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076화
지하통로를 지나 고대 제국 도시로 내려가자, 망령 백작을 필두로 여러 망령 NPC들이 웅성거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 수인족 놈들을 몰아낸 건가?
“대부분은 몰아내고 몇 놈들은 잡았다.”
-오오…!
-말도 안 된다! 그렇게 강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각하. 위가 조용해졌습니다! 놈들이 물러난 건 사실입니다!
-저 모험가가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우리 제국의 전사들도 쉽게 하지 못할 위엄을… 으음!
망령 백작은 끙끙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고맙네! 내가 그대를 잘못 평가했어!
“뭐 그럴 수도 있지. 살다 보면 다 그럴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나는 사실 그대가 물어본 질문 때문에 그대를 의심했네.
“?”
‘아.’
태현은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그러면 수인족 전사들이 여기까지 내려오면 싸우겠다는 거지?
-그렇겠지. …잠깐. 방금 그 질문은 뭔가 이상한데. 왜 물어본 건가?
-하하. 아니. 궁금해서.
…이렇게 나눴던 대화!
-하지만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군. 뛰어난 모험가도 알아보지 못하고 의심할 줄이야. 하긴, 아키서스 교단도 아닌데 일부러 적들을 끌고 여기로 내려올 이들이 어디 있겠나.
“…….”
[…….]
사실 했었다!
그 전에 끝내서 망정이지 만약 못 끝냈으면 무조건 고대 도시로 끌고 와서 같이 싸울 생각이었던 것!
“…물론이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네.
[고대 제국의 잊혀진 도시, <고대 노드란체 시>의 통치자 망령 백작이 당신의 출입을 허가합니다!]
[앞으로 도시의 완전한 이용이 가능합니다.]
[……]
[……]
[……]
[명성이 크게…]
[……]
도시의 완전한 이용 허락!
도시의 각종 시설부터 NPC들까지 마음껏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라면 처음 접하는 도시는 이용이 제한됐다. 고대 제국의 도시 같은 특별한 곳이라면 더더욱.
그만한 퀘스트를 해낸 보람이 있었다.
[고대 제국의 공적치 포인트가 오릅니다!]
[칭호, <고대 제국의 은인>을 얻습니다.]
‘오….’
생각지도 못한 추가 보상!
공적치 포인트는 언제나 쓸 수 있는 현금 같은 것.
하지만….
에랑스 왕국 공적치 포인트를 쓰려면 에랑스 왕국에 가야 하고, 사디크 교단 공적치 포인트를 쓰려면 사디크 교단… 아니, 이제는 아키서스 교단에 가야 했다.
‘고대 제국 공적치 포인트는 어디 가서 쓸 수 있지?’
너무 예전에 멸망해서 어디 가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이 도시에서 쓸 수 있나?
[카르바노그가 이 도시처럼 예전에 남은 도시나 이어진 도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긴. 이어져 내려왔을 수도 있긴 하겠지.’
그 말을 들으니 새삼스럽게 기대가 됐다.
왕국 공적치 포인트나 교단 공적치 포인트는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었다.
그 왕국에서만 배울 수 있는 스킬이나, 그 교단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게 고대 제국이라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찾았을 경우에만!
‘<고대 제국의 은인>도 상당히 좋은 칭호고 말이야.’
태현은 수비대장을 붙잡고 묻기로 했다.
워낙 망가진 게 많고 쇠락한 도시라, 하나하나 찾는 것보다는 묻는 게 나았다.
“도시에 쓸 만한 시설이 뭐가 있나? 살아있는 사람이 쓸 만한 시설.”
-으음. 예전부터 내려오던 대장간이 있었는데….
“!”
-아. 그건 생각해 보니 오백 년쯤 전부터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쓸 사람이 없으니.
“…….”
태현은 시무룩해졌다.
하긴 망령 놈들이 뭔 대장간을 쓰겠나!
-대장간은 망가졌고… 연금술 상점도 망가졌고… 마법사들의 집도 망가졌고….
“…뭐 이런 사디크 같은….”
-뭐라고 하셨죠?
“아무것도 아니야.”
-아. <고대 제국의 투기장>이나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은 남아 있습니다.
“오.”
태현은 안도했다.
그래도 완전히 꽝은 아니구나!
