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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250화 (250/277)

250화

얼마나 오래 싸웠는지 헤아리는 것조차 포기했을 무렵.

칼제르는 싸움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내가 졌네.'

아무런 뒤끝도 없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칼제르.

하지만 나와 칼제르의 싸움은 누가 이기고 지느냐가 중요한 싸움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흐를수록, 나와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한 끗 차이의 접전.

그러니 종국에서는 누가 이기고 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조금 더 버텨내느냐의 싸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내가 이겼다는 건, 나의 체력이 조금 더 남아 있었다는 것 정도.

어쨌든 칼제르는 그것을 나의 승리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를 보고 복잡한 시선을 보내오는 마족들 말이다.

설마하니 칼제르가 마족들 앞에서마저도 자신의 패배를 시인해 버릴 줄이야.

이건 나도, 그리고 베르제르도.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 그대로 칼제르의 돌발적인 행동.

"아, 아저씨!"

베르제르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칼제르를 다그쳤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냐. 너도 직접 보지 않았더냐."

"그, 그래도… 이, 이게 뭐냐고!"

베르제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베르제르의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도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이라 베르제르마저도 침착하게 있었으면 내가 소리를 지를 뻔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정작 칼제르만은 담담하게 마족들을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다들 들었느냐! 인간이라고 무시했다가는 큰코다칠 게야! 으하하하하!"

칼제르의 큰 웃음은 결국 마족들을 더욱더 큰 혼란에 빠트릴 뿐이었다.

"……."

결국 나는.

풀썩

자리에 주저앉은 채 마족들을 바라봤다.

조금 당황했던 건 사실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래. 내가 한강민이다. 어차피 너희는 내 털끝조차 건드릴 수 없을 테니, 괜히 나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그냥 이 상황을 즐겨 보기로 했다.

그러자.

"크하하하하!"

칼제르는 다시 큰 웃음을 터트렸다.

***

"젠장… 젠장…."

"조용해라, 베르제르."

"아오…, 정말…."

"쓰읍!"

베르제르는 한동안 투덜대고 있었고, 그런 베르제르가 귀엽다는 듯 칼제르는 크게 꾸중을 하진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베르제르를 지켜보다보니 그냥 귀여운 동생이 하나 생겼다는 느낌이다.

물론 나이는 나보다 한참 많을 게 분명하다.

얼핏 듣기로도 베르제르의 나이는 인간의 나이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보다 빨리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내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한 시가 아까운 상황에 잡담을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크흠, 흠. 그렇지. 미안하네."

"끄응…."

내 말에 칼제르와 베르제르도 내가 앉은 방향을 돌아봤다.

"어쨌거나 마족들이 꽤 많이 모였으니 일을 진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다."

"그건 나도 동의하네. 아직 조금 더 모여야 할 테지만, 이 정도로도 대사를 진행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테지."

그렇게 말하며 칼제르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내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지금 당장 계획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나에겐 조금 더 많은 정보들이 필요했다.

"먼저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다."

"그게 무엇인가."

"너희와 천족, 그리고 영족이라는 이들과의 관계지."

"호오…."

내가 필요한 정보는 바로 그것.

지금의 상황을 보자면, 분명히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 모두와 동시에 싸우게 된다는 건 나로서도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칼제르 하나만 봐도 천족과 마족의 수장들이 얼마나 강할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 바.

둘 모두와 동시에 싸워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관계라…."

칼제르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던 때.

"쳇.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가 있어? 천족 놈들은 재수는 없어도 쓰레기는 아니잖아."

베르제르가 먼저 치고 나왔다.

"그건 그렇지."

베르제르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칼제르.

"하지만 진짜 문제는 영족 놈들이야. 그 놈들은 영족과 천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게 말이 좋아서 균형 유지라고."

그 말은 내 흥미를 끌었다.

"더 말해 봐."

"흐응….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이거야. 균형 유지가 서로의 합의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성가시니까 억지로 균형이 유지된다는 느낌이라는 거지."

"허허! 베르제르의 설명이 정확하네!"

"그렇다는 말이지…."

저 말로 대충 세 세력간의 관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중앙에 있던 영족을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기에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은데. 내가 이해한 게 맞나?"

"그래."

"정확하네."

"재밌군."

흥미로웠다.

영족이라는 존재가 대체 어떤 존재기에 이렇게 강한 칼제르조차 꺼리게 만들었는지.

"영족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놈들은 마계와 천계 중간의 균열에서 어느 순간 태어난 녀석들이야. 아주 고약한 놈들이라고!"

베르제르가 씩씩대며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리 봐도 영족들에게 뭔가 크게 당한 게 있는 모양이다.

"그놈들 때문에 긴 전쟁이 일어났고, 덕분에 72대악마와 12대천사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고."

"그렇군."

"끔직한 사건이었지."

