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350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유 회장은 멈칫했다.
물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과 같이 움직이는 건 좋았다.
그렇지만…….
‘지수하고 같이 가면 김태현 그놈을 잡을 때 눈치가 보일 텐데…….’
유지수가 옆에 있다면 태현한테 욕 한 번 시원하게 할 수 없는 게 현실!
“싫으세요?”
“아, 아니야. 당연히 고맙지. 흠흠. 잘 부탁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 회장은 유지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손녀에게는 한없이 바보인 그였으니까!
‘끙…… 일단 투기장 경기를 보면서 생각을 해야겠군.’
유 회장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유지수와 같이 있더라도 태현에게 욕할 기회는 있을 테니까!
그리고 투기장 경기에 호기심이 가기도 했다.
저번 타이럼 주변 산에서 만난 김준수, 김준형 플레이어들도 그렇게 프리카 투기장 이야기를 했다.
유지수도 그렇고, 김태현도 참여하는 투기장!
판온에 슬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유 회장이었다. 당연히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 경기를 봐야겠어. 어떻길래 다들 그러는지…….’
유 회장은 알지 못했다.
오늘 보게 될 경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판온에 빠져들지를!
* * *
“크흑흑흑…….”
버포드는 또다시 살아남았다.
사디크 성기사들한테 첩자로 오해받아서 붙잡혔던 게 오히려 행운으로 돌아온 것이다.
장비를 벗고 얼굴을 가리자 토벌대 플레이어들은 버포드가 그냥 사디크 교단에게 붙잡힌 플레이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버포드는 기뻐할 수 없었다.
통째로 날아간 본거지!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사디크 교단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버포드도 메시지창을 봤다. 사디크 교단이 망했다는 메시지창!
버포드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사디크의 투사> 직업을 갖고 있는 버포드에게 교단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교단이 없다면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성장 방법 자체가 막혀 버리는 것!
아무리 기다려도 <교단의 다음 본거지로 향해라>나 <교단의 숨겨진 본거지> 같은 퀘스트는 뜨지 않았다.
대신 다른 퀘스트가 떴다.
<교단을 부활시켜라-사디크 교단 부활 퀘스트>
사디크 교단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그림자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모든 사디크 신도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디크 신도들을 모아 힘을 합친다면 멸망한 교단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힘을 모아 교단을 부활시켜라!
-사디크의 성물 반지.
-사디크의 권능을 가진 사람을 적어도 세 명 이상 모을 것.
보상:사디크 교단의 부활, 상위 직업으로의 전직, ??, ???
‘이걸 내가 어떻게 찾아?!’
사디크 대주교는 죽었고,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상황.
게다가 사디크 성기사단장을 찾아간다고 해도 괜찮을지 의문이었다.
사디크 성기사단장은 버포드를 태현의 스파이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안토니오 파였는데, 김태현한테 협박당해서 인질 역할을 한 덕분에 더 확실하게 찍혔겠지…….’
버포드는 우울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암살에 실패했을 때에도, 성물 반지를 뺏겼을 때에도 이 정도로 막막하지는 않았다.
‘아예 전직을 해버릴까?’
버포드는 직업을 바꾸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디크 교단 직업을 갖고 있는 버포드는 다른 교단으로 전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던 것이다.
‘어디 전직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어…….’
고민하던 버포드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번득였다.
미친 생각 같지만 점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끌리는 그런 생각!
‘아키서스 교단……!’
* * *
“퉷!”
“…….”
도동수는 태현과 만나자마자 옆에 침을 탁 뱉었다.
이세연은 바로 태현의 뒤로 돌아가 양팔을 붙잡았다.
선명하게 보이는 1초 뒤의 모습!
“패면 안 돼! 여기서 PVP 하면 안 된다고!”
“……나 가만히 있거든?”
그러나 태현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 목소리에 이세연은 민망한 표정으로 팔을 놓았다.
“난 네가 바로 덤빌 줄 알았지…….”
