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07화 (107/132)

# 107화

왜 또 저렇게 쳐다보는지. 먹고 있을 때 누가 쳐다보면 굉장히 부담스럽단 말이다.

“흠, 파이도 조금 먹어봐요. 꽤 괜찮아.”

“나는 됐다.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또 그 소리.”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네 그 행복한 표정은 늘 나를 기쁘게 한다. 그거면 족해.”

심장이 간질거린다. 달콤하게 스며드는 말투에 머리가 다 어지러워지기도 했다. 내 손짓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어서 나는 먹는 데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음식 맛은 평균 이상이었다. 좋은 식재료에 정성을 얼마나 한가득 부었는지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이 레스토랑의 간판 요리인 생선요리들이 내가 먹던 맛과 다르지 않았다. 귀빈이라고 데코레이션을 조금 더 신경 쓴 것 외에 맛은 똑같았다. 만약 맛이 달랐으면 사람 차별하는 거냐고 화가 났을 것이다.

“레이라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 아이도 너만큼 즐기고 있어. 오히려 레이라가 더 미안해하더군.”

“뭐가 미안하대요?”

“셋이 함께 있으면 치즈 네가 너무 부럽다는 눈으로 보곤 했다던데.”

어쩐지 뜨끔했다. 그랬던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으니까. 하필 그 말을 파이에게서 전해 듣게 되어 얼굴에 피가 쏠릴 지경이다.

“그, 그건…….”

“추궁할 생각은 아니다. 그저… 네가 어떤 기분으로 그 두 사람을 보고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거든.”

아쉬운 한탄을 하듯 뱉어내는 그 말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나는 빈 포크를 꼭 쥐고 그를 마주 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 얽힌다. 어쩐지 그의 달콤한 눈빛이 나를 어루만져주는 느낌이다.

조금 아까 그의 입술이 닿았던 내 입술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그의 섬세한 손가락이 내 몸을 더듬고 있는 착각이 느껴진다.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유두가 단단해졌는지 드레스에 눌리는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이건 아니야!’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고 다시 먹는 데 집중했다.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해서 뱃속이 화끈거렸다. 분명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도 그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신경은 이미 내 몸의 반응에 쏠려있었다. 정말, 어제에 이어 또 두통이 이는 기분이다.

“천천히 먹어라. 체하겠어.”

작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가 마력을 이용해 내 옆에 물이 담긴 유리잔을 놓아주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게 있다면 그가 나를 도와준답시고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지 않았단 거다. 그랬다면 내 상태를 알아챘을 게 틀림없을 테니까.

나는 간신히 식사를 마쳤다. 나와 달리 파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정을 잃지 않았다. 다만 그가 전에는 손으로 직접 음식을 골라주었지만, 이번에는 마력으로만 이것저것 내 앞 접시에 덜어주었다.

아마도 그건 나를 위해 배려를 해준 거겠지. 그 배려가… 슬프게도 내 반응을 눈치채고 일부러 닿지 않기 위함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 몸의 변화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아는 짐승이므로.

다행히 파이는 식당을 나와 저택에 돌아올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덕분에 야한 생각으로 가득한 내 머릿속을 어느 정도 식힐 수 있었다.

이미 해가 져서 밖은 어두웠는데 저택도 고요했다. 저택 입구에서 레이라를 한번 찾아가 봐야 하나 고민하다가 관뒀다. 괜히 내가 방해하면 미안하니까.

“오늘도 올라가서 바로 잠들 계획인가?”

계단을 올라가려고 한발 딛자마자 뒤에서 파이가 묻는다. 그래서 나는 첫 번째 계단에 한발을 얹은 채로 고개만 돌렸다.

“졸려야 잠을 자겠죠? 그런데 지금은 별로 졸리지 않아서 새로운 메뉴를 구상해볼까 해요.”

“그럼 같이하지.”

“…파이가 무슨 구상을 해요? 이건 레이라도 손대지 않는 나만의 영역이라고요.”

