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어… 난… 저… 하, 하룻밤은 하룻밤이니까… 어쨌든, 하루는 보냈잖아요. 애초에 내가 말했던 건 하, 한 번만 하자는 의미였으니까…….”
“그래서 이대로 먹고 튀겠다는 건가? 꽤나, 야속하군그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파이의 행동에 나는 어깨를 움찔 떨면서 바짝 움츠렸다. 그리고 긴 다리로 딱 두 걸음 만에 내 앞에 다가온 그가 내게 손을 내밀어 또 흠칫거렸다.
“어제, 자발적으로 나와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했던 그 당돌한 꼬마 아가씨가 오늘따라 유난히 새끼고양이처럼 구는군.”
“내, 내가 언제요?”
잠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을 그의 손바닥에 얹어놓았다. 그런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 파이가 나를 조심히 일으켜 세운다.
“아무래도 좋아. 설상 어제 나와의 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건 서로 맞춰 가면 되니까.”
“맞춰, 가자는 뜻은……?”
“나는 네 요구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물론 네가 나를 원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고.”
나와 마주 보고 선 그가 결 좋은 밀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감아온다.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져 두피가 곤두세워졌다.
아, 생각해보니 오늘 머리 안 감았는데.
“파이. 나 오늘 머리 감지도 않아서 더러워요.”
“그래서 목욕시켜주려고. 지금.”
나를 향해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면서 옅은 미소를 짓는 파이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랐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여유로운 웃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또 목구멍이 바짝 마르고 아랫배가 바짝 조여들었다.
아, 뭔가 좀 위험하다는 경고가 머리를 뒤흔들어놓는다. 이상하게 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꼭… 씻지 않아서 그런가? 우선 빨리 씻어야겠다.
일단 그가 뱉어낸 의미심장한 말들을 뒤로한 채 나는 방 안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물었다.
“목욕물은요? 나 사과 향 입욕제 쓰던 거 챙겨왔어요? 오리가족은? 곰돌이 타월은? 수건 세트는?! 설마 그것들도 다 버린 거 아니죠?”
“…새로 사줄게.”
“와, 진짜 다 버렸구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할… 아, 사람 아니지. 그래도 정말 나빠요. 어떻게 내걸 그렇게 다 버릴 수가 있어요? 그것도 다 파이가 사준 것들이잖아!”
“새로 사줄 테니 울지 마라.”
“정말 나빠. 나쁜 남자라고는 생각했었는데 진짜 나빴어. 너무해. 나는 진짜 소중하게 여겼던 물품들인데.”
눈앞에 아른거린다. 내가 저택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은 내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전부 아카데미에 다닐 때 동기들에게 좋은 제품들이라는 얘길 듣고 구입했던 건데.
파이도 처음에는 이런 유치한 게 뭐가 좋냐고 핀잔을 줬었다. 그러나 사용해보더니 확실히 비싼 금액을 내고 사는 건 다르다고 반색을 표하기도 했다. 내 피부가 조금 약한 편이라 전에 쓰던 일반 타월을 쓰면 살이 붉게 일어나곤 했었다. 하지만 곰돌이 타월은 거품도 잘나고 부드러워서 아프지도 않았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 중요한 걸 버리다니!
“다시 사줄게. 전부 다시 구입을…….”
“그걸 언제 다 찾아서 언제 다 사요? 수도에 나가서 가게만 열 군데는 들러야 하겠네!”
“그럼 지금 당장 나가서 사올까?”
“…그럴까요?”
순간 솔깃했다. 외출할 기회잖아? 이 틈에 기회를 봐서 계획대로 도주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럼 기다려. 금방 다녀오겠다.”
“…네?”
아니, 아니? 이봐요? 거기 잘생긴 드래곤님? 나하고 같이 가자는 거 아니었습니까?
“다녀오는 김에 옷도 몇 벌 사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전부 새로 바꾸지. 다녀오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테이블의 식기를 마법으로 정리를 한 파이가 내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방금, 파이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춰온 거야? 파이가 직접? 나한테? 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스스로?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살짝 건드리면서 펑! 터지는 심장에서 확 올라오는 열기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세상이 박살나려는 징조인 것이 분명하다. 아, 아직 난 해보지 않은 게 너무 많은데?
파이의 그 행동 하나를 가지고 분석을 하며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아는 파이라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결국에는 자기가 내게 큰 실수를 했으니 그걸 만회하기 위해 해줬다는 결론을 내렸다.
파이, 은근히 요망한 구석이 있었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방문이 스르르 열리고 파이가 들어왔다. 나는 침대 아래쪽에 기대앉아 크게 하품을 하고 촉촉해진 눈가를 비비면서 그를 쳐다봤다.
그의 품에 커다란 종이 가방 하나가 안겨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 팔에 가볍게 입을 수 있는 드레스 두 벌과 원피스 잠옷 세벌을 걸친 채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군.”
“…동굴에서 미아 되는 건 사양이거든요.”
내가 머무는 이곳 주변만 밝았다. 조금만 먼 곳으로 나가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이었다. 빛 하나 없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들리지, 박쥐 날아다니지, 소리는 울리지.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릴 만큼 동굴 안쪽은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래서 내가 이 레어를 너무너무 싫어해. 그걸 한두 번 당해봤어야지.
“쪼꼬미 가족 식기세트는 이미 품절이라 내년쯤에 한정판이 다시 재구성되어 나온다더군. 그리고 나머지는 네가 사용하던 물건들과 똑같은 거로 갖췄으니 이제 씻을 수 있다.”
“수건은 빨아야 하잖아요. 새 수건을 어떻게 써요? 섬유냄새 나.”
나는 내 옆에 내려놓는 커다란 종이 가방 안에서 그가 사 온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내 눈으로 확인을 했다. 그리고 새 수건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얼굴을 잔뜩 구겼다.
