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저택을 벗어나면서부터 어딘지 허전하던 가슴 한구석이 따뜻한 체온으로 가득 채워진다. 긴장으로 한껏 굳어졌던 몸이 파이의 체취에 셔벗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러나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당장에라도 이 왕궁이 무너질 수 있는 엄청난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파이, 진정해요. 마력은 안 돼요.”
일단 나에 관련된 일이라면 몸이 먼저 반응하시는 드래곤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리브엘을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답삭 잡아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 공격하면 안 됩니다. 내 말 알아들었어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선홍색의 눈동자에 살의가 가득하다. 이 눈빛은 언제 봐도 숨이 멈춰질 것만 같았다. 엄청나게 무서웠지만 꾹 참고 그를 똑바로 마주하자, 다행히 파이의 눈빛이 차츰 가라앉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여전히 씨근덕거리고는 있었지만, 많이 침착해진 파이가 그제야 내 안부를 묻는다. 그래서 나는 보란 듯이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아주 무사해요. 그러니까 그 살벌한 기운 좀 없애라고!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네 몸에 추적 장치를 걸어놓았지.”
“어디에?!”
“귀 뒤에.”
재빨리 손가락으로 귀 뒤를 만지자, 왼쪽 손가락 끝에 납작하고 작은 무언가가 걸린다. 이걸 또 언제 부착해놓은 거람?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자기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까만색 알의 반지를 내게 들이미는 파이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네 기분이 좋지 않을수록 이 보석이 까맣게 변해. 지금 까맣게 변한 거 보이나? 그래서 바로 왔지. 저 흡혈귀 새끼가 네게 몹쓸 짓을 하려는 게 눈에 훤히 보였거든.”
나는 굳이 리브엘을 ‘흡혈귀 새끼’라고 비하하는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리브엘이 나를 죽이려고 공격했고, 그런 리브엘에게 꽤 실망한 상태였으니까.
만약 파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지금쯤 리브엘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내 목덜미를 덮쳤을 거다. 피를 쪽쪽 빨려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겠지. 아무리 영생을 가졌다 해도 파이처럼 회복력을 타고 난 것도 아니라서 내 몸은 평범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혼인도 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뻔했어. 억울해서 죽은 뒤에도 유령으로 남아 밤마다 리브엘을 괴롭혔을 거야.
“딱 맞춰서 와준 건 고마운데, 그렇다고 폭주하면 안 돼요. 여기 치치르자 왕성이니까 어디 흠집 내면 내가 곤란해진단 말예요.”
다행히 파이의 얼굴에 돋아난 검은 비늘이 가라앉았다. 나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면서 파이의 옷깃을 더 꽉 잡은 뒤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우리와 멀리 떨어진 창가 쪽에 서 있는 리브엘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가 걸린 채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맹렬하게 파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알겠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오랜 시간 빚어와 몸에 밴 자연스러운 연기라는 것을.
“리브엘.”
내가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워진다. 그리고 여전히 기묘한 광채가 깃든 초콜릿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에게 목덜미를 물리게 될 뻔했던 일을 겪고 나서 보니까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저 눈빛이 꼭 맛있는 음식을 향한 갈망같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 네 행동은 용납할 수 없어.”
“…수명이 늘어났다는 말, 사실이야?”
이야기의 논점이 빗나가는 질문이다. 갑자기 내 수명에 대해서 왜 묻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이야. 그런데 그건 왜?”
“그래?”
다시 리브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어딘지 소름이 돋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자 파이가 내 허리를 감은 팔을 더 바짝 끌어당기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꿈도 꾸지 마라, 흡혈귀. 다시 한번 치즈에게 접근하면 살아 숨 쉬는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
그러자 리브엘도 코웃음을 흘리며 삐딱하게 선다.
“치즈.”
파이의 말은 싹 무시한 그가 나를 불러서 나는 살짝 긴장을 머금으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응?”
“아까 미안했어. 너무 충격을 받아서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나 봐. 사과할게. 어차피 서로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깔끔하게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했으면 해.”
갑자기 웬 사과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몰라서 당황했다. 그것도 방금까지 내 목덜미를 깨물겠다는 듯 뾰족하게 드러났던 송곳니도 사라진 상태다.
“그, 그래? 그러던지. 그런데… 갑자기 왜?”
“아까 네가 그랬지. 신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고.”
어쩐지 불안하다. 상대를 녹일 만큼 달콤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가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파이는 나를 안은 채로 한발 물러났지만.
“네게 끼워준 반지는 내 어머니의 것이었어. 다시 가공하긴 했지만. 그 반지를 지닐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네 자리는 항상 비어있으니까…….”
“그만 가지.”
리브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이가 손으로 내 눈두덩을 덮어버린다. 가벼운 바람소리가 귓가에 스치고 곧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여기가 수도의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곳 근처인가 보다. 그 살얼음판 같던 자리를 피해서 좋기는 한데, 방금 리브엘의 말이 잔상으로 남아서 울적해졌다.
아무래도 리브엘이 나를 포기할 생각은 없는 것 같지? 또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그 첨예한 송곳니를 드러낼 것 같은데.
“반지라니?”
내 눈두덩에서 손을 떼어낸 파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정수리에 내리꽂힌다. 그게 또 얼마나 살벌하던지. 두 맹수 사이에서 잘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그중 한 맹수가 너무 무섭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그, 그게… 아니, 데이트를 했으니까 뭐, 청혼 정도는 받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반지가 뭐 대수람?”
“청혼?”
