북임?
“저 왕자를 어떻게 해야 하지?”
“경주로 승부 걸어봐야 할까요? 그냥 잡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경주도 솔직히 가능성이 적어 보이지 않나? 아무리 낭티오네가 단단하다고 하더라도 저 전차랑 정면승부하면 몇 대는 부러질 것 같은데.”
-키잇. 키잇.
낭티오네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 모습이 워낙 불쌍해 이다비도 살짝 미안해졌다.
“…그러면 흑흑이 타고 싸우시면 어때요?”
“흠. 그건 괜찮을지도….”
-주인님!?!?
“농담이야… 누굴 타든 죽을 가능성은 높아 보이는데.”
왕자의 경주법은 환상에서 봤던 것처럼 격렬했다.
태현처럼 노리고 상대를 조지는 게 아닌데도 한 번 부딪히면 갈아버리는 수준.
“김태현 선수! 우리 같이 퀘스트 했잖아요!!! 제발!”
“너 왜 자꾸 그러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합니다!!”
“그래. 우리 같이 퀘스트 했어. 됐냐?”
“보셨죠? 여러분??”
-아무리 봐도 마지못해 해주는 거 같은데….
-김태현이 불쌍해서 해준 거 아님?
-김태현도 진짜 힘들겠다. 얼굴 팔려서 가는 곳마다 저런 진상들 따라올 거 아님.
“아 아니라고!!!”
파렐은 뒷목을 잡기 직전이었다.
그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 * *
-가소로운 놈들 같으니!
왕자는 경비대장을 한 번의 공격으로 꺾어버린 다음 외쳤다.
-도시의 문을 닫아라!
쿵!
-앞으로 도시는 내가 다스리겠다. 첫 번째 규칙을 발표하겠다. 느린 놈들은 사형이다!
“…….”
“…아니 뭐 저런 참신하게 미친 새끼가 다 있어?”
잡을까 말까, 도망칠까 말까 고민하던 플레이어들은 황당해했다.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건 금지다. 너희들은 모두 내 충실한 부하로서 더욱 더 빨라져야 한다!
미친 왕자 때문에 게시판은 터져나가기 직전이었다.
<지금 스파다 시에 계시는 분??>
<왕자 뭐하는 새끼임?>
<빠져나가도 되나? 다 같이 빠져나가면 못 잡을 거 같은데?>
-도망치는 건 자유다. 하지만….
왕자의 외침에 지하 무덤에서 유령마 전차꾼들이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생전에는 고대 제국의 뛰어난 기수였고, 왕자에게 충성을 바쳤던 이들!
-내 부하들보다 빠를 수 있을까! 만약 잡힌다면 그대로 사형이다!
쾅!
그러거나 말거나 웬 로켓 하나가 밖으로 쏘아져나갔다.
파워 워리어 길드원들이 탄 로켓이었다.
“빨리 튀자!”
-…저놈들을 잡아라!
갑자기 벌어진 경주에 모두 당황해하면서도 시선을 집중했다.
과연 누가 빠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