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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86화 (86/132)

# 86

내가 원하는 건, 서로 한마음 한뜻이라는 의미의 서약서에 사인만 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혼인식이고 뭐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가 부부 사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일 수 있는 증거를 갖고 싶은 것뿐이다.

그것이 이렇게까지 다툴 문제가 전혀 아니라고 보는데, 파이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을 기세라서 더 상처였다.

“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함께 있겠다고 했을 텐데?”

“구두계약은 법적 효력이 없다고 했어요. 만약 마음이 바뀌어서 식어버릴 때,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잡아떼면 누가 책임질 거예요?”

“왜 그런 걱정을 벌써 하는 건지 모르겠군.”

“예전의 기억은 전혀 나질 않나 봐요? 아니면 벌써 다 잊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나를 밀어내기 바빴던 사람이 누군데? 그 마음이 또 언제 바뀔 줄 알아요?”

“과거의 일은 과거일 뿐이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야.”

“하지만 나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란 말이에요.”

나는 두 눈을 치뜨고 파이를 노려보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저렇게 공감 능력이 없는 남자가 내 남자라니. 정말 울적해진다. 진짜 벽과 대화하는 기분을 여실히 느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불안해요. 자그마치 5년간 당신에게 거절당했던 그때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못한 상태라고요. 그러니까 언제 또 마음이 바뀌어 날 버릴지 모르니까 그런 건데…….”

순간 울화가 치밀어 목구멍이 꽉 막혀버렸다.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려는 걸 애써 참아내며 담담하게 말을 이으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입을 열면 눈물부터 흘러나올 것 같아서.

“불안해하지 마라. 사천 년간 살아오면서 내가 이런 마음을 품은 것이 너뿐이다. 그간 내가 널 아프게 했던 건 잊어주길 바라.”

“그게 잊어달란다고 잊히는 거냐고요. 내가 잊길 바란다면 혼인서약서에 사인하라니까? 그럼 나도 이렇게까지 닦달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몇 번이나 혼인서약서 얘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파이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나를 향해 원망하는 눈빛을 하고 말이다.

“치즈, 언제 왔어?”

파이와 서로 말없이 기 싸움을 하던 와중에 레이라의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들떠있는 레이라가 에이든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테이블로 다가와 파이와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그래서 나는 방금까지 가라앉은 기분을 애써 비워내며 활짝 웃어주었다.

“방금. 둘이 어디 갔다 왔어?”

“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다녀왔어.”

“아, 박물관 얘기는 들었는데 난 아직 못 가봤네. 어땠어? 좋아?”

“정말 크고 대단하더라. 제국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우리 왕국에는 그런 게 없어서. 돌아가면 한번 제안을 해봐야 할 것 같아.”

우리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가면서 한참을 떠들었다. 나와 레이라가 끊임없이 대화하다가 에이든이 간혹 끼어들어 동참했다. 하지만 파이는 마치 우리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무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 강렬한 눈빛에 뺨이 얼마나 따갑던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우리 레스토랑 예약한 시간 거의 다 되지 않았을까요?”

한참 그를 무시하고 대화를 이어갔지만, 이러다가 내 얼굴이 다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레이라도 슬슬 나와 파이 분위기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난감한 듯했다. 그래서 이 침체되려는 분위기를 어떻게 해볼까 싶어 모른 척 파이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파이의 딱딱한 표정은 좀처럼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레스토랑 음식을 이곳으로 가져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 그… 그럴까요? 난 나쁘지 않아요. 레이라는 어때?”

“나도 그게 나을 것 같아.”

“에이든은 안 바빠요?”

온종일 우리 옆에 붙어있는 에이든이 걱정되어 물었는데, 에이든이 살짝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그러더니 레이라가 고개를 돌려 에이든을 쳐다보는 순간 움찔거리며 헛기침을 뱉어내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반응이 왜 이렇게 웃긴지. 은근히 레이라를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훤히 보인다. 이래서 남의 연애가 재밌어 보이는 걸지도.

“오늘 딱히 바쁜 일정은 없어서 괜찮아. 가능하면 우리 제국의 요리를 맛보게 하고 싶었는데, 이미 예약된 식사가 있다면 간단한 애피타이저라도 준비시키지.”

“그래 주면 고맙고요. 역시 에이든은 센스가 있네요.”

평소처럼 더 구박하려다가 관뒀다. 나름 레이라 앞에서 체면 차리고 있는데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조금 더 치켜세워줘 볼까?

“에이든.”

“으응?”

“오늘따라 근사해 보여요. 한 달 사이에 살이 좀 빠진 건가? 뭔가 느낌이… 하여간 그 사이에 조금 더 남자다워졌어요.”

“그, 그래?”

사실 다 거짓말이다. 변한 건 하나도 없는데 그냥 좀 띄워주려고 일부러 더 생글생글 웃으면서 칭찬해줬다.

그런데 에이든은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식은땀을 흘린다. 이상하다? 분명 칭찬에 약해서 이런 말을 들으면 얼굴을 붉히거나 쑥스러워해야 정상인데?

“왜 그래요? 설마 남자다운 것보다 예쁘다는 말 듣는 게 더 좋아요?”

“…저기 있잖아, 치즈?”

“말해요.”

“여기 이 아가씨랑 나랑 따로 식사해도 될까? 먹다 체할 것 같은데.”