“흠, 그렇게 되었어요. 거절하긴 했지만.”
나는 파이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바닥만 쳐다봤다. 그러자 파이가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느릿느릿 젓는다.
“앞으로 데이트는 안 돼. 그놈을 만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 아무리 네가 그놈이 좋다고 해도 내가 허락할 수 없어.”
“나도 딱히 다시 만날 생각은 없네요.”
내가 뚱하게 대꾸하자 내 대답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파이가 뒤에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잘 생각했다. 만약 그놈이 널 조금이라도 다치게 했으면 그놈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거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전신이 찌릿찌릿하다. 심장이 간질거리면서 폭발이라도 할 기세로 빠르고 세차게 요동친다. 등에 밀착된 그의 단단한 상체가 내 모든 신경을 일깨웠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르고 그의 뺨이 닿은 내 정수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하려고 했었구나.’
이렇게 곁에만 있어도 설레는데. 그의 품이 항상 나를 기분 좋게 해줬었는데. 따뜻한 체온을 가진 큼지막한 손이 내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그 야릇한 감각이 너무 기쁜데.
나를 미치게 만드는 이 남자를 지금껏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니.
왜 레이라가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민망해져서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숨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 추, 축제 보러 갈래요! 축제 구경하고 싶었단 말이야!”
내 진심을 확인하게 된 지금 이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다. 내가 세웠던 계획은 리브엘에게 벗어나 왕궁 밖에서 마차를 잡아타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거였다. 그리고 저택에서 나를 기다리는 파이에게 달려들어 키스부터 하고!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한 그에게 ‘나랑 혼인해!’라고 박력 있게 외치는 거였는데.
리브엘이 내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던 것 때문에 내가 너무 당황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파이가 나타난 것도 놀랐고.
일단 분위기를 정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을 힘껏 떼어냈다. 그러자 그도 팔에 힘을 풀어서 나를 놓아주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아당긴다.
“지금 그 끔찍한 상황을 겪고도 축제를 구경하겠다고?”
굉장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묻는 파이를 한번 슬쩍 보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지금 이 쑥스러운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면 밤중에 이불을 발로 뻥뻥 찰 것 같은 느낌이다.
“나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보다 축제를 보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긴 하네요.”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제발 좀 가자! 이 눈치 없는 드래곤아!
“알았다. 그럼 가보지.”
다행히 피식 웃는 그가 내 옆에 서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또 뺨에 소름이 돋날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해로워, 아무리 봐도 정말 해로운 남자야.’
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축제가 펼쳐지는 곳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서 있던 골목길을 나서자, 바로 시끌벅적한 축제가 한창인 곳이 나타났다. 연말을 기념하는 큰 축제라더니. 생각보다 엄청난 축제였구나. 곳곳에서 신나는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길거리 음식들의 진한 향신료 냄새가 뇌를 자극한다.
게다가 마치 대낮처럼 환한 불빛들의 향연이 펼쳐진 곳에 서 있으니까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내 손을 꼭 잡아주고 있는 파이와 함께 있어서 더 가슴이 설렜다. 축제보다 그와 맞잡은 손바닥에 새겨지는 따끔따끔한 감각이 좋았다.
꼭 뜨거운 열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프리센 왕국의 축제하고는 또 비교가 안 되네요.”
“거긴 이것에 비하면 소규모지. 부유한 강국은 아니라서.”
아카데미가 설립되어있는 마세티앙 제국의 수도에서 열리는 축제와 비슷했다. 축제의 꽃은 역시 길거리 음식이지. 향신료를 아낌없이 뿌리고 진한 색감의 소스로 옷을 입은 꼬치들이 불판에서 맛있게 구워지고 있었다. 눈으로 봐도 윤기가 얼마나 잔뜩 흐르는지. 방금 식사를 하고 왔는데도 군침이 돌았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침만 흘리지 말고.”
“내가 언제 침을 흘렸다고 그래요?”
“벌써 네 번이나 침을 삼켰잖아.”
이 남자는 대체 눈이 옆에도 달린 건가. 정말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알면 알수록 미궁 속에 빠지는 기분이다.
“저거 먹을래요.”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고 아무거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필이면 내 못된 손가락이 가리킨 꼬치는, 쪼글쪼글하게 잡힌 주름이 그대로 살아있는 커다란 애벌레였다. 생긴 것도 징그러워서 순간 깜짝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 연기를 선보였다.
“…진심이야?”
“농담이에요.”
불 위에서 붉은 소스를 머금어 구워지는 애벌레 꼬치를 보고 토기가 쏠리는 걸 겨우 참았다. 다행히 그 옆에 평범한 닭꼬치가 있어서 그걸 가리켰다.
“원래 저걸 먹으려고 했던 거예요. 내가 실수했어요.”
아닌 척 뻔뻔함을 유지하면서 재빠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가 노릇노릇한 닭꼬치 하나를 골랐고, 파이가 값을 지불했다. 오늘따라 닭꼬치가 굉장히 맛있어 보였다. 꼬치는 이럴 때 아니면 먹어볼 수 없는 특별한 맛을 자랑하지. 어렸을 때는 저렴하면서도 미각을 행복하게 만드는 진한 양념이 건강에 안 좋다고 먹지 못하게 했었다. 이제는 다 컸으니까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맛있나?”
한 입 입에 넣자마자 매콤함과 달콤함이 적절하게 섞인 맛이 가득 퍼진다.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자 상체를 살짝 숙여오는 파이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내 키스보다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