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4화
“하하. 나의 벗 상윤아!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구나. 내가 귓속말을 끊었을 리가 없잖니? 분명 네트워크 오류가…….”
-헛소리하지 말고. 진짜 잘츠 왕국 골랐냐?
“응.”
귓속말으로 한숨이 들려왔다.
-아……. 진짜. 하지 말라니까. 잘츠 왕국은 또 멀어서 내가 도와주러 가기도 힘들어.
“안 도와줘도 괜찮거든?”
-에이. 그래도 안 도와줄 수가 있나. 그보다 너 판타지 온라인 매니아 사이트 알지?”
관련 공략이나 정보 글, 영상부터 시작해서 게임에 관련된 콘텐츠는 모두 모인 사이트였으니 태현이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태현은 한때 그 사이트의 유명인사였다. 대장장이로 랭커들을 때려잡고 다녔으니…….
“알지.”
-판타지 온라인 2 나오면서 사이트 이름도 앞에 2 달았거든? 그거 빼고 나머지는 그대로야. 게임 내에서 접속 가능해. 나한테 매번 묻는 것보다 가서 검색하는 게 빠를 거야.
“오. 그래?”
-거기서 잘츠 왕국 한 번만 검색해보면 내가 왜 가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가 갈 거다.
태현은 말을 듣자마자 창을 키고 검색을 했다.
-초보자인데 잘츠 왕국 골랐어요 ㅠㅠ
-캐릭 지우고 다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잘츠 왕국인데 그냥 접을까요?
-잘츠 왕국인데 도와주실 분?
“…….”
태현은 씩 웃었다.
이 하드코어 난이도의 예감!
-너 웃고 있냐?
“무슨. 사람을 뭐로 보고.”
-넌 좋아할 거 같은데. 아니면 말고. 그래서 뭐가 아쉬워서 귓속말 한 건데?
“아. 보너스 스탯이 쌓였는데 직업에 맞춰서 분배 좀 하려고. 어떤 직업이 가장 좋을까? 아. 여기서 말하는 건 어떤 직업이 가장 망했냐는 뜻이야.”
-알고 있어. 자식아.
“대장장이 어때? 1에서는 엄청 구렸잖아.”
-대장장이? 아냐. 2에서는 되게 인기 좋아. 대장장이 계열 희귀 직업만 얻어도 길드에서 못 모셔가서 안달이다.
“엥? 그래?”
태현은 김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장장이는 1에서 정말 할 거 없는 놈들이나 키우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런 캐릭터를 이끌고 잘나가는 직업을 이기는 맛이 있었는데…….
“그럼 대장장이는 패스. 안 해.”
-하하하하. 생각해 보니까 네가 싫어할 만한 이유가 하나 더 있어.
“……?”
-내가 만난 게 벌써 세 명이거든?
“뭐가 세 명이야?”
-너 사칭하는 놈.
“……???”
태현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야?”
-네가 1에서 대장장이로 애들 패고 다녔잖아. 그게 워낙 인상 깊었고. 그래서 여기서 너 따라 하는 놈들이 있다고. 이름도 ‘김태현’으로 짓고서 대장장이 테크트리 타는 놈들.
“에이……. 김태현 정도면 흔한 이름인데. 그냥 겹친 거겠지.”
-아니야. 생김새 보니까 네 1 때 모습이랑 엄청 비슷해. 의도적으로 노렸어. 내가 널 얼마나 봤는데 그걸 못 알아보겠냐.
판타지 온라인 2의 외모는 꽤나 큰 폭으로 수정이 가능했다. 성별까지는 바꿀 수 없었지만.
게다가 1에서 태현은 언제나 투구를 쓰고 다녔다. 겉모습만 비슷하게 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특이한 놈들 다 보겠네. 그걸 왜 따라 해?”
-네가 할 소리는 아니거든? 어쨌든 걔네들이 너 보면 반가워하겠다. 아니면 같은 짝퉁으로 알지도 모르고. 으하하!
“둘 다 사양이다. 그나저나 대장장이가 그렇게 강캐면 안 끌리는데……. 야. 스탯 중에서 가장 안 쓰이는 스탯이 뭐지?”
-너 지금 아직 백수지?
“뭐? 난 백수가 아니라 대학생…….”
-자식아. 게임 내에서!
“아. 응.”
-그럼 찍을 수 있는 스탯이 마력, 힘, 민첩, 체력, 지혜, 행운 정도 아닌가?