에이든이 레이라를 가리키며 어렵사리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서 레이라를 쳐다봤더니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나와 파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대체 왜 저러나 싶어서 고개를 돌려 파이를 보다가 흠칫, 어깨를 바짝 모으고 굳어버렸다.

“파이……?”

얼마나 이를 세게 물고 있는지 그의 단단한 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진한 핏빛이 서린 선홍빛 눈동자가 에이든을 죽일 듯 노려본다. 그 눈빛이 얼마나 살벌한지, 저러다가 또 드래곤의 비늘이 얼굴에 돋아날 것만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파이, 파이?”

나는 일부러 그의 옷깃을 잡아 살짝 흔들었다. 그러자 파이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내려다본다. 덕분에 방금 먹은 딸기 주스와 쿠키가 위장에서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화… 났어요?”

설마 내가 에이든 칭찬한 것 때문에 그런 건가 싶어서 나는 일부러 활짝 웃으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오해하지 마요, 파이. 나는 정말 아무 뜻 없이 한 말이었…….”

그러나 파이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린다. 그러더니 내 팔목을 덥석 잡아서 나까지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먼저 가봐야겠다. 레이라를 부탁하지, 에이든.”

에이든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파이가 나를 제 쪽으로 당겨 안는다. 내 등에 단단하고 넓은 가슴팍이 밀착함과 동시에 그가 손으로 내 눈두덩을 덮는다. 그리고 곧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이동마법을 사용해서 자리를 옮긴 것 같다. 흙냄새가 나는 걸 보니 블랑 제국을 빠져나오긴 한 것 같은데, 파이가 내 눈두덩을 덮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팔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호흡만 고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서서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지금 그가 엄청 화가 난 상태였고, 나 역시 그와 설전을 벌였던 조금 전의 일 때문에 기분이 상한 채니까.

“치즈.”

음산하게 느껴지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는 다정함이 조금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심장이 옥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이성과 다르게 내 입은 대답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내 마음이 변할까 봐 걱정이라고 했나? 그럼 한 가지만 묻지. 내가 너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준 적이 있었던가?”

“…아니요.”

“난 변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너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고, 너의 그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너와 함께 할 거라고 한 말도 거짓이 아니다. 대체 그깟 서약서 하나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거지?”

그깟 서약서라니. 그건 평생 한 명의 상대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약속의 징표나 다름없는 것인데.

가슴이 미어지면서 심장이 욱신거렸다. 마치 내 진심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처참하게 변해버린 마음속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기분이었다.

파이는 전혀 내 마음을 이해하려 하질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내가 몇 번이나 혼인에 관해 설명했건만. 그는 이해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귀를 닫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니 매번 혼인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대립 구도가 이어지고, 결국 상처받는 건 내 쪽이지.

나는 절망 가득한 한숨을 토해내며 격한 감정이 담긴 말을 신경질적으로 뱉었다.

“아무것도 아닌 거로 매도하지 마요. 혼인서약서에 사인하는 건,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의미라고요.”

“서약해야만 믿을 수 있고, 서약하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는 그 말에 어폐가 있음을 정녕 모르는 건가?”

“…어떻게, 생각하는 게 왜 다 그렇게 계산적인 거야? 대체 당신 심장에 진심이라는 게 있기는 해?!”

결국, 울화통이 터져 내가 먼저 버럭 화를 내버렸다. 그리고 내 눈을 가리는 그의 손을 힘껏 쳐내고 온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빠져 나와 두 눈을 부릅뜨고 마주 보았다. 뱃속이 자글자글 끓어올라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전부 헤집고 다니는 느낌이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화가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만들어 내어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다.

그럼에도 그는… 그저 아무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다는 듯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더 상처였다. 그의 행동이나 말에서는 나를 아껴준다는 느낌이 있지만, 이렇게 그의 표정을 확인할 때면 언제나… 불안해졌다. 그것도 지금, 나와 첫날밤을 보내기 전에 보이던 그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가슴이 시리다. 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느낌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와 내가,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자리에 함께 서 있는 것 같았다. 서로의 거리가 절대 좁혀질 수 없다는 걸, 자꾸만 확인하게 되어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다.

그랬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던 파이가 시선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는 행동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우선 식사부터 하자. 화를 내더라도 끼니는 챙겨 먹어야지. 배고프면 더 예민해지잖아, 너.”

…뭐? 식사?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남자가 지금 누구 놀리나 싶어 굉장히 어이없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어요?!”

“못 먹겠으면 내가 먹여줄게.”

막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죽겠는데 이 남자는 내 식사를 챙기기만 한다. 그래서 화낼 시점도, 뭐라고 더 따지려던 말까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리와. 음식은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고 했잖아. 식당에 이미 준비되어 있다.”

이쯤에서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그와 나는 이루어져선 안 되는 사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 하나 맞지 않는 이 남자와 대체 무엇을 하겠다고 그렇게 오기를 부렸는지. 자기 입장만 고려하고, 나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저 모습에 꽤 실망했다. 아마 내가 하루하루 말라 죽어가도 굶지 말라고 내 입에 음식을 꾸역꾸역 밀어 넣어 줄 사람이다. 그냥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가보다, 하고 쉽게 짚고 넘어가 버릴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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