“난 가끔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어.”
태현은 그렇게 말하고 도동수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붉은색 세트 장비를 갖춰 입고서,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적 플레이어!
‘나 랭커야’라고 온몸으로 뽐내고 다니는 것 같은 플레이어였다.
‘근데 진짜 어디서 봤더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태현이 도동수를 기억에서 바로 떠올리지는 못했다.
한 번 두들겨 팬 놈은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태현!
‘도적 플레이어를 상대한 게 한두 번이어야 기억을 하지…….’
태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오히려 도동수가 초조해졌다.
대놓고 도발을 했는데,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인상만 쓰고 있는 것이다.
“뭐냐? 왜 아무 말도 없어? 겁이라도 먹은 거냐?”
“어? 미안. 다른 생각을 좀 하고 있었거든.”
“…….”
옆에서 둘의 기 싸움을 지켜보던 케인은 감탄했다.
태현은 정말, 남을 도발하는 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말을 해도, 말을 하지 않아도 남을 도발할 수 있는 재능!
실제로 도동수는 지금 허를 찔려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겁, 겁을 먹었으면서 다른 소리를…….”
“뭐라는 거야. 다른 생각 하고 있었다니까. 귀가 막혔냐?”
도동수의 도발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도동수와 태현의 기 싸움은 도동수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태현은 도동수를 두들겨 패놓고 이름도 잊은 상태였지만, 도동수는 태현 이름만 들어도 부들부들 떨 정도였으니까!
서로의 입장이 너무 달랐다.
“그리고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지금 깃발 꽂을까? 난 상관없는데.”
“……!”
태현의 말에 도동수는 깜짝 놀랐다.
도발 좀 했다고 바로 깃발 꽂자고 나오다니!
보통 어느 정도 급이 되는 랭커들은 랭커들끼리 PVP를 하는 걸 꺼려 했다.
자기보다 완전히 약한 상대면 모를까, 랭커들끼리 싸운다면 승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구경하는 사람들만 신날 뿐, 당사자들은 불확실한 싸움에 잃을 게 너무 많았다.
그런데 태현은 도발 몇 마디 했다고 바로 깃발 꽂자고 반응이 나왔다.
자기 캐릭터를 생각하고, 이익을 생각하는 다른 랭커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분 나쁘면 일단 깃발부터 꽂고 보는 호전성!
이 주변은 투기장을 구경하러 온 플레이어들로 우글거렸고, 방송국 직원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싸우자니.
‘큭……! 그렇게 자신이 있다는 거냐?’
도동수는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태현과 만나서 싸울 기회가 있다면, 그 상황이 언제든지 간에 바로 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깃발 꽂자 XXX야!’라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입!
도동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아닌 척 해봐도 몸은 정직한 것이다.
“뭐해? 깃발 꽂자니까. 싫냐?”
“그만해. 지금 대회 앞두고 뭐하는 짓이야?”
도동수의 목숨을 구해준 건 이세연이었다.
“쟤가 도발을 하잖아.”
“그렇다고 지금 싸우면 안 돼! 사람들 안 보여? 이거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쟤네들은 실전으로 연습하나 보다 생각하겠지.”
“…….”
“그리고 오히려 좋아할걸?”
“그게 좋은 뜻으로 좋아하는 거겠어? 어쨌든 싸우지 마. 그리고 도동수 씨. 같은 팀으로 대회에 나가는 거면 예의 좀 지키시죠. 판온 1 김태현을 싫어하는 건 아는데 여기 김태현은 이름만 같을 뿐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
이세연이 끼어든 덕분에 도동수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개망신을 당하지 않고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이다.
“흥. 내가 누구 친구인 줄 아나?”
“친구가 있었어?!”
“…….”
도동수의 주먹이 더 불끈 쥐어졌다. 이세연은 태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도발 좀 그만해!
-아니, 시비 먼저 건 놈은 저놈이잖아!