직업을 얻고, 추후로 퀘스트를 깨면 깰수록 다른 능력치도 나온다는 게 상윤의 설명이었다.
-통솔력이나 마법 공격력, 마법 방어력 같은 건 지금 나오지도 않을 테니까…….
“쓸모없는 스탯 알려달라고. 쓸모 있는 거 말고.”
-가장 쓸모없는 스탯? 그건 쉽지. 행운이야.
“행운? 그거 나름 쓸모 있지 않아?”
-쓰이는 곳이야 많은데 효율이 너무 안 좋아. 아무리 올려봤자 조금 확률 올라가는 게 끝인데. 솔직히 다들 스탯 하나가 아까운데 행운에 쓰는 놈이 어딨겠냐. 너 아니면. 근데 너 직업부터 먼저 골라야 하지 않아? 아무리 망캐를 키워도 스탯은 직업 컨셉에 맞춰야지.
“직업은 정했어.”
-……? 뭘로?
“전직을 안 하는 거야.”
-……뭐?
“전직 안 하면 백수로 유지잖아? 초기 상태.”
-야, 미친놈아! 초보자로 계속 플레이하는 놈이 어딨어! 직업 스킬 안 받을 거야?
“아주 좋네! 별명도 그럴듯할 거야. 백수의 왕. 미친 대장장이보단 낫지 않냐?”
최상윤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판타지 온라인 2는 백수 상태, 이른바 초보자 상태에서 전직을 해야 본격적인 직업 스킬과 퀘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전직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걸 다 포기한다는 걸 의미했다. 당연히 캐릭터도 엄청나게 약해졌다.
“전직은 안 하고, 스탯은 모조리 행운에. 판타지 온라인 1에서 행운 때문에 손해 봤는데 이번에는 좀 이득 보려나?”
-이득을 보려면 최소한의 조건이 있어야지, 너 그렇게 키워서 잘츠 왕국 밖으로는 빠져나올 수 있겠냐?
상윤은 역마차를 떠올렸다. 레벨이 낮은 이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지만, 이 역마차는 NPC가 모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NPC는 의외로 깐깐했다.
레벨이 낮거나 전직을 안 한 사람 같은 경우는 대놓고 무시를 하는 것이다.
“걱정 마. 걱정 마. 언제나 게임에는 방법이 있다고.”
-그래……. 변태 같은 플레이 잘하고,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
“그래. 고맙다.”
귓속말이 끊어지자 태현은 바로 스탯을 투자했다.
‘전부 행운에.’
* * *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토끼 어떻게 잡았대?’
태현은 스스로의 컨트롤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간신히 한 마리를 잡은 상황. 다른 사람들은 더 어려울 게 분명했다.
태현은 다시 판타지 온라인 2 매니아 사이트를 켰다.
“잘츠, 잘츠…….”
-잘츠 왕국에서 자꾸 토끼한테 죽는데 사냥 어떻게 해요?
“오. 여기 있다.”
답변은 친절했다.
-파티 사냥 하셔야 해요. 솔직히 초보자들이 혼자서 잘츠 왕국 바깥 토끼 잡는 건 무리거든요.
“음. 난 잡았는데.”
-적어도 다섯 명 정도로 파티 짜세요. 억울하시겠지만 미리 레이드 연습한다고 생각하시고……. 힘내서 잘츠 왕국 빠져나오세요!
태현은 창을 닫았다.
“굳이 파티 사냥 할 필요 있나.”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파티를 찾아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플레이어 숫자가 더 적어서 눈에 띄었다. 우르르 모여 다니는 플레이어들을 곧 볼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현은 혼자서 토끼에게 덤벼들었다.
갈 길이 멀었다.
약한 캐릭터로 강한 캐릭터를 이기는 건 겉보기에는 멋있어 보였지만, 그 뒤로는 온갖 노가다와 고생이 담겨 있는 일이었다.
* * *
이름 : 김태현
레벨 : 10
직업 : 백수
HP(체력) : 190
MP(마력) : 190
힘 : 10
민첩 : 10
체력 : 10
지혜 : 10
행운 : 55
보너스 스탯: 0
‘괜찮군. 다른 건 몰라도 경험치는 좀 후하게 주는 것 같아.’
하긴, 그런 난이도의 몬스터를 뿌려놓고 경험치까지 적게 주면 그게 사기였다.
다른 플레이어가 봤다면 미친놈 보듯이 봤을 스탯창을, 태현은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아이템 확인.’
조리되지 않은 토끼 고기(12)
신선하지만 조리하지 않고 먹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
판타지 온라인 1에서는 요리도 나름 중요한 요소였다.
