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81화
이다비는 신이 나서 장비들을 챙겼다.
“이 방패도 가져가도 되나요?”
“어, 그렇지……?”
“감사합니다! 혹시 이 벨트는요?”
“그것도 가져가도 되는데…….”
김태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상황을 알고 있는 건가?
사방에서 마법이 날아들고, 수백 명에 가까운 플레이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성벽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상황.
잠시만 귀를 기울여도 온갖 시끄러운 소리가 다 들려왔다.
게다가 여기서 가장 초조해야 할 게 이 둘 아닌가!
그런데 이다비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역시 태현이랑 같이 다니는 녀석들은 머리에 나사 하나가…….’
김태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장비들을 건넸다. 어차피 김태산 입장에서는 푼돈에 불과한 장비였다.
“이 단검은요?”
“여기.”
아이템을 내주던 김태산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
설마 이 녀석, 이 상황에서 이득 좀 보겠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이다비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태현에게 말했다.
“태현 님! 이거 보세요!”
“오. 많이 챙겼네.”
“더 달라고 해도 되나요?”
“그럼, 그럼. 더 달라고 해. 내 거 아닌데 뭘. 이번 기회에 팍팍 뜯어내야지.”
“…….”
상황을 깨달은 김태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의외로 밀어붙이는데요?”
“이상한데…….”
길드 동맹의 플레이어들과 고용한 NPC들이 오단 성을 향해 총공격을 퍼붓는 상황.
당연히 랭커들도 가장 최전선에서 그 힘을 보여줘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뒤에서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그들!
랭커들이 이기적이고 자기만 챙기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사실 이 정도 규모의 공성전은 랭커들도 직접 나서는 게 보통이었다.
이 정도로 규모가 커지면 얼굴 내밀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게 훨씬 더 이익이었던 것!
한 번 모습을 보여주면 몇 달은 우려먹을 수 있었다.
랭커들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유는 하나,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금 김태현 놈이 쌩쌩하잖아.’
‘아까 1:1로 인기 좀 얻어 보겠다고 나선 마이크 놈이 개망신당한 걸 봤을 때, 괜히 먼저 나섰다가는 손해만 본다.’
‘아무리 김태현이라도 이렇게 포위된 상황에서 계속 버틸 수는 없지. 싸우다 보면 점점 지칠 거고, 그때 나가서 막타를 치는 놈이 승자다.’
태현에 대한 두려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서 치고받는 공성전에서는 랭커도 잘못 꼬이면 한 방에 훅 갈 수 있었다.
게다가 태현은 탱커나 힐러로 이름이 높은 게 아닌, 폭딜로 이름이 높은 딜러형 플레이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랭커들은 빠지고, 고수급 플레이어들만 전면에 나섰는데 벌써 성벽을 뚫고 진입한 게 보인 것이다.
김태현은 보이지도 않는 상황.
“설마 이대로 이기는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김태현이 호구인 줄 아냐?”
“맞아. 이래서 판온 1도 안 해본 뉴비 놈이랑은 대화가 안 통한다니까.”
“김태현한테 당해본 적도 없는 놈이 판온을 알겠어?”
‘이런 개XX들이…… 살다 살다 자랑할 게 없어서 김태현한테 당한 걸 자랑이냐?’
눈치 없이 말 한마디 했다가, 다른 랭커들한테 구박을 받은 랭커는 속으로 욕했다.
그는 판온 2 때부터 시작한 랭커였던 것이다.
“어! 저기 후퇴하는데요?”
“내가 말했잖아. 초반에 벌써 뚫리겠냐?”
“저것도 김태현의 함정일 수 있지.”
‘너네 길드원이야. 이 XX들아…….’
저 멀리, 성벽을 뚫고 들어갔던 오크 전사들이 우르르 도망쳐 나오고 있었다.
“후퇴! 후퇴!”
“으아악! 함정이 가득해! 거기에 언데드들까지! 완전히 당했어! 힐 좀! 힐 좀 해줘!”