-<고대 제국의 광부들의 집>과 <고대 제국의 약초꾼들의 집>이나 <고대 제국의 건축가들의 집>이나 <고대 제국의 재봉사들의 집>도 남아 있고….
“…???”
태현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남아 있는 게 안 남아 있는 것보다 좋긴 했다.
그런데 왜 제작 직업 관련 건물들만 다 멀쩡하냐??
태현이 쓸 만한 대장간만 제외하고!
“그건 왜 안 부서졌지?”
-대장간이나 연금술 상점이나 마법사들의 집은 저희가 망령이 되고 나서도 계속 쓰다 보니 부서졌지만, 저것들은 아예 쓰질 않았으니….
“…그래. 뭐. 수리하면 되니까.”
마침 위에는 열심히 일해 줄 플레이어들이 득시글거렸다.
불러다가 수리시키고, <광부들의 집>이나 <약초꾼들의 집> 같은 곳을 활성화시켜서 일퀘를 깨게 하면 될 것이다.
수입이 거의 없는 노드란체였지만, 이 도시를 이용한다면 수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어… 그런데 김태현.”
“?”
“내가 백작이잖아. 내가 지배해야 하는 거 아니야?”
“흠. 신선한 의견이군. 저기 가서 직접 말해보는 게 어때?”
“아, 아니. 그건 좀 싸가지 없어 보이잖아.”
케인은 우물쭈물했다.
고대 제국 NPC들한테 가서 ‘야 내가 저 위에 부임했는데 너희들도 날 섬겨야 하지 않냐?’라고 말하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머리에 칼 맞기 딱 좋은 소리!
김태현 같은 사람 아니면 그런 말은 쉽게 할 수 없었다.
“설득 못하면 무리지.”
“싸워서 뺏는 건?”
“싸워서 뺏으면 NPC들부터 시설들까지 다 날아갈 텐데 빈껍데기 받아서 뭐하려고? 처음부터 다시 지으려고? 고대 제국 시설이 아까워서 무리지.”
“네가 잘 설득하면?”
“…넌 내가 뭐 말만 하면 다 설득할 수 있는 줄 아냐?”
“아니었어?!”
[카르바노그가 아니었냐며 놀랍니다!]
“…화술 스킬이 최고급이긴 해도 만능은 아냐. 상황 보면서 써야 한다고.”
태현의 화술 스킬이 워낙 뛰어나서, 몇몇 플레이어들은 ‘그냥 말만 하면 다 통하나?’ 하고 오해하곤 했다.
화술 스킬은 스킬들 중 가장 마이너한 스킬 중 하나!
그래서 그런지 이런 오해들도 많았다.
하지만 화술 스킬은 스킬 레벨도 스킬 레벨이지만, 그 상황과 타이밍을 파악하는 머리가 매우 중요했다.
케인에게 최고급 화술 스킬 준다고 태현처럼 써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헛소리하지 말고, 위에 퀘스트 올려서 부서진 시설들 수리시키고 재료 수집 일퀘 돌려. 영지 스탯 올려야 하니까.”
“물론이지!”
케인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케인의 꿈은 골짜기였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활기에 차서 떠들고….
-길드 동맹 놈들을 불태우자!
-길드 동맹 놈들을 불태우자!
다양한 NPC들이 각종 퀘스트를 내주며 굴러가는 영지!
-길드 동맹을 불태우기 위한 폭탄을 만들어오게!
-길드 동맹을 잠재울 수 있는 연금술 약을….
“나도 꼭 골짜기 같은 영지를 만들고 말겠어!”
“왜 굳이 골짜기냐? 다른 좋은 도시 많은데.”
태현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좀 일반적으로 좋은 도시를 롤모델로 삼아!
그러나 케인은 완고했다.
“노드란체가 골짜기 절반만 따라가도 소원이 없겠다야.”
* * *
“에어컨… 아니, 하늘성이 돌아왔어!”
“날 보셨어! 날 쳐다보셨어!”
“널 쳐다본 거 아니야!”
“고개를 돌려서 내 눈을 똑바로 보셨어!”
“네가 아니라 길드 동맹 놈들을 노려보신 거야!”
“아니야! 날 선택하셨어! 날 에어컨의 천국으로 데리고 가실 거야!”
