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1075화
카르바노그는 자도 싸움은 계속되어야 했다.
아키서스 포병대들은 진형 배치를 마쳤다.
실로 무시무시한 구성이었다.
거대 대포들을 낀 아키서스 포병대.
그 뒤에 즉석에서 만든 소형 박격포들을 쫙 깔고 있는 갈카드 드워프 부족들.
거기에 활을 들고 사격 준비를 마친 겔렌델의 엘프 정예 전사대까지!
‘어차피 곰 부족 놈들은 마법 스킬이 없어. 정면으로 쳐도 잡을 수 있다.’
늑대 부족 전사들과 싸우면서 보여준 추가 광란은 좀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전력이 있으면 정면으로 붙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싸움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콰콰콰콰쾅! 콰쾅!
괴수는 쓰러진 싸움판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수십의 곰 전사와 늑대 전사가 쓰러진 게 마치 맛집 같았던 것이다.
-뿌오오오오!
‘…저놈 진짜 무서운데 슬슬.’
태현은 목을 가다듬고 스킬을 준비했다.
<화신의 함성>!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 스킬을 해제하는, 아주 강력한 스킬 중 하나였다.
-모두 그만!
태현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주변을 뚫고 곰 전사들과 늑대 전사들에게 틀어 박혔다.
[곰 전사들의 광란 상태가…]
[곰 전사들의 추가 광란…]
[곰 전사들이 정신을 되찾습니다!]
[체력이 하락…]
[힘이 하락…]
[민첩이…]
[……]
<화신의 함성>이 제대로 작렬하자, 모든 광란 상태가 사라지고 버프도 같이 날아갔다.
제정신이 돌아온 곰 전사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해했다.
[고대 곰 부족 전사들의 사기가 내려갑니다!]
[……]
HP는 20% 밑으로 떨어진 상태에다가 각종 상태 이상은 물론에, 숫자마저 줄었으니 아무리 강맹한 전사들이라 하더라도 사기가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곰 부족 전사들은 그르릉대며 태현을 노려보았다.
실로 강맹한 투지!
-아키서스 놈! 감히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다니!
곰 부족 전사는 이를 갈며 외쳤다. 태현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우리를 극도의 광란 상태에 빠지게 만들어 힘을 빼놓으려고 하다니. 교활하구나!
“아니.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한….”
-저 멍청한 늑대 놈들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너를 붙잡아 찢었을 텐데!
“그건 내가 했는데.”
아무래도 곰 부족 전사들은 뭐가 태현이 한 짓이고 뭐가 태현이 안 한 짓인지 착각한 모양이었다.
-뭐? 아키서스?
늑대 전사 중 하나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누가 아키서스야?
-어떤 놈이 아키서스라고? 그런 놈이 있었어?
-헛소리하지 마라. 곰 놈들아. 아키서스가 있었으면 우리가 못 알아봤을 리 있나!
“흠. 미안하게 됐다.”
태현은 손을 흔들었다.
[늑대 부족 전사들의 친밀도가 크게 떨어집니다!]
[늑대 부족 전사들의…]
[……]
-크아아아아아!
-아키서스! 이 비열하고 치사하고 더러운 놈!
-귀를 막기도 전에 사기를 쳐버리다니!!
늑대 전사들은 배신당했다는 충격에 울부짖었다. 곰 전사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그러게 귀를 잘 막고 살았어야지!
-닥쳐! 너희 같은 놈들한테 듣고 싶지 않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일단 우리를 속인 저 아키서스 놈부터 죽이자!
-그러는 게 좋을 거 같군.
늑대 전사와 곰 전사들이 이를 갈며 태현을 노려보았다.
너덜너덜한 상태에서도 어마어마한 압력이었지만 태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항복하는 게 좋을 텐데.”
-헛소리하지 마라, 아키서스 놈! 너 같은 놈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명예라는 게….
“발사.”
태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준비하고 있던 이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아키서스 포병대>부터 시작해서 각종 원거리 공격이 하늘을 날아 폭풍처럼 전사들을 덮쳤다.
온갖 버프로 증폭된 화력!
그 화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쉬이이익-
꽈꽈꽈꽈꽈꽈꽝!!!
[기계공학 스킬이…]
[……]
[……]
안 그래도 두 부족의 싸움으로 인해 갈아엎어진 노드란체의 땅을 말 그대로 갈아버리는 광역폭격!
[카르바노그가 여기 별다른 건물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이니까 가능한 폭격!
