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4화 (14/132)

14♬  #

“파이! 내 식기 세트는요?”

“…아. 그러고 보니 저택을 처분할 때 같이 처분했겠군.”

“뭐, 뭐라고요?! 그 귀한 걸!”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대답하는 파이를 향해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칼질을 계속했다.

아니, 그게 나한테 얼마나 귀한 선물인데! 한정판이라서 이제 구할 수 없는 물건이건만. 정말 너무해. 세상이 무너져도 그것만큼은 챙겨야 하는 거 아니야?

“너, 너무해! 그거 파이가 나한테 처음으로 선물해준 거잖아요. 게다가 그거 숟가락, 나이프, 포크 세트만 팔아도 자연 벌꿀 한 병은 사먹을 수 있는 거라고!”

“팔지 않아도 꿀 정도는 충분히 구입할 수 있어.”

“아니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치즈.”

살벌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는 그가 칼질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눈동자를 들어 올려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지은 죄가 있어서 괜히 뜨끔해 시선을 피했다. 내 이마에 구멍이 날 정도로 나를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왜, 왜요?”

“네가 아카데미를 다니지 않았다면 그런 식기세트 따위 몰랐을 거다. 그 놈의 막대과자의 날인지 그딴 것도 몰랐을 테고.”

그딴 거라니. 일 년에 한 번뿐인 공개고백의 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데!

나는 불평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런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파이가 작게 한숨을 뱉어내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나는 네가 아카데미를 다니기 이전의 너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저택에서의 일은 전부 잊도록 해.”

저, 저, 저 말하는 것 보소! 잊으라고? 왜 저런 못된 말만 하는 거야?

“왜 그래야 하는데요? 저택에서 생활하고 아카데미를 다녔던 건 내게 있어서 뜻깊은 추억이라고요.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추억이요.”

“그게 아니어도 더 행복한 추억을 쌓을 수 있다.”

“행복한 추억? 이딴 동굴에서요? 여기에서 지내는 것보단 백배 천배 훨씬 좋은 기억인데 내가 그걸 어떻게 잊어요?”

나는 두 팔을 장황하게 흔들면서 저 매정한 드래곤을 향해 내 주장을 강하게 펼쳤다. 하지만 파이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덤덤하게 대꾸했다.

“앞으로 돌아갈 일 없어. 괜히 미련 가지고 있다가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울어도 소용없다.”

“…진짜 처분했어요? 집사는요? 거기 사용인들은?”

“저택은 통째로 들어내 해저 깊숙한 곳으로 빠트렸으니 전부 부서졌겠지. 사용인들과 집사도 각자 보석 한 덩이씩 쥐여주고 해고했다. 다시는 볼일 없어.”

“정말 사람이 어쩜 저렇게 매정해? 아, 사람 아니지. 내가 착각했네. 위대하신 드래곤님이셨지요? 사람 모습을 하고 있으니 제가 자꾸 깜박 속네요.”

분명 나는 비꼬는 거였는데 파이는 조금도 거슬리지 않다는 듯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다가도 고기 냄새에 배꼽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왔다. 나는 아닌 척 크게 헛기침을 뱉어내며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곧 파이가 열심히 칼질을 해서 마지막 고기까지 잘게 썰어냈다. 그 위로 짙은 고동색 소스를 한가득 뿌려주고 내 앞에 내려놓았다.

“배고프지? 우선 먹어둬. 내가 굶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먹으라고 주니까 먹긴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나는 단순한 모양의 포크를 조심스럽게 들고 잘게 썰어놓은 고기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고기에 잔뜩 배인 육즙이 달콤한 소스와 함께 입 안 가득 퍼져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맛있어! 맛있다고!

방금 기분 나빴던 게 쑥 내려갈 정도로 입맛을 돋게 해준다. 고기도 고기지만 하여간 이 특제 소스 참 마음에 든다. 아카데미 식당 음식도 맛있었는데 확실히 우리 주방장 요리솜씨가 제법이다. 생각해보니까 여태까지 주방장 얼굴도 못 봤네?

“파이. 그럼 여기 주방장하고 저택에서 식사 만들어주던 주방장은 동일 인물인가요? 사람이에요?”

“주방장?”

“네. 이거 만든 사람.”

“아. 어디 제국의 황실 요리사라고 유명해서 데리고 왔지. 그러고 보니 벌써 5년이 넘었군. 교체할 때가 되었어.”

“교체를 왜 해요? 나 지금까지 되게 맛있게 잘 먹고 있는데 왜?”

“드래곤의 레어는 숨겨진 곳이라 오래 머물면 곤란하다. 솔직히 5년도 길었다. 네가 워낙 맛있어 하니 오래 두긴 했다만, 이제 돌려보내고 다른 주방장을 섭외해야지.”

그렇다면 별수 없네. 나는 고기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아랫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고마웠다는 인사를 해야겠네요. 그동안 맛있는 음식을 해줘서 덕분에 잘 먹었다고.”

“안 돼.”

정말 이 남자의 입에서 안 돼, 라는 말을 지금까지 몇 백 번은 들은 것 같다. 안되는 게 너무 많아!

“정말 치사하게 자꾸 이럴 거예요?”

“드래곤의 레어에 인간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 곤란하다. 인간과 드래곤의 협약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 복잡해.”

“협약이 뭔데요?”

“인간을 잡아들여 먹이로 섭취하지 않겠다는 협약이지. 그 대가로 내게 일정주기로 보석을 바치는 거고.”

순간 고기 맛이 뚝 떨어졌다.

“먹이요? 설마… 설마 나를 잡아먹으려고 데려온 거였어요? 그래요?!”

“…아니.”

