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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51화 (251/277)

251화

"다들 고생 많았구나."

헬라.

그녀가 자신 앞에 모여 있는 천족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고한 그녀의 자태에 천족들은 깊은 경외심과 존경이 어린 눈빛으로 화답했다.

"많이들 놀랐을 테지. 나도 그러한데 너희들의 마음이 얼마나 혼란하고 두려울지는 나 역시 심히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구나."

"……."

천족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헬라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눈을 뜬 채 이곳을 유랑하였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그 순간에나마 이곳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아보기 위해서였지. 허나…."

헬라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쳐 갔다.

"결국 밝혀내지 못했구나. 너희들에게 미안한 마음 역시 금할 길이 없으나… 우리가 함께 헤쳐나가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야."

헬라의 말에 침울할 법도 하지만 천족들은 그 어떤 서운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들도 잘 알고 있다.

헬라가 얼마나 자신들을 걱정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말이다.

"우선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이 공간 안에 마족과 영족이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

천족들도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

그들 역시도 그 사실에 대해서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혼란하구나. 아무래도 이것은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하니, 그대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 내 이리 말을 꺼내게 되었다."

헬라가 천족들을 바라봤다.

하급 천족부터 상급 천족까지.

그리고 이제는 몇 남지 않은 대천사들까지도.

그러던 중.

"결코… 영족과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분명 우리에게 큰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대천사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는 한, 언제든 우리의 존폐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들. 혹여라도 영족과 마족이 손을 잡게 되는 날이라면…."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다.

물론 영족과 마족이 손을 잡게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들로서는 쉽사리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마족들이 아무리 사악하다고는 하나, 설마 영족과 손을 잡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과한 억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족 한 명이 이야기했다.

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다수는 그의 그런 말에 부정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천족들은 한동안 논쟁을 시작했다.

마족과 영족들과 절대 함께 할 수 없다는 이들도 있었고.

두 세력이 손을 잡기 전 기습을 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마족이나 영족과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천족은 단 하나도 없었다.

좋고, 싫고를 떠나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다시 헬라가 입을 열었다.

"역시 나의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구나. 하지만…."

조금은 머뭇대며 말끝을 흐린 헬라.

그녀에게로 다시 수많은 시선들이 향했으니.

"내가 먼저 마족의 칼제르를 만나 볼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

헬라의 말을 듣고서도 한동안 한족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자신들이 무언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하는 그런 표정들을 지으면서.

"내가 직접 칼제르와 만나 담판을 지어 볼 생각이다. 내가 본 칼제르는 적어도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라면 분명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아 낼 수 있을 만한…."

"헬라시여!"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악한 마족과… 그것도 마족의 전쟁 영웅인 칼제르와 대담을 나누시다니요! 그것만은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희를 보내 주십시오! 혹여라도 칼제르가 헬라님께 무슨 짓이라도 했다가는…!"

하지만 다시.

헬라는 손을 들어 소란을 멈추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가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염려하는 것만큼이나 나 역시 너희가 염려되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직접 가서 다가올지도 모를 거대한 싸움의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여야 하는 것이다."

단호했다.

헬라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그것이 바로 천족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천족의 수장인 헬라의 힘이었으니까.

"헬라시여…."

"크흑…!"

천족들은 헬라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침음만을 흘려 보낼 뿐이었다.

그들도 알고 있다.

헬라가 저렇게 작정한 이상 그 누구도 헬라의 고집을 꺾어 낼 수 없다는 것을.

"걱정 말아라. 내가 칼제르에게 쉽사리 해를 당할 만큼 나약하지는 않으니까."

아무렴.

그들이 모를 리 없다.

헬라는 칼제르와 직접 대적할 만큼이나 강인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던 그때.

"크흐흐하하하하!"

어디선가 괴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그와 함께 천족들은 급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것 참 잘 되었군!"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그 외침의 주인공은 바로.

"카, 칼제… 칼제르다! 칼제르가 나타났다!"

칼제르와 베르제르.

그리고 강민이었다.

"저, 전투를 준비하라!"

"적의 침공이다! 당장 전투를 준비해!"

천족들은 황급히 무기를 꺼내들고 칼제르를 향해 겨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만!"

헬라가 천족들을 멈춰 세웠다.

"다들 무기를 내려 놓아라."

헬라는 침착했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혼란에 휩싸인 천족들은 헬라와 칼제르를 번갈아 바라보며 일대의 소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잠시 이어져 나온 헬라의 한 마디에 모두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칼제르. 당신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리고 벌써 어느 정도 칼제르의 의중을 파악했다는 듯한 그런 말이었다.