오크 아저씨들은 실감 나게 외치며 당한 척을 했다.
그 말을 들은 근처의 플레이어들은 잔뜩 겁을 먹고 물러섰다.
사람 몇 명 들어갈 구멍이 뚫린 성벽이 마치 지옥의 입 같았다.
“역, 역시 함정이었나?”
“김태현……! 이 사악한 놈!”
움찔!
구멍에서 튀어나온 토끼 중 한 마리가 움찔했지만, 플레이어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 * *
“이야, 살았다.”
“진짜 끝까지 눈치를 못 채네요?”
“원래 저런 놈들은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놈들이라…… 순간이동 막고 각종 마법만 막아놓으면 완전히 포위했다고 착각을 하는 법이지.”
태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사실 길드 동맹 입장에서는 억울한 말이었다.
물론 그들이 각종 순간이동 마법을 차단하고서 포위한 탓에 안심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일을 벌여놓고 혼자 튀는 놈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태현이 이상한 거지 그들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러면 이대로 튈까요?”
“너는 참 현실적이어서 좋아.”
“앗, 그, 그런가요?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헤헤…….”
이다비는 얼굴을 붉혔다. 태현은 근처 숲까지 도망치고 나서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만 생각 좀 해보고 가자.”
토끼 상태야 해제했지만 둘 다 변장하고 있어서 정체를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이 상황에 태현이 여기 있으리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타타타탁-
“?”
저 멀리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 태현은 이다비를 쳐다보았다.
“길드 동맹 사람일까요?”
“아마 그럴 수도 있겠다. 안 싸우고 도망치고 싶은데.”
“안 들키면 가능할 것 같아요. 최대한 착한 표정으로 있죠.”
“난 언제나 착한 표정이야.”
“……네!”
“너 방금 대답이 좀 늦은 것 같은데.”
말하는 사이 나무 사이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엇!”
“여기 왜 사람이…….”
“?”
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드 동맹의 사람치고는 너무 놀라는 것 같았던 것이다.
‘있을 수도 있지,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하, 하하…… 안녕하십니까! 길드 동맹 만세!”
“만세! 김태현을 죽이자! 김태현을 죽이자!”
“……???”
태현은 그 모습에 더욱 의아해졌다. 그걸 본 이다비는 속삭였다.
“길드 동맹 사람들은 저러고 놀아요?”
“몰라. 좀 불쌍하다.”
태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훑어보았다. 사기의 고수인 태현인 만큼, 태현의 눈에는 보이는 게 있었다.
저들은 길드 동맹의 길드원이 아니었다.
길드 동맹의 길드원인 것처럼 보이려는 사람들일 뿐!
‘그렇다면 왜?’
이 상황에서 길드 동맹의 길드원인 척하고 다닐 사람은 누구일까?
1. 태현처럼 길드 동맹의 적
2. 그냥 길드 동맹의 길드원인 척하고 다니면서 위세 부리는 놈
‘아니, 위세 부리는 놈이 저럴 것 같지는 않고. 1번인가?’
“그,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
“너희 길드 동맹 아니지?”
“……들켰다!”
“죽여…… 억!”
말하기도 전에 태현은 달려들어서 상대의 무기를 <고대의 망치>로 찍어버렸다.
콰지직!
[정확하게 상대의 무기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힘이 오릅니다.]
“…….”
“…….”
싸우기도 전에 상대방의 기세를 꺾어버린 태현.
단순한 한 방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상대방에게 실력 차이를 확 느끼게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태현이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태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유명하다는 것을.
“저, 저 망치…….”
“김태현이잖아?!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젠장. 잊고 있었군.”
태현은 투덜거리며 바로 무기를 바꿔 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 PK해버리고 나서 빠져나가는 수밖에…….
“아냐! 김태현! 우린 네 편이야!”
“그래. 나한테 죽을 놈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고. 내 경험치가 될 테니까 내 편이 맞긴 하지.”
“그게 아니라! 우드스탁! 우드스탁 길드 몰라?”
