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43층에 올라섰다.
43층의 대기실에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명가 녀석들도 꽤 있군. 직계는 없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탑의 고층이라고 해도 명백히 최고층은 아니었으니, 이미 직계들은 이 정도는 모두 치고 올라갔을 테니까.
어쨌든 그들도 모두가 거인족과의 싸움을 앞두고 함께 파티를 맺을 플레이어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43층의 클리어 조건은 이렇다.
세 명이 파티를 이뤄 거인족이 등장하는 전장에 입장한다.
그리고 세 명의 플레이어는 협력을 가장한 경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승리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단 한 명.
우주적 존재들이 세 명 중 한 명을 뽑아 다음 단계로 보내주는 것이다.
남은 두 명은 거인족과의 싸움에서 죽거나, 우주적 존재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로 다시 대기실로 귀환.
그렇게 총 두 번의 전장에서 모두 우주적 존재들의 선택을 받아야만이 43층을 통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선 첫 번째는 세 명의 플레이어가 힘을 합쳐 생존을 목적으로 하되.
세 명 중에서 가장 크게 활약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삼인 파티를 구성하는 순간부터가 눈치싸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거인족과 충분히 싸울 만한 실력을 보유했으면서도 자신의 실력이 돋보이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플레이어를 고르는 것.
그게 바로 43층에서의 '전략'인 셈이다.
'한 번 볼까.'
나는 모여 있는 플레이어들을 둘러봤다.
개중에는 이미 두 명이 모여 있는 경우도 있었고, 아직도 어떤 파티원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등장한 순간부터 나를 살피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이주성이라는 이름을 확인한 즉시 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견제, 혹은 비웃음.
상반된 두 가지 감정들이 뒤엉킨 표정들이다.
아무래도 어비스에서 명가의 플레이어들을 처치했다는 소식을 저들도 알고 있을 테니, 명가 쪽 플레이어들은 나를 견제하고 있었다.
일반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너무 나대지는 말라는 얼굴로 나를 흘겨보기도 했다.
재미있는 반응들이다.
그리고 어쨌든 나도 그런 플레이어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으니.
내가 플레이어들을 살펴보는 이유는 하나다.
생존도, 경쟁도 아닌 우주적 존재들의 흥미를 크게 끌 수 있을 만한 플레이어.
이건 또 내 나름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호….'
내 눈에 들어온 건,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였다.
역시 검술명가의 문양이 적힌 갑옷을 입고 고고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 녀석의 얼굴은 낯이 익지는 않는데.'
아무래도 방계쪽 플레이어인 모양이다.
그래도 확실히 체술 명가나 마법 명가 쪽 방계에 비해서는 훨씬 자세가 정제되어 있다.
만약 다른 명가 쪽 방계였으면 벌써 내가 누군지 아냐며 떠들어 대고 있었겠지.
그때 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확실히 검술 명가라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반응이다.
여기에 있는 다른 명가의 방계들은 웬만해선 나와 얽히지 않으려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나도 놈에게 조금은 흥미가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검술 명가 플레이어의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고, 더욱이 많은 우주적 존재들이 저 녀석에게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저 관심을 내게로 돌릴 수 있으면 43층에서도 수백만 어비스 포인트는 끌어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지.'
문제는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가 나와 파티를 맺어주느냐다.
말했듯 협력을 가장한 경쟁이 중요한 층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저벅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가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네 이름은 들어봤다. 이주성."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뭐 어쩌라는 건지,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
참았다.
"나는 검술 명가의 김호윤이라고 한다."
방계라는 말은 곧 죽어도 안 한다.
그래도 가오는 살리겠다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용무는?"
어차피 친목을 다지자는 것은 아니겠고.
나에게 왔다는 건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일 테니,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이다.
"나와 함께 거인족의 전장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나는 이미 한 번의 전장에서 우주적 존재들의 선택을 받았다. 두 번째 마지막의 제물로 너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지."
역시 자신감이 깊게 묻어나는 발언이다.
당연하게 나 정도는 꺾고서 우주적 존재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그런 자신감 말이다.
"나야 나쁘지 않겠지만. 정말 자신 있겠나."
나도 질 수는 없지.
여기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간다면 오히려 저 녀석은 흥미를 잃을지도 모른다.
놈의 호승심을 자극시켜 조금 더 열심히 있는 모든 실력을 끌어올리게 만들어 줘야 더 재미있을 테니까.
"웃기지도 않는군."
놈은 태연한 척 이렇게 말했지만, 감정을 온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어쨌든 녀석도 명가의 플레이어.
나와 대화하는 이 순간에도 나를 멸시하는 마음이 마음속에서 꿈틀대고 있을 것이고.
그 와중에 내가 자신의 실력을 깎아내리니 화가 치미는 건 당연하겠지.
여기에서 한 방 더.
"그래. 나 역시 너 정도면 꽤 재미있을 상대라고 생각한다."
"……!"
그렇게 말하니 놈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렸다.
체면상 화는 내지 못하겠지만 당장에라도 나를 향해 검을 뽑아 들것만 같은 기세다.
"자, 문제는 이제 우리 둘 사이에 누가 끼어들겠냐는 것이겠군. 웬만한 도전정신으로는 우리 둘의 파티에 끼어들 강심장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
그 말에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도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나 나와 이 녀석의 파티 성사를 눈앞에 두고 우리 둘을 살피고 있는 플레이어는 꽤 많았지만.