***

"재미있군. 마침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저 역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잠시 천족들을 물린 뒤, 칼제르와 헬라는 어색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로서도 이 상황이 낯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시간동안 반목해 왔던 두 세력.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두 세력의 수장이 되어 버린 그 둘로서는 서로와 감히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걸 평생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면. 조금 전 했던 그 말 역시 나를 의식해서 한 말인가?"

칼제르가 물었다.

천족들 앞에서 마족과 손을 잡겠다는 그 발언 말이다.

"…그렇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혼자서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마침 당신의 기운이 느껴졌고, 당신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확신은 어디에서 온 거지?"

칼제르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당신은 합리적인 마족입니다. 여기에서 영족과 손을 잡을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고 영족과 우리 천족 모두를 적으로 돌릴 생각도 없으실 테지요."

"호오…."

"그리고 무엇보다…."

헬라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강민이 서 있었다.

강민을 바라보는 헬라의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는 칼제르도 즉시 알아 챌 수 있었다.

"…역시. 이 친구의 말대로군."

강민이 말했던 그대로.

마족인 칼제르가 강민을 받아들였다는 것만으로도 헬라의 입장에선 칼제르와 마족들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고 확신할 만한 강력한 근거가 되었을 테니까.

"…놀랍군요. 마족과 함께 있는 인간이라니. 사실 의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혹시 미끼가 아닐까. 하지만… 저 인간의 면면을 살펴보며 미끼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왜지?"

헬라의 말에 다시 눈을 빛내는 칼제르.

"강했으니까요."

"하아…!"

칼제르의 입에서 터져 나온 탄성.

"저 인간은 마족이. 아니, 설사 당신이라고 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강하군요. 거기에서 다시 확신을 얻었습니다. 당신이 저 인간과 손을 잡았고, 어쩌면 당신이 아닌 저 인간이 당신을 설득했을지도 모르겠다고요."

"정말이지… 내 속을 낱낱이 들켜 버렸군."

칼제르는 혀를 튕기며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저 인간 덕분에 당신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군요."

그때.

"내가… 이들과 손을 잡고 당신들을 공격했을 수도 있지 않나?"

강민이 물었다.

하지만 헬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무고한 자를 해칠 만큼 나쁜 존재는 아니니까요."

"……."

헬라의 한 마디에 강민도 한 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단하군."

그렇게 강민의 감상이 끝났고.

헬라는 베르제르를 바라봤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당신은 여전하시군요."

그 말에 베르제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뭔 소리야! 내가 얼마나 늠름한 마족으로 자랐는데!"

"그런가요? 다시 보니 그런 것도 같군요."

헬라의 말에 베르제르의 수하들은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으하하하하! 정말이지 헬라 그대는 못 당하겠소!"

칼제르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

강민 역시 말은 없었을 뿐, 그 상황을 보며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잘 됐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조금 마찰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걱정은 무색하리만치 헬라과 칼제르의 대화는 담백했고, 유쾌했다.

'오랜 적으로 있어서 미운 정이라도 들은 것인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여튼, 이렇게 대화는 잘 마무리되었고.

아직 완전한 동맹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 할 수 있을 테지만 수장 둘 간에 타협을 보았으니 곧 두 세력이 하나로 힘을 합치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

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가."

이제는 정말 다시 한번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어비스 상부에 있는 탑을 차치하기 위한 영족들과의 전쟁.

"좋지."

"좋습니다."

칼제르와 헬라가 동의했다.

"그럼 먼저 아직 다 모이지 못한 영족들을 처치해야 한다."

내가 말했다.

"쉽지 않겠군."

"워낙 드넓은 곳이라 영족들을 모두 찾아내는 게 어려울 겁니다."

칼제르와 헬라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

의문을 표하는 헤라와 칼제르.

자세하게 설명할 여유는 없지만, 내게는 초감각이라는 능력이 있었으니.

어비스가 아무리 드넓다고 한들 녀석들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대충 이 근방에 땅속에 숨어있는 영족들이 있는 것 같군."

"그게 무슨…?"

"땅속에 숨어있는 걸 보니 꽤 은밀한 녀석들인 것 같은데. 이 녀석들을 가만뒀다간 골치가 아플 것 같으니 녀석들 먼저 처치하는 게 좋겠어."

내 말에 칼제르와 헬라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지?"

"그, 그것이…."

"허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격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영족의 위치를 찾아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었을까, 싶었지만.

잠시 후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대체 그 녀석들의 위치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알아낸 거지? 그 녀석들은 분명… 잠복형일 텐데!"

잠복형.

그게 무엇인진 모르겠다만.

내가 아무래도 영족들의 급소를 건드린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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