먹으면 그 요리에 따라 일시적인 버프나 영구적인 버프가 걸렸기에 조금 난이도 있는 레이드를 하는 플레이어들은 무조건 요리를 챙겨 먹었다.
판타지 온라인 2는 1과는 많이 달랐지만, 이런 요소에서는 비슷할 것 같았다.
‘불이라도 피워서 구워볼까. 별로 맛은 없겠지만.’
“이보게. 아까부터 보니, 토끼를 참 맛깔나게 잡더군.”
“……?”
태현은 고개를 돌렸다. 수염이 덥수룩한, 산적같이 생긴 사냥꾼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NPC?’
“나는 사냥꾼 어거스트네. 그런데 자네는 신참 모험가 같은데, 어째서 나를 찾아오지 않았지?”
[초보자 퀘스트-사냥꾼 어거스트를 찾아가라의 내용이 변경되었습니다.]
<초보자 퀘스트-사냥꾼 어거스트를 찾아가라>
사냥꾼 어거스트는 풋내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험가가 그를 찾아오지 않고 혼자 사냥하고 있는 것에 궁금해하고 있다.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게 좋을 것이다.
‘으음…….’
태현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잘츠 왕국의 도시 중 하나인 타이럼시였다.
잘츠 왕국 자체가 산악 지대에 위치한 국가였고, 타이럼시는 그중에서도 산 가운데에 지어진 도시였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마을 같다고 악평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규모가 작고 난이도가 높았다.
여기서 타이럼시의 특색을 읽을 수 있었다.
‘사냥꾼들이 대접받는 곳이겠지.’
평지가 많은 나라에서는 기사단의 세력이 높듯이 산지가 많은 나라에서는 사냥꾼의 세력이 높았다.
판타지 온라인 1에서도 그런 식이었다.
태현은 아직 아무런 명성도 없는 백수, 아니 모험가였다. 그에 비해 상대는 사냥꾼.
성질을 거스르게 해서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퀘스트의 설명도 그렇고…….
태현은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비굴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고개가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어거스트 님. 제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져서, 만족스럽게 찾아갈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허! 요즘 오는 모험가들은 다 얼빠진 놈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나름 정신이 있는 놈이 있었군!”
[어거스트가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이라면 충분하다. 게다가 아까 토끼를 잡는 걸 보니 기초 실력도 충분하더군. 오랜만에 가르칠 기분이 나는데? 어때, 내 밑에서 배워보지 않겠나?”
<희귀 직업-타이럼 사냥꾼 전직 퀘스트>
사냥꾼 어거스트는 타이럼 사냥꾼의 일원이다. 잘츠 왕국에서도 타이럼 사냥꾼은 명예로운 직업. 흔히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아닐 것이다.
그의 시험을 통과해라.
보상:타이럼 사냥꾼으로 전직.
일반, 희귀, 영웅, 전설로 구분되는 직업. 희귀만 되어도 플레이어들은 고민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태현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한 건 괜찮다. 누구나 처음에는 다들 그렇지.”
<희귀 직업-타이럼 사냥꾼 전직 퀘스트>
사냥꾼 어거스트는…….
‘아, 왜 이리 끈질겨?’
다시 뜨는 창을 치우고, 태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어거스트 님께서 좋게 봐주셔도 저는 스스로를 좋게 봐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한테 떳떳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직하기 싫은 태현의 몸부림은 처절했다.
‘이거 안 통하면 욕이라도 해야 하나? 도시 내에서 페널티가 붙긴 하겠지만…….’
[어거스트가 매우 좋아합니다.]
‘젠장!!’
“그래. 그게 남자고, 그게 타이럼 사냥꾼의 영혼이다!”
어거스트는 웃으면서 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남자가 그러겠다는데 억지로 시키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지. 그러면 원할 때까지 스스로 훈련하도록. 타이럼 사냥꾼으로 배우고 싶다면 언제든지 와도 좋다.”
“감사합니다!”
‘저 인간 주변은 무조건 피해야겠군.’
태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거스트는 좋아했다.
“아참. 자네 같은 신참은 사냥 준비나 뒤처리가 여러모로 귀찮을 거야. 나한테 오면 좋은 가격에 물건을 넘겨주겠네.”
[한층 싼 가격으로 어거스트의 가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거스트 님!”
“그래. 그래. 좋은 하루 보내게.”
태현은 떠나려던 어거스트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 지금 좀 이용하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