“혹시 모르지 않나. 만약 새로운 메뉴를 직접 만들고 싶다면 바로 가게의 주방으로 데려다줄 수도 있어.”

아, 그건 조금 혹한다.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것보다 직접 만들어보는 게 더 도움이 되긴 하니까.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와주겠다는데 굳이 사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지금처럼 내게 조금의 거리만 유지해준다면 아까처럼 쉽게 현혹될 일은 없을 거다.

“좋아요. 대신 일 하는 데 방해하지 말아요.”

“명심하지.”

그렇게 나는 능구렁이 백 마리를 몰래 품고 있는 드래곤의 속도 모르고 내 방에 출입을 시켜버리고 말았다.

방에 돌아와 테이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내 비밀의 레시피가 담긴 노트를 펼친 후 신메뉴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런 내 맞은편엔 파이가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신경 쓰여…….’

분명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새로운 레시피를 연구하는 내 머리통을 보고 있는 것뿐인데.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돌처럼 가만히 있는데도 내 신경이 자꾸만 그쪽으로 쏠린다. 그냥 레어로 돌아가라고 할 걸 그랬나?

“파이. 나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어요. 사용인들에게 부탁하면…….”

“여기.”

내 레시피 노트 바로 앞에 붉은 홍차가 담긴 찻잔이 놓였다. 잠깐 내보내려고 했던 건데, 그 마력이 참 좋다가도 이럴 때는 곤란하단 말이지?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작게 건네고 모른 척 차를 마셨다.

“…이거 뭐예요?”

“딸기로 만든 홍차라던데. 왠지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눈여겨보고 있었지. 입에 맞나?”

홍차는 다 쓰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꽤 달았다. 그의 말대로 딸기의 향도 진하게 배어있었고. 향이며 맛이며 딱 내 취향에 들어맞았다. 딸기로 만든 홍차라니. 생각도 못 했던 건데.

“맛있어요. 아주 좋아요. 이런 게 있다는 걸 알았으면 진작 사들였을 건데. 어디서 났어요?”

“사실 마세티앙 제국의 황제가 특별히 보내온 네 선물이었다. 지난 황실 무도회 이후에.”

다른 것보다 그가 나와 이별을 한 이후에 받은 내 선물도 간직하고 있어 주었다는 것에 아주 조금 감동했다. 이 선물을 보면서 내 생각을 했겠지? 어쩐지 기분이 묘하게 일렁거린다.

“흠, 내 입엔 아주 딱이네요. 마세티앙 황제 폐하의 입맛이 나와 비슷한 건가?”

“내 귀여운 연인은 아직 어린아이 입맛이라 차나 와인의 깊은 풍미는 아직 느끼지 못하는 미각을 가졌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걸 주더군.”

연인……?

그렇지 않아도 평정을 잃어가던 심장이, 연인이라는 달콤한 단어에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상체를 앞으로 숙여 한쪽 팔을 테이블에 얹어 턱을 괴는 그의 요염한 눈빛 때문에 더 그렇다.

그가 나를 연인이라 칭할 때마다 왜 이렇게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기쁨이 쏟아지는지. 분명 나는 우리가 헤어진 사이라고 여겼는데 그는 반년 전에 내게 보였던 그 애정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아니, 반년 전보다 더 애틋함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 말고도 네가 좋아할 만한 차들이 잔뜩 있어. 언제고 네가 돌아오면 꼭 전해주겠다고 일부러 보존마법을 걸어 놨다.”

“어떤… 차들인데요?”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레몬이나 복숭아로 만든 것도 있었던 것 같고. 달달한 과일이나 열매로 만든 차들이더군. 현 황제의 첫째 딸이 너와 비슷한 입맛을 가졌다고 그랬다.”

“첫째 딸?”

“아마 올해 아홉 살쯤 되었을까.”

…내가 아홉 살과 똑같은 입맛이라는 거네. 쓴 게 맛없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맛없는 걸 맛없다고 하는데 잘못된 것도 아니고 말이야.

“흥. 입맛이 어려서 미안하네요.”