…그런데 그 부정 앞의 시간차는 뭡니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어린 눈초리로 그의 반반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멀끔한 표정으로 눈썹만 살짝 들어올렸다.

“만약 너를 먹이로 생각했다면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도 않았을 거다.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말고 어서 식사를 마저 하도록 해.”

그건 그렇다. 정말 나를 먹을 생각이 있었으면 진작 잡아먹었겠지.

나는 다시 고기 한 점을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맛좋은 고기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좋아할 분위기는 아니니까.

“와! 배불러!”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평소에 절대 하지 않는 폭식을 해버렸다. 스테이크 하나를 전부 다 먹고 구운 아스파라거스도 남김없이 흡입을 했다.

우와, 배가 빵빵해.

의자에 완전 등을 기대 누운 채 둥글게 솟은 윗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다가 다시 표정을 확 굳혔다.

가출했다가 한 시간도 안돼서 다시 붙잡혀 왔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전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이러면 안 되지.

나는 다시 의자에 허리를 펴서 똑바로 앉아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깐 채 뾰로통하게 입을 열었다.

“잘 먹었어요. 그럼 이제 또 나는 반성의 시간을 가지면 되나요? 너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데. 백날 반성하래도 나는 반성할 게 하나도 없어서 묻는 말이에요.”

“반성할 것이 하나도… 없다?”

“네.”

당돌하게,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물론 시선을 비스듬히 한 채. 파이를 쳐다보면 자꾸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서 기분이 이상해지니까.

“그런가…….”

톡, 톡,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치는 파이가 말끝을 흐리면서 흐음,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나는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 불편한 침묵이 오래갈수록 괜히 초조해져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늘 파이 앞에서 조잘조잘 떠들던 버릇이 있어서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꼭 아카데미 시절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낯선 곳에 혼자 떨어져 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라 모든 상황이 어색했다. 친분이 있는 사람도 없어서 그저 조용히 수업만 들었었다.

그랬더니 소문으로 내가 무슨 외국의 공주라니, 황녀라니, 인간이 아니라느니, 마녀라느니. 별 해괴한 소문이 다 돌았다고 레이라가 말해줬었다. 화장실도 가지 않는 요정이라나 뭐라나. 게다가 몸에서 나는 향도 좋고 머리카락 결이 꼭 실크처럼 부드러워 보여서 한번쯤 만져보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고.

당연하지. 파이가 날 얼마나 귀하게 키워놨는데.

입욕제도 항상 최상품만 골라서 피부에 맞는지 테스트도 꼼꼼히 했다. 그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향만 골라서 나한테 허락까지 받아가며 사용했었다. 지금도 그렇고. 새로 나온 것 중에 좋은 것이 있으면 우선 사서 한번 써보고 마음에 안 들어서 버린 것만 수두룩하다. 그래서 레이라도 내가 어디 대 제국의 황녀일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파이의 직업을 의심했지. 물론 나는 그에 관해서 입을 싹 닫았지만.

“그럼 하나 묻겠다. 왜 내게 말도 없이 몰래 도망을 친 거지?”

아카데미 일을 떠올리다가 파이의 목소리가 귀에 콕 박혀서 나도 모르게 그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여전히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보자마자 어제의 기억이 불현 듯 떠올랐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어제 그토록 섹시하게 나를 내려 보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의, 끔찍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남근이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것까지. 순간 소름이 일어 안면의 솜털까지 곤두세워졌다.

“도, 도망이라니! 그건 도망이 아니라 당당한 출가라고요, 출가.”

“네가 꾸민 짓이 정당한 출가라고 생각해?”

“아닐 건 뭔데요?”

“당당하다면 인형으로 둔갑을 시킬 이유 따위 없겠지. 그리고 내게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을 거다.”

말하면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는 파이가 팔짱을 끼며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럼 다시 묻지. 나와 하룻밤을 보낸 뒤에 떠나면 미련이 없을 것 같아서 그런 앙큼한 짓을 저질렀나?”

…정말 누가 드래곤 아니랄까봐. 저런 부끄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다니. 분해 죽겠네.

“그, 그래요! 난 이제 미련 없어요. 약속한 대로 이제 파이 안 좋아할 거라고요. 그럼 됐잖아요? 그러니까 서로 불편하게 이러고 있지 말고…….”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응?”

“정말 몰라서일 거라고 추측은 하지만 나는 아직 끝까지 가지 않았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쳐다봤다. 그러자 평소와 다름없이 심드렁한 얼굴로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그가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렸다.

“너는 어제오늘을 포함해 절정을 수없이 느꼈지. 하지만 나는 아직 사정을 하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의 하룻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건 마치 아카데미 시절, 자기한테 시집오라고 했던 어느 후작가 영식이 했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그 영식이 나한테 너의 내장을 핥아 먹고 싶어, 라고 얘기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지금 저 드래곤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정을… 하지 못했다니요?”

“여성이 절정에 다다르는 것과 비슷하다. 꽤 많이 참았는데. 네가 힘들다고 칭얼거려서 세 번이나 하다가 말았지. 처음은 기절했기 때문이었고, 그 다음은 체력부족.”

뭐야? 그게 끝이 아니었다고? 맙소사. 나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진짜 숨이 넘어갈 정도로 시달려서 이대로 가다간 내가 죽겠다 싶었던 기억이 난다고.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면 대체 얼마나 더 해야 한다는 거야?

얼굴에 핏기가 싹 내려갔다. 순간 어제 그의 거대한 살덩이가 뻐근하게 밀려들어왔던 자극이 떠올라 소름이 일었다. 처음 열렸던 질구가 한계치까지 벌어졌던 느낌이 새록새록 떠올라 아랫배가 확 조여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