하늘성은 정말 금방 돌아왔다.
그 많은 난리를 쳤던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이 옳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멈추면 다시 치울 수도 있다, 이 뜻입니다! 이기적으로 굴지 맙시다! 골짜기를 이용하는 모든 길드, 모든 파티, 모든 플레이어들! 찌는 더위 속에서 살고 싶습니까!”
“길드 동맹 놈들을 잡아옵시다! 길드 동맹 여러분! 여러분들도 양보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조금만 희생하시면 됩니다!”
“뭔 개소리야 미친놈들아! 더위에 뇌가 녹아내렸냐?!”
길드 동맹 길드원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마계에서 즐겁게 퀘스트 마치고 통로 밖으로 나왔더니 웬 미친놈들이 붙잡고 다짜고짜 감옥에 가둔 것이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아, 양보 좀 하라고!”
“그냥 다짜고짜 감옥에 가둬놓고 뭔 양보야!”
“중국인은 이런 거에 익숙하잖아! 대충 받아들여!”
“이 자식들이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플레이어들은 족족 길드 동맹 길드원들을 잡아 영지 감옥에 가둬버렸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영지 감옥이 꽉꽉 차는 기현상!
마계에 가있던 길드 동맹 길드원들은 기가 막혔지만 뭐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게 누구야? 김태현이야? 당장 연락해서 말려!
-아니, 김태현이 지시한 게 아닙니다! 참가한 길드가 수십 개가 넘어요! 누가 이끄는 것도 아니라 그냥 다 미쳐 날뛰는 거라 지시가 불가능해요!
-그걸 말이라고…!
설득이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숫자의 플레이어들!
길드 동맹은 그저 마계에서 버티면서 상황이 가라앉길 빌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오히려 마계로 들어와서 길드 동맹을 붙잡으러 했다.
심지어 마계에 있던 다른 길드의 길드원들마저 길드 동맹을 공격하곤 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냐?!
-하하. 경쟁자 제거하면 우리야 좋지! 꺼져라! 길드 동맹!
언제나 압도적인 숫자로 상대방을 밀어붙여 온 길드 동맹이 처음으로 겪는 수적 불리함이었다.
* * *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에 입장했습니다.]
태현은 일행을 데리고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에 입장했다.
이런 훈련소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플레이어들도 있었지만 태현은 아니었다.
‘이런 게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이지.’
각종 스탯, 스킬 보상들을 받을 수 있는 곳!
이런 곳을 단순히 귀찮다고 피하는 플레이어는 랭커가 될 자격이 없었다.
과연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은 어떤 식일까?
[모든 스탯이 기본 스탯으로 바뀝니다.]
[모든 스킬이 금지됩니다.]
[레벨이 1로 고정됩니다.]
[……]
[훈련용 탑 안에서 죽을 경우 탑 밖으로 추방됩니다.]
“…!”
일행은 메시지창에 경악했다.
이 메시지창에서는 냄새가 났다.
고난이도의 냄새…!
“아니 레벨, 스탯 다 깎아버리면….”
“게다가 한 번 죽으면 추방인데 무조건?”
다들 랭커다 보니 훈련 시설은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태현은 아예 남의 교단 건물도 뺏어 쓰지 않았던가.
그런 그들에게도 이 조건은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레벨, 스킬, 스탯 다 봉인하고 한 번도 죽지 않고 계속 위로 올라가야 한다!
“보상은 뭐지?”
[<고대 제국의 훈련용 탑 1층>을 통과할 경우 무작위 스탯 보상이 들어옵니다.]
[고대 제국의 보물 중 하나를 무작위로 얻을 수 있습니다.]
“…!!!!”
모두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건… 이건 해야 한다!
“지금 해야 해!”
“케인 놈은 밖에 가서 플레이어들 지휘하라고 하고 우리는 이거 하자!”
“…….”
케인은 슬픈 눈으로 쳐다봤지만 일행들은 단호했다.
그럴 가능성은 적었지만, 만약 보물이 다 떨어지면 다음에 들어오는 플레이어는 못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럴 걸 대비해서 최대한 빨리 달려야 한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훈련용 탑 1층에 입장한 태현 일행은 곧 깨달은 것이다.
-아, 이건 그냥 다 공개해도 어차피 못 깨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