누구도 쉽사리 다가오지는 못했다.
명가의 플레이어는 당연하고, 일반 플레이어들도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는 차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들이다.
"우선 기다려 봐야겠군. 여기에 머저리들밖에 없다면, 너와 나는 서로의 길을 가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모두가 들으라는 듯,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멍하니 지켜보던 명가의 플레이어들의 반응이 꽤나 격하다.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는 이기지 못하더라도,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할 말이 아니라는 반응들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하겠다."
플레이어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고.
"창문구가의 구철민이다."
창문구가.
즉, 창술 명가의 플레이어였다.
창술 명가.
근접계열이며 육체 능력을 중시하는 가문.
즉, 검술 명가와는 묘한 경쟁 관계에 놓인 이들이었다.
물론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이라는 게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
[수많은 우주적 존재들이 모여듭니다.]
[격이 높은 우주적 존재들이 상석에 자리합니다.]
[격이 높은 우주적 존재들이 으름장을 놓으며 조용히 하라고 소리칩니다.]
거인족과의 싸움을 앞두고 전장에 돌입한 순간 떠오른 메시지였다.
검술 명가의 김호윤.
그리고 창술 명가의 구철민.
두 사람을 보기 위해 많은 우주적 존재들이 모여들었다.
거기에 나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는 우주적 존재들까지 더해져, 지금 우리 셋이 서 있는 전장에는 벌써 천에 가까운 우주적 존재들이 모여들었다.
'격이 높은 녀석들도 꽤 많아.'
잘 됐다.
어차피 여기에서는 플레이어들끼리 검을 겨누고 싸울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창술 명가와 검술 명가와 당장에 척을 질 필요도 없이 놈들의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놈들의 자존심도 한 풀 꺾어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기도 했고.
아까부터 구철민은 나를 노려보며 기분 나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김호윤과는 상반되게 노골적으로 나에게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만약 여기에서 너의 그 언행에 책임지지 못한다면 당장 네 모가지를 내 창이 관통하게 될 것이다."
아까부터 반복해서 나를 죽여 버리겠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해는 간다.
결국 저 녀석이 우리의 파티에 끼어든 건, 어디까지나 나의 도발 때문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김호윤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검을 갈무리하고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과연 검술 명가는 검술 명가야.'
방계일 뿐인데도 웬만한 도발에는 넘어가지도 않았고, 창술 명가 플레이어의 난동에도 집중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네놈이 체술 명가를 건드렸다는 사실은 이미 들었다. 위드 길드라는 허접한 녀석들을 등에 업고 나대는 것 같다만…."
"그만하지."
나는 결국 듣다 못해 구철민의 말을 끊었다.
"뭐, 뭐…?!"
"주제를 파악하라는 말이다. 나는 너 따위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어. 네 역할은 세 명의 파티를 이루기 위해 머리를 채우는 것 그뿐이다."
"미친 새끼가!"
카아앙!
구철민이 창을 뽑아 들고 나를 겨냥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딱히 검을 뽑아 들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쯤 하지."
그때 들려온 김호윤의 목소리.
"하,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네 역할은 머릿수를 채우는 게 다다. 이주성 너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네 녀석에게 조금 흥미가 있었을 뿐, 어차피 너희 둘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이…!"
구철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검술명가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그렇게 무시하는 모습을 참기는 힘들 테지.
하지만 그때.
우우웅!
김호윤이 검을 뽑아들고 구철민을 겨눴다.
동시에 그의 검 위로 치솟은 푸른 기운.
'검기.'
검술 명가 특유의.
그리고 지금의 검술 명가를 만들어 줬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기술.
"……!"
"감당할 수 있으면 계속 지껄여 보던가."
절제된 그 한 마디에 구철민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내 말은 무시하더라도 김호윤의 말은 무시할 수 없었겠지.
'그보다.'
내가 주목한 건 김호윤의 검기였다.
전생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집중해서 검기를 바라 볼 기회는 없었다.
'확실히 오러블레이드와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르다.'
오러 블레이드에 비해서 훨씬 응축된 기운이다.
'효율은 뛰어나지만 파괴력 자체는 오러 블레이드가 더 뛰어나다.'
그것이 내 결론이었다.
물론 고작 43층에 있는 방계의 검기를 분석한 결과기는 했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오러 블레이드가 결코 저 검기에 비해서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
아니, 오히려 오러 블레이드가 더 뛰어난 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오러 블레이드는 명백히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
'반면에 검기는 시스템이 아니라 저들의 신체에 각인된 능력이지.'
그 말은 즉, 검기란 시스템과는 별개로 개개인의 재능과 컨디션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의 오러 블레이드는 상태창에 수치화된 '고정된' 공격력을 어느 때에나 동일하게 펼쳐낼 수 있다.
언제 어디서라도 동일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장점인지는 탑을 오를수록, 더 극한의 환경에 놓일수록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제 아무리 직계의 플레이어라고 할지라도 검기 혹은 검강이라도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지.'
그토록 완전무결하게만 보였던 검기였건만.
지금에 와서는 그 단점을 분석해 낼 수 있을 여유마저 갖게 된 나의 모습이 문득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잠시 후 거인족의 전사 '아탈라'가 소환됩니다.]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