-네가 판온 1에서 그렇게 팼잖아!
-…….
아무리 태현이라도 이 말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김태현, 잘 봐라.”
“……?”
“난 제카스의 말을 믿는다.”
판온 1의 김태현이 태현이라는 제카스의 말. 그 말을 믿는다는 건 한 가지 의미였다.
“거, 그놈 나한테 당해서 속 좁게 발목 잡는 거라니까.”
“예전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지.”
도동수는 태현을 노려보았다.
제카스가 그렇게 주장했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고 이세연도 아니라고 하니 좀 흔들리기는 했다.
그러나 오늘 태현과 직접 마주 보니 알 수 있었다.
제카스는 진실을 말한 것이다.
저런 놈이 세상에 두 명 있을 리 없다!
“난 너와 협력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아, 됐고. 깃발 꽂자니까. 쫄았냐?”
도동수의 이마에 혈관 하나가 돋았다. 가장 원초적으로 도발하는 방법.
쫄았냐?
“MBS에서 부탁을 하니까 나오기는 했지만…….”
“야. 쫄았냐고.”
“내가 너하고 협력해서 너 좋을 일 해줄 거라고는 절대 기대하지 마라!”
“쫄았네. 저거. 쫄았지?”
도동수는 부들부들 떨며 가버렸다. 이세연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대회와 전혀 다른 모습의 대회가 될 것 같았다.
* * *
“도동수는 참 한결같아. 그렇지?”
“예?”
최명성 팀장은 화면 속 도동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판온 1에서나 2에서나 똑같다고.”
“도동수는 판온 2에서 훨씬 더 강해지지 않았나요?”
“스탯이나 스킬, 장비 면에서는 강해진 편이지. 그렇지만 속은 그대로야.”
“??”
“중요한 순간에 모든 걸 내던지지 못하고 겁을 먹잖아. 저러니까 도적 직업 들고 대장장이한테 지지.”
최명성은 쯔쯔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최명성이 보기에 도동수는 겁쟁이였다.
판온 플레이어들은 도동수가 거칠고 겁 없는 강력한 플레이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위장일 뿐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저렇게 움츠러드는데 어떻게 뭔가를 해낼 수 있겠는가!
그에 비해 태현은 정반대였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는 사람!
최명성 팀장의 말을 들은 윤주환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그냥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닌가?’
“아니야.”
“헉!”
“너 지금 그냥 성질이 더러운 거 아니냐고 생각했지?”
윤주환은 입을 떡 벌리고 최명성을 쳐다보았다.
“내가 너하고 몇 년을 같이 일했는데 네 생각을 모르겠냐. 김태현이 물론 성질이 더럽기는 하지.”
태현이 들었다면 아니라고 발끈했겠지만, 최명성은 거기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태현의 성질은 더러운 게 맞았으니까!
“성질이 더러운 거랑, 중요한 순간에 자기를 던질 수 있는 건 전혀 다른 거라고. 성질이 더러워도 겁쟁이는 그런 걸 절대 못 하거든. 보통 이런 사람이 큰 승부에 강하지.”
“그, 그렇군요.”
윤주환은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래도 지금 김태현이 한 건 자충수 아닐까요?”
“왜?”
“좀 있으면 같이 대회에 나가게 될 팀원인데 굳이 싸움을 걸 이유가 없잖습니까. 잘 말해서 오해라고 달랬으면…….”
“어차피 김태현이 친절하게 대해줬어도 도동수는 김태현을 의심했을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됐어. 저기서 굽히고 들어가면 김태현이 아니지. 그리고 도동수는 김태현을 방해 못 해.”
“예? 그건 왜죠?”
“그릇이 다르거든.”
“……아니, 김태현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지만 지금 상황은 좀 다르잖습니까! 5:5라구요!”
“5:5든 10:10이든 달라지는 건 없다니까. 내기할까?”
“윽…….”
자신만만한 팀장의 태도에 윤주환은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