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대체 왜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지쳐버리게 하는 그를 왜, 난 떠나지 못했을까? 그가 날 필요로 하는 건 내 몸일 뿐이야. 가끔 나를 향하던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은, 지금 저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진심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뾰족하게 날이 선 심장을 최대한 다스렸다. 화가 나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제… 그만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그가 이렇게 철벽처럼 굴어대니 이 이상 감정소비를 하다가는 혀 깨물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매번 자기 이익만 챙기고,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파이에게서… 더는 머물 수 없다. 머물고 싶지 않다. 너무… 괴로워.
“먹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해결되지 않을 문제에 관한 이야기라면, 관두자. 그가 마음을 바꿀 일은 없어 보이니 조금씩, 그를 떠날 준비를 하는 거야.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조금 늦어진 것뿐. 이제 아쉬울 거 하나 없으니까.
“먹어둬야 기운 내서 나와 말싸움을 이어 할 수 있을 거다.”
…꼭 저런 식으로 말해야 하는 거야?
“먹다 체할지도 몰라요.”
“약을 준비해두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그가 뻔뻔하게 내 손을 잡아 이끈다. 그제야 나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동굴이 아닌 숲속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런데 왜, 숲으로 왔어요?”
“…방향을 잃어서. 눈 감아.”
“방향을 잃어요? 누가? 파이가?”
그 얼토당토않은 대답에 바짝 굳어있던 내 얼굴이 금세 구겨진다. 화가 나서 바람 쐬러 밖으로 온 거라고 하면 이해하겠는데 방향을 잃었다는 말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력을 사용하면서 지금까지 실수라는 걸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인데.
설마… 방향감각을 잃어버릴 만큼, 엄청 화가 났었던 건가?
아까 파이에게 그만큼 큰 소리를 내면서 화를 버럭 냈던 적이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전 같으면 감히 그럴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것도 그거지만 파이도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럼 내가 화가 난 만큼 그도 화가 나 있었다는 뜻이겠지.
…우리 둘 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굳혀지는 느낌.
“어서 눈감아. 지체하면 음식이 다 식어버릴 거다.”
일단 그의 말에 따라 눈을 감자, 옅은 바람이 가볍게 불다가 멈췄다. 그리고 코끝에 톡톡 쏘는 향신료가 느껴져 눈을 번쩍 떴다.
곧 레어의 익숙한 식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식탁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해산물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커다란 가재와 내 손바닥 두 개만 한 사이즈의 큰 게를 쪄서 그 위에 치즈를 뿌려, 다시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아름다운 자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기는 하는데. 먹고는 싶은데. 저 맛있는 걸 먹어도 전혀 즐거울 것 같지 않다.
“생각해보니까… 레이라를 블랑 제국에 그냥 두고 오면 어떡해요?”
나는 애써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저 음식들을 엎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
그러자 파이가 나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마치 언제 화를 냈냐는 식의 대단한 감정 변화였다. 저러니 속이 타들어 가고 울컥하는 건 오로지 내 몫이었다.
“두 사람을 소개해 주려고 한 거 아니었나? 그럼 주선자는 눈치껏 빠져줘야지.”
“그런 분위기에서 빠져나오면 오히려 더 망치는 지름길이라고요.”
“일단 먹어. 먹고 진정한 뒤에 다시 이야기해.”
재빨리 나를 의자에 앉혀놓은 파이가 내 옆에 앉아서 내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여준다. 그리고 냅킨을 펴서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접시를 조금 더 내 앞으로 당겨 가까이 두었다.
진짜 이거 다 먹고 다시 싸우자는 걸까? 그랬다가는 먹은 걸 다 도로 게워낼 것 같은데. 일단 화해하자는 느낌은 아니다. 아니면 내 생각을 딴 데로 돌려서 없었던 일로 만들자는 뜻?
“잘 먹겠습니다.”
모르겠다. 그저 음식이 아까우니까 먹어치우려고 하나둘 입에 머금었다.
‘…울적해.’
고소한 맛과 풍미가 아주 대단하다. 적당히 짭조름한 맛이 달콤한 소스와 어우러져 입맛을 돋운다. 하지만 그뿐이다. 맛은 있는데 그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복함이나 기쁨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먹고는 있는데 이게 코로 들어가는지 목으로 넘어가는지 잘 모를 정도다.
“다행히 목구멍으로 넘어가긴 하나 보군.”
접시가 거의 비워질 때쯤,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파이가 몇 가닥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래서 나는 포크에 매달린 마지막 게살을 눈앞에 두고 망설이다가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그 말?”
“아까 식사를 못 할 것 같다고 했잖아. 그래서 걱정했다는 뜻이다.”
걱정했다는 말에 또 날카롭게 세워진 신경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아니야, 현혹되면 안 돼. 저 마음에도 없는 말에 넘어가지 말자.’
그래서 나는 그 마지막 게살을 입에 넣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잘 먹었어요.”
“후식은 어떤 거로 준비해줄까?”
“안 먹어요.”
사실 입가심으로 먹고도 싶긴 했지만, 점점 두통이 이는 것 같아서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파이가 꽤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무래도 저 드래곤이 이번 일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생각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의 의중을 물어봐야겠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진짜 아니라면 더 늦어지기 전에 우리 사이를… 정리해버리자고. 그의 말대로 천년을 이런 불안함 속에서 살게 되는 건 사양이니까.’