“몰라. 인마. 죽어.”
쿨하게 무기를 휘두르려는 태현! 그때 이다비가 태현에게 속삭였다.
“그, 우드스탁 길드는 거기잖아요. 예전에 태현 님이 이용해먹…… 아니, 같이 싸웠던 길드요. 길드 연합에 있다가 나와서…….”
“응? 아, 거기.”
태현은 기억을 되살리고 아차 싶었다. 김태산에게는 영지를 빼앗기고 길드 연합에게서는 쫓겨나고…….
태현이야 덕분에 쉽게 잘 풀렸지만 우드스탁 길드는 악마 종족으로 변신까지 한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 보통 고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 우드스탁 길드! 알고 있지~ 내가 모를 리가 있나.”
“…….”
“…….”
우드스탁 길드원들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태현을 쳐다보았다.
‘방금 정말 죽이려고 한 것 같은데?’
‘기억하고 있었던 거 맞아?’
‘아닌 것 같은데…….’
“하하. 방금은 농담이었어. 그런데 여기는 왜?”
“흠흠. 너한테 도움이 되려고 같이 움직이고 있었지!”
“오단 성에서 엄청 떨어진 곳인 여기에서?”
“엄, 엄청은 아니잖아…… 어쨌든 우리도 나름대로 싸우고 있었다고!”
우드스탁 길마는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 태현에게는 속이 뻔히 보였다.
‘빈집털이 하고 다녔었군.’
태현도 자주 한 짓이었다. 상대 길드가 바쁠 때 찾아가서 빈집털이!
상대방을 가장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어? 잠깐만…….’
태현은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현재 길드 동맹의 본거지로 유명한 것은 아레네 시.
그리고 아레네 시는 여기서 가까웠다.
‘얘네 랭커들 지금 다 여기 있으니까……. 아레네 시에 가서 깽판 좀 쳐도 오는 데에는 시간 걸리겠지?’
여기까지 3초.
태현은 계획을 세우고 말했다.
“잘됐네. 이번에도 같이 싸우자고.”
“응? 어, 오, 오단 성에 가자고……?”
우드스탁 길마는 겁먹은 표정이었다. 지금 오단 성에 있는 적들의 숫자를 알고 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니. 다른 곳에 갈 건데.”
“그래?! 그러면 같이 가야지! 하하!”
“길, 길마님. 어딘지는 물어보고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멍청아, 김태현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
우드스탁 길마는 길드원을 구박했다.
* * *
김태현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그렇게 믿고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은 지금 오단 성에 갇혀 있었다.
“……김태현 어디 갔지?”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케인이었다. 성벽 위에서 기어오른 도적 플레이어 하나를 골로 보내고 나서, 케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야, 야. 어딨냐?
[현재 플레이어는 귓속말을…….]
-야!!!!!!
케인은 무릎을 꿇었다. 태현과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이제 이 정도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자식…… 어쩐지 칭찬을 하더니……!’
버리고 튀었구나!
‘와,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진짜 체면이나 인기는 신경도 안 쓰냐?!’
케인이었다면 여기서 싸우다 죽을지언정 혼자 튀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으니까.
튀는 순간 엄청난 비웃음이 뒤따를 게 분명!
차라리 죽더라도 멋있게 죽는 게 나았다.
그런데 태현은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었다.
“근데 태현 님은 어디 계세요?”
“아까부터 안 보이시네?”
“…….”
케인은 침을 삼켰다.
사실대로 말하고, 같이 김태현을 욕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절대 안 돼!’
케인의 이성이 본능을 붙잡았다. 지금 말했다가는 성안의 플레이어들은 집단으로 절망할 것이다.
게다가 잘못하면 케인까지 화풀이 당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가장 태현과 가까운 사람이 그였으니까!
케인도 사기당한 입장이었지만,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나오기 힘들었다.
“……김태현은 지금 변장하고서 길드 동맹의 길드원들을 암살하고 있지!”
“오오……! 역시!”
“역시 태현 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