그래, 이 촉감이긴 하지. 곰돌이 타월도 부드럽고… 오리 가족은 그새 새끼를 더 낳았나보네?
원래 오리 어미 한 마리에 새끼가 다섯 마리였는데 두 마리가 더 늘었다.
“오리가 더 늘었네요?”
“네 소중한 물건들을 내 마음대로 버려 미안하다는 뜻으로 새끼 오리를 두개 더 구입했다.”
오, 정말 미안하긴 했나보네. 이런 식으로 사과를 할 줄이야.
나는 늘어난 오리 가족을 한 품에 조심히 안아들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다가 또 아차 싶어서 표정을 확 굳혔다.
자꾸 전처럼 행동하려고 해서 큰일이다. 게다가 파이의 상태도 전과 달랐다. 더 다정하게 굴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틋한 눈빛을 발사하고 있어서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지기도 한다.
내가 한번 없어지고 나니 내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기라도 한 걸까?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그럴 남자였으면 내가 아카데미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 닷새나 떨어져 있는 사이에 진작 깨달았을 거다. 하지만 금요일마다 나를 데리러 오던 파이는 월요일 아침에 나를 데려다주던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안기지 않으면 안아주는 법이 없었다.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굳게 닫혔던 저 예쁜 입술이 절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자, 치즈.
괜히 심장이 불편해져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자 내 앞에 쪼그려 앉은 파이가 커다란 손을 내 정수리에 얹어 마구 헤집어놓으면서 피식 웃었다.
“그 가게 주인이 나더러 혹시 어린 딸을 키우고 있냐고 묻더군. 그래서 정신연령이 다섯 살인 꼬마 아가씨가 계시다고 했지. 스무 해가 넘도록 아기처럼 구는 귀여운 아가씨.”
“아, 아기라니! 내가 어딜 봐서? 귀여운 걸 좋아하는 건 남녀노소를 떠나 개인 취향이라고요. 그리고 나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안다. 세월이 참 빨라. 그 핏덩이가 이렇게 금방 크게 될 줄은 몰랐어. 초콜릿을 주지 않는다고 울었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이 남자가 어, 언제 적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거야 지금?”
치부가 낱낱이 까발려지는 느낌이라 민망해 죽겠다. 나는 알 수 없는 내 어린 시절을 전부 봐온 사람이기도 하지만 파이는 기억력이 제법 좋았다. 오래 살면 건망증이 심해진다던데 파이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입욕제도 새로 나온 것이 있다고 해서 여러 가지 골라왔다. 네가 좋아하는 벌꿀 향도 있다고 해서.”
“…벌꿀 향이요?”
나는 다급히 종이 가방을 뒤져 바닥에 깔린 입욕제 통 네 개를 꺼내 확인을 했다. 그 중에서 벌꿀향 통을 발견하자마자 일단 그것부터 집어 들어 확인했다. 꼼꼼히 포장되어있는 리본을 벗겨내고 재빨리 뚜껑부터 개봉한 뒤에 향을 맡아봤다. 기분이 확 좋아지는 달달한 향에 취할 것만 같았다.
하아, 그래. 이거지. 이게 나오다니! 앞으로 쭉 여기 제품을 애용해야겠어.
“마음에 드나?”
“엄청요! 세상에 꿀을 내 몸에 바르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막 벌레들이 달려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네요.”
“벌레가 싫어하는 계피향과 레몬향을 적절히 섞어서 배합했다고 하니 괜찮을 거다.”
오오! 너무 좋잖아? 갑자기 목욕이 너무너무 하고 싶어졌어!
나는 한팔에 오리 여덟 마리를 가득 안고, 벌꿀향 입욕제만 든 채 욕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우선 오리들부터 깨끗이 씻겨야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작은 대야에 물을 받고 입욕제를 살짝 넣어 휘휘 저어주었다. 금세 충분한 거품이 생성된 대야에 오리들을 넣어 뽀득뽀득 씻겨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지금 뭘 하는 건가 싶어서 멈칫했다.
나 정말 바보인가?
“왜? 거품이 모자라? 더 부어줘?”
내 옆에 쪼그려 앉은 파이가 대야에 입욕제를 조금 더 부어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얼어붙은 그대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파이를 올려다봤다.
이 드래곤이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람?
순간 소름이 오스스 일어났다. 파이가 이렇게 나랑 옆에 나란히 앉아서 물놀이했었던 시기가 정말 딱 5년 전이였다. 내가 파이와 처음으로 혼인을 결심했던 그 시기 이후로 파이는 내게 벽을 세웠다. 딱 일정 거리 그 이상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졸리다고 칭얼거릴 때만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그걸 자주 이용하기도 했지. 하도 철벽이라 얼마나 속이 탔는지 그는 모를 거다.
내가 파이를 좋아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레이라도 그런 말을 했었다.
[원래 어릴 때부터 봐오면 이성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좋아하다가 정말 운이 좋아서 두 사람의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일방적인 애정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경우의 예는?]
[음… 일단 유혹을 해서 자빠트리고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나면 없던 애정도 생기지 않을까? 우선 나랑 하룻밤 보내자고 유혹해도 넘어오지 않는다면 거의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겠지만.]
[어… 글쎄. 과연 그럴까?]
[네 키다리 아저씨는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며? 그럼 성인식을 치르면서 한번 모른 척 던져봐. 내가 봤을 때는 네 키다리 아저씨도 너한테 하는 걸 봐서 목석은 아닌 게 분명해.]
그때 나는 평소의 파이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목석이면 다행이지. 그냥 돌로 세운 단단한 벽이나 다름없다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대포알에 맞아도 어디 하나 생채기가 나지 않을 만큼 아주 굳건한 벽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