“탓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네 그 귀여운 입맛이 마음에 들어. 사실 나 역시 차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파이가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고는 내게 조금 더 얼굴을 들이민다. 나는 찻잔을 두 손에 꼭 쥔 채 그에게 홀리듯 상체를 가까이 숙였다. 그러자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는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내 뺨을 가볍게 쓸어내린다.

“네가 그 달콤한 음식을 섭취하면, 네 몸에서 달달한 향이 느껴져. 나는 그게 꽤 마음에 들거든.”

순간 얼굴에 열기가 급격하게 치솟아 올랐다. 어쩐지 실내가 갑자기 더워진 느낌이다.

“이렇게… 네 뺨이 붉게 달아오르면 더 향기롭지.”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짐승은 페로몬이라는 걸로 상대를 유혹한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몰라도 파이에게서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묘한 향기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시원한 것 같으면서도 따뜻한 체취에 잠시 취한 듯 넋을 놓아버렸다. 덕분에 그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얼굴이 가까워진 상태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키스해도 될까?”

“…응?”

몽롱한 정신으로 그를 마주 보고 있다가 뒤늦게 잠시 이성을 되찾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테이블 위로 몸을 숙여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온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나는 두 눈을 빠르게 팔랑거리며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 안 되는데…….’

정말 웃기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직 양치하지 않았다는 걱정이었다. 특히나 생선요리를 먹어서 혹시라도 입 냄새가 심할까 봐 우려되었다. 게다가 손에 찻잔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다급히 밀어냈다.

하지만 파이는 내가 키스를 거부하는 줄 알았는지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또 내 손에 들린 찻잔을 빼앗아 옆으로 밀어버린 뒤에 내 뒤통수를 감싸서 밀빛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응, 으… 흐…….”

단단한 손끝으로 두피를 살살 간질이는 느낌에 허리가 들썩거렸다. 혀를 내 자그마한 동굴 안으로 밀어 넣어 바짝 긴장한 내 혀를 가볍게 휘감아 빨아들인다. 그저 서로의 혀가 얽힌 것뿐인데 꼭 모아 붙인 허벅지 안쪽이 제멋대로 경련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나를 괴롭혔던 야한 장면들과 감각들이 다시금 파도처럼 밀려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아, 향기로워. 네 몸에서 딸기향이 느껴져.”

숨을 헐떡거리는 나와 다르게 꽤나 침착한 목소리로 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는 그가 기분 좋게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목덜미를 혀로 길게 핥아 올려서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간지러우면서도 짜릿한 자극. 그 익숙한 감각이 목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 뜨거운 열기에 잠식된다.

“치즈.”

“아, 안 돼…. 아응.”

목덜미를 할짝거리던 그가 조금 더 위로 올라와 귓불을 입술로 가볍게 문다. 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냈다가 혀로 귓불을 농락하는 그의 거친 숨소리가 너무 크게 울렸다.몸의 반응이 너무 빠르다.

그동안 그와의 뜨거웠던 관계를 떠올릴 때면 속옷을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금방 젖어버렸었다. 상상만으로도 뱃속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얼마나 애달팠는지. 당장 내 안을 가득 채워주던 그의 것이 절실하다는 생각만 수백 번을 한 것 같았다.

“알아. 네가 아직 나를 허락하고 싶지 않다는 거. 억지로 하지 않아.”

“그, 흐… 그럼 떨어져…. 으흡!”

“널 기쁘게 해주고 싶어. 손으로 애무하는 것도 꽤 좋아했으니까. 꽤… 흥분한 것 같은데, 네가 절정에 취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하고.”

“으, 하… 그러면서 또… 멋대로 은근슬쩍!”

육체는 이미 쾌락의 기억에 열이 가득 퍼진 상태고 가라앉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를 향해서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는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열기에 허덕이는 사이에 그가 나를 두 팔로 조심히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붉게 피어난 욕망의 그림자가 그의 눈동자에 짙게 깔리고 있었다.

“자, 그럼… 반년간 쌓인 애증을 천천히 풀어보도록 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