“파이, 우리…….”
“이 이상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다 해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다. 나는 지금 우리 사이가 꽤 좋다고 생각해. 너 역시 더는 인간이 아니니 혼인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대화를 유도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할 말을 마친 상태라는 듯 거침없이 제 뜻을 표했다. 조금도 나와 입장 차이를 좁힐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
참, 할 말이 없어진다. 가슴이,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다. 몸의 피가 손가락 끝으로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매서운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래요……. 파이 생각 잘 알았어요. 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 봐요. 대화라니. 망치로 힘껏 내리쳐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돌덩이하고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그렇게 감정을 소비했나 몰라.”
“곡해하지 말라 하지 않았나.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언제나 같다. 단 한 번도 이 마음을 의심해본 적이 없어.”
아까와 다르게 자상한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내게 손을 뻗어와 내 손을 가볍게 잡아 쥔다. 그의 뜨거운 손에 잡히자 내 얼음장 같은 손이 옅게 떨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 역시 마음이 변하진 않았다. 지금 역시 그가 곁에 다가오기만 해도 설레는 이 가슴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끝없이 쏟아지는 폭포수처럼 그를 향한 내 사랑은 쉽게 마르지 않을 거다. 그래서 더… 아프다. 그에 대한 큰 애정만큼의 서운함이 나를 짓누르고 있어서. 그러므로 더더욱, 그를 떠나려면 내 심장을 잡아 뜯어 이곳에 놓고 가야만 했다.
“쉬고 싶어요.”
“어디로 갈까? 방으로 갈래? 아니면 별장으로?”
“방에요.”
아까부터 몰려온 두통이 다시 재발해서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울렸다. 일단 누워서 쉬고 싶다. 더 버티고 앉아있으면 진짜로 방금 먹었던 아까운 음식을 다 게워낼 것 같으니 말이다.
파이가 휘청거리는 나를 부축해서 방으로 돌아오는 그 거리가 오늘따라 멀게 느껴졌다. 마치 발에 납덩이가 매달린 것처럼 묵직해서 걷기도 힘들고. 겨우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침대에 그대로 엎어졌고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몸에 힘을 쭉 뺐다.
“옷은 갈아입어야지. 레이라를 데려올까?”
아, 맞다. 레이라와 함께 밤을 보내기로 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도통 레이라와 이야기를 나눌 기력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있기로 약속했는데.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가 없을 것 같다.
“미안한데 오늘은 힘들 것 같아요. 레이라에게 내일 저택으로 찾아가겠다고만 전해주세요. 그리고 레이라를 무사히 저택에 돌려보내 줘요.”
“알았다. 쉬고 있어.”
침대 위에 엎드려있는 내 뺨에 입을 맞춰온 그가 머리를 가볍게 매만지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다가 얕은 잠에 빠지면서 서서히 정신을 놓아버렸다.
* * *
무슨 정신으로 며칠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매일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분주하게 몸단장을 하고 파이가 레이라의 저택에 데려다주었다. 날이 좋으면 레이라와 함께 외출도 하고 산책도 하다가 맛있는 식사를 즐기고 차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시절에 배웠던 왈츠를 연습하면서 귀족의 예법도 함께 배웠다.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 해가 지고 새까만 밤이 찾아오면 파이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럼 나는 레이라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레어로 돌아왔다. 그때마다 레이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나와 파이에 대한 걸 묻진 않았지만 나와 파이 사이에 불편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는 듯.
“최근에 널 다시 아카데미로 보내는 기분이다. 그때도 아침에 가서 저녁에 돌아오곤 했지.”
마차에 올라 파이와 마주 앉은 채, 나는 파이 대신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도 기분이 별로인가? 레이라와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던데.”
“즐거웠어요.”
“그래. 즐거웠다면 다행이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대화 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내 속도 모르고 저렇게 나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를 보면 수만 가지의 감정이 뒤섞여 어지러워지니까. 또 빠르게 뛰는 심장을 누군가 꽉 죄고 있는 느낌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지금 혼자 결정 내린 것은 일단 무도회를 마치고 나서 파이에게 정식으로 독립을 신청할 생각이다. 만약 또 안 된다고 하면 혼인서약서를 내밀고 여기에 사인하지 않을 거면 날 보내 달라고 할 참이다. 그래도 거절하면 최악의 경우로 파이를 도발해 그가 폭주하도록 만들 생각도 하고 있었다.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는 것보단 차라리 파이의 손에 죽는 게 나을 테니까.
레어에 도착해서도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의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럼 파이가 나를 억지로 끌어내서 평소처럼 씻겨주고 잠옷도 갈아입혀 주었다.
“치즈.”
가벼운 원피스 잠옷을 입히고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주던 파이가 늘 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럴 때면 이 눈치도 없는 심장이 어김없이 날뛰어 뺨이 달아올랐다.
“내일이면 네가 기다리던 황궁 무도회 날이 오겠어. 우리, 내일 무도회가 끝나면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싶은데.”
“…여행? 어, 어디로요?”
“어디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고개를 숙여 내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는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웃는다. 은근히 접촉을 시도하면서 내 허리를 두 팔로 가볍게 감싸 안았다. 그의 뜨거운 온기가 피부로 사르르 녹아내리면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돈다. 그리고 은밀히 하체를 밀착해 야릇한 분위기를 생성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