[칭호: 브레스 구현자를 얻습니다!]
[어마어마한 공격으로 인해 명성이 오릅니다!]
[……]
가능한 모든 버프를 끌어 모아서 한 번에 쏟아 붓는 공격의 위력은 드래곤 브레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슈우우우-
포격이 끝나자 그 주변은 다른 곳보다 몇 미터는 더 낮게 변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수인족 전사들이 경악한 얼굴로 남아 있었다.
태현이 일부러 포격을 빗겨나가게 한 것이다.
“항복할 테냐, 끝까지 싸울 테냐?”
-…명예라는 게 있긴 하지만 그건 지금 꼭 챙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최고급 화술 스킬을 갖고 있습니다!]
[악명이 매우 높습니다!]
[……]
[……]
[설득에 성공합니다!]
[적들이 항복합니다!]
[화술 스킬이 크게 오릅니다!]
아무리 배짱 좋은 수인족 전사라고 하더라도, 방금 같은 공격을 보고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있던 명예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일격!
드래곤 브레스에 버금가는 포격에 전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고대 수인족들의 습격에서 노드란체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해빙의 계절>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남은 놈들은 전부 다 냉기의 핵 근처에 두고 봉인해 버린 다음 마지막 수인족 전사들마저 항복시키자, 퀘스트 완료 창이 떴다.
어떻게든 해낸 것이다!
‘케인 놈 때문에 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남은 게 많은 퀘스트다.’
무엇보다 노드란체 지하에 있는 고대 제국 도시가 컸다.
고대 제국 관련해서 연결고리 하나 얻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고고학이나 발굴 스킬 찍은 플레이어들이 열심히 땅을 파면서 뒤지고 있었지만 고대 제국 관련 기록은 꽤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멀쩡하게 남은 고대 제국 도시를 하나 통째로 얻었으니….
이번 퀘스트로 인한 난리만 잘 수습되면 노드란체는 훨씬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김, 김태현. 저기 땅이 완전히 갈려 나갔는데….”
“흠.”
“대책 있는 거 맞지? 그치? 있다고 해줘!”
“어차피 얼어붙은 땅이었으니까 잘 됐다고 생각하는 건 어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케인은 울컥한 채 주변을 확인했다.
멀쩡하던 평야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
땅의 깊숙한 속살이 드러날 정도로 팍팍 파인 상황!
속이 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거 나중에 문제 생기진 않겠지?’
그 순간 메시지창이 떴다.
[<뜨거운 천연 지하수>를 발견했습니다! 영지의 만족도가…]
[<폐쇄된 지하 구리 광산>을 발견했습니다! 영지의 경제…]
[……]
“…….”
케인은 메시지창을 보고 태현을 쳐다보았다. 태현도 케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봐라. 잘 됐잖아.”
“아. 아니… 뭔….”
설마 땅을 뒤집어놨더니 이런 게 나올 거라고는…!
솔직히 너도 모르고 했잖아!
태현은 갑작스레 나타난 영지 시설들을 보고 하나씩 확인해 들어갔다.
‘뜨거운 지하수면 온천인가? 하긴, 프로즈란드도 더 들어가면 화산 나온다고 했으니….’
화산지대 근처에는 뜨거운 지하수, 온천이 나오게 마련.
다른 건 몰라도 이 노드란체에 그런 시설은 매우 좋았다.
추위를 막는 것은 물론이고, 피로한 플레이어들을 회복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찜질방이나 하나 만들면 괜찮겠군.’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이런 추운 곳이라면 누구나 다 따뜻한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할 것이다.
<폐쇄된 지하 구리 광산> 같은 폐쇄된 광산들은, 고대 제국 시절에 쓰이던 광산이 분명했다.
사람들이 다 사라졌으니 자연스레 폐쇄가 되었으리라.
‘개척단 플레이어들 다 부른 다음 폐쇄된 광산 클리어시키고… 음. 난이도는 괜찮겠지.’
“김태현? 무슨 고민하고 있는 거야?”
“아. 개척단 플레이어들을 어떻게 부려먹어야 건물들이 잘 지어질까 생각하고 있었지.”
케인은 태현의 말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지금 자기는 이번 퀘스트로 오른 레벨 보면서 기뻐하고 있었는데, 태현은 벌써 다른 놈들을 뜯어낼 계획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저런 걸 본받아야 해!
[노드란체 지하의 고대 제국 도시가 당신의 업적에 감사합니다!]