칼제르도 아찔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차원의 균열에서 태어난 녀석들은 천계와 마계 사이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키워가기 시작했어."

"그래서?"

"처음엔 무시했어. 별일 있겠나 싶어서. 하지만 그게 실수였지. 녀석들은 빠르게 영역을 확장하며 결국 천계와 마계까지 넘보기 시작했어. 균열에서 태어났다는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영역에 대한 집착이 엄청났거든."

"그래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군."

"그래."

베르제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아. 영족의 우두머리… 그 녀석은 정말…."

베르제르가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미약하게나마 들썩이는 그의 어깨가 그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영족의 우두머리라는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베르제르가 나보다는 약하다고 하지만, 놈 역시 마계에서 꽤 강한 축에 속하는 마족임에는 틀림이 없을 테니까.

"베르제르. 약한 모습 보이지 말아라."

칼제르가 베르제르를 향해 말했고.

베르제르는 짧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두운 표정은 쉽사리 감추질 못했고, 그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참아낼 뿐이었다.

"주군…."

"……."

베르제르의 수하들의 표정도 베르제르 못지않았다.

"흐음…."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는 칼제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르제르를 위로하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근심은 가득했다.

"많이 강한가 보군."

"쉽지 않네. 나 역시 그자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러면서 칼제르는 자신의 가슴팍에 나 있는 거대한 흉터를 가리켰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이곳이 욱씬거리는 것 같다네."

"그렇군."

"자네 역시 결코 방심해서는 안 돼. 내가 그자와 겨뤘던 건 내가 한창 팔팔하던 때였으니 말일세."

"음… 희소식은 아니군."

"그렇겠지."

"……."

그 말에 다시 한번 분위기가 싸해졌다.

"됐다. 정보는 그 정도로 충분해."

나는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괜히 정보를 얻자고 시작한 대화가 분위기를 처지게 만들어 버리다니.

그만큼 영족이라는 녀석들이 만만치 않은 뜻일 테지.

"그래.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더 이상 괴로워 할 필요가 있겠느냐, 베르제르."

"그래. 그 말이 맞아."

베르제르 역시 애써 나쁜 감정을 털어냈고.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이번 대화로 힌트를 얻어낸 건 사실이다.

"공동의 적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며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흐음… 결국 천족과 손을 잡자는 말이지 않은가."

"그래. 지금 우리가 천족, 영족과 동시에 싸운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아."

칼제르는 턱을 어루만지며 짧은 탄식을 흘렸고.

베르제르와 다른 마족들도 영 시원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뜻이 무엇인지는 알겠으나…."

"그게 말처럼 쉬울까."

저들의 반응 역시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

"하지만 애초에 너희 세계에서 천족과 마족이 함께 영족과 대응했다는 이야기로 들렸는데. 내 말이 틀린가?"

"흐음….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함께 대응한 건 아니었지. 그저 영족 녀석들도 양쪽의 공격이 성가시니 굳이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뿐."

"단 한 번도 천족과 마족이 손을 잡아 본 역사는 없는 모양이군."

"당연한 말을."

"그 재수 없는 비둘기들하고 어떻게 손을 잡아!"

베르제르가 격하게 소리쳤다.

저 반응을 보건대, 천족 쪽에서도 조금 점잖게 답할 뿐이지 거절하리라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를 바 없을 테지.

"하지만 결국 너와 다른 둘 역시도 그 '탑'을 노리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을 텐데."

"그럴 테지."

어비스 상부에 있다는 거대한 석탑.

그것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을 싸움.

"이렇게 된 거 천족들과 함께 잘살아 보는 건 어떻겠나. 영족이라는 녀석들을 아예 지워 버린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

"끄응…!"

나의 제안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칼제르와 베르제르.

"나도 확답은 못 하겠지만, 너희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탑에 있을 것이다."

애매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중이다.

그 탑이 어비스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이고.

그리고 그 정상에 탑의 '머리'가 있다면, 놈과 마지막 싸움을 벌인 뒤에 이 뒤엉킨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만일 너희 세계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영족이 없는 쪽이 너희에게도 수월할 것 같은데."

나의 말을 들은 순간.

"그래. 알겠네."

칼제르가 답했다.

베르제르 역시 반박하지 못했다.

"그럼 결정되었군.

베르제르와 칼제르의 오묘한 반응을 뒤로한 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내가 천족과 마족 사이의 접착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판단이 틀린가?"

"흐으으음…?"

"너희가 인간인 나를 포용했다는 걸 보여준다면, 천족에서도 그리 나쁜 시선을 보낼 것 같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호오…!"

칼제르의 묘한 탄식이 이어졌고.

결국.

"어쩌면… 될 수 있을 것도 같군. 비둘기들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을 세우곤 했으니까 말이야."

칼제르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거 어쩌면 자네를 만난 게 절묘한 한 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그것 참 다행이야."

결정이 되었으면, 이제는 다시 움직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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