[노드란체 지하의 고대 제국 귀족들이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합니다. 그들을 만나십시오.]
‘오.’
태현은 메시지창에 기꺼워했다. 안 그래도 한 번 내려가서 느긋하게 뭐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먼저 초대해 주다니!
‘습격도 다 끝났겠다 확실하게 확인 가능하겠군.’
“김, 김태현! 어떻게 된 거야!”
숲에서 개척단 플레이어들이 한둘씩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들한테도 퀘스트 클리어 메시지 창이 뜬 것이다.
한 게 거의 없는데도 레벨 2, 3씩 오른 기적!
덕분에 그들의 얼굴은 어리둥절해있으면서도 밝았다.
“퀘스트 정말 다 된 거 맞아?”
“그래. 다 됐다.”
“우리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안에서 요새를 지키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어!”
퀘스트 끝났다고 하니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개척단 플레이어들!
필요 없어서 부르지 않았지만, 만약 나오라고 했어도 최대한 버텼을 놈들이었다.
그걸 잘 아는 케인은 투덜거렸다.
“아오. 저놈들. 안에서 숨어 있기만 한 놈들이 날로 받아먹네.”
물론 직접 한 것과 달리 경험치 차이는 컸지만, 저 정도 받아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얄미웠다.
“김태현! 미안해! 우리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뭘 그런 걸 가지고. 지금부터 하면 되지.”
“?”
“자. 내려가서 땅 다지고 주변 다듬어라.”
“???”
개척단 플레이어들은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들은 그제야 어마어마하게 큰 구덩이를 발견하고 놀랐다.
“저게 뭐…?”
-뿌오오오오!
괴수의 울음소리에 개척단 플레이어들은 기겁했다.
저놈 아직 살아 있었어?!
“뭐? 배가 고프다고? 걱정 마라. 일 안 하는 놈 있으면 그놈을 줄 테니까.”
태현은 다정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감동했다.
“…와! 열심히 일해야겠다!”
“내, 내가 먼저 가야지!”
진심은 통한다고, 뻔질거리던 개척단 플레이어들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나갔다.
태현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보기 좋아!
“퀘스트 다 끝났는데 왜 이래야 해? 그냥 떠나면 안 되나?”
“저기 NPC들 다 뚫고 튈 자신 있으면 튀어봐라. 야. 저 NPC들이 왜 여기 있나 했는데… 김태현이 힘으로 밀어버리려고 데리고 온 거 아니냐?”
“그 무시무시한 놈들을? 힘으로 밀었다고?”
“그거 아니면 어떻게 쓸어버렸겠어? 게다가 주변 보라고. 여기만 완전히 땅이 가라앉은 수준인데. 김태현이 데리고 다니는 무시무시한 대포들 있잖아.”
“헉….”
눈치 빠른 플레이어들은 입을 다물었다.
설마 진짜 힘으로 이겼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답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아무리 태현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그 강력한 전사들을 정면에서 쓰러뜨리다니!
‘저거 인간 맞아?’
‘영상은 안 올렸나? 어떻게 싸웠는지 너무 궁금한데.’
‘우리 도움은 안 필요했나? 에이, 부르지.’
‘너 같으면 퍽이나 필요했겠다. 우리 튀어야 하는 거 아닐까? 난 맹세도 안 해서 괜찮은데….’
‘네 눈은 장식이냐? 헛소리 하지 말고 삽질이나 해.’
아키서스 포병대와 드워프, 엘프까지 주변에 빙 둘러서서 감시하고 있으니, 개척단 플레이어들은 감히 반항할 엄두도 못 냈다.
태현 혼자 있어도 못 까불었는데 그 뒤로 저렇게 부하들이 많아진 이상에야….
“그러면 고대 제국 도시로 내려가자. 작업은 쟤네들이 하고 있을 테니까.”
개척단 플레이어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삽과 곡괭이를 휘둘러 지하의 땅을 다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든든!
케인은 그걸 보면서 무심코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설마 너 저기 가서 끼고 싶냐? 그러면 가서 끼어도 돼.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아, 아니거든? 나 곡괭이질에 관심 없거든??”
케인은 부정했지만, 속마음은 이상하게 흔들렸다.
‘아. 내가 왜 이럴까? 삽질하는 것만 보면 옆에 가서 훈수를 두고 싶어지네.’
마음만 같았으면 곡괭이와 삽을 뺏고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가르쳤을 텐데!
“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태현은 미심쩍다는 듯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