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다들 올 줄은 몰랐는데."
내가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 사람이란, 당연히 박명철, 한동희, 그리고 김민희였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시 한번 정리할 생각으로 연락한 것뿐이고.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꽤나 바쁠 수밖에 없을 테니 세 사람이 전부 나를 보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던 일 다 때려치우고 왔죠."
"저도요. 헤헤."
한동희와 김민희가 답했다.
"아니, 근데 대체 어떻게 개미굴을 그렇게 빨리 돌파한 거예요? 일주일도 안 걸렸죠? 아니지. 일주일이 뭐야!"
"혹시…. 제일 쉬운 난이도 선택한 거 아니에요? 어디지? 그 칼날 개미. 맞지? 나 때는 칼날 개미가 제일 셌거든요?"
"나도. 칼날 개미가 제일 셌어요. 아직도 걔들이 제일 세요?"
한동희와 김민희가 이런저런 질문들을 쏟아냈다.
"지금도 칼날 개미가 가장 강합니다. 당연히 칼날 개미는 선택을 안 했고."
"그럼 뭐 했어요?"
"호랑 개미."
그 말에 생각에 잠긴 두 사람.
"호랑 개미? 그런 애들도 있었나?"
"있었던 것 같은데…. 난이도가 어때요?"
"측정 불가였습니다."
그 이후로 업적과 함께 난이도가 바뀌었다는 얘기는 안했다.
굳이 그런 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미친…."
"측정 불가? 그런 난이도도 있어? 아니. 그런데 이렇게 빨리 왔다고요? 말이 돼? 대체 뭔 짓을 한 거예요?"
그들의 질문에 맥주를 열심히 삼키던 몰른이 눈을 번뜩였다.
"우리 주인님이 있잖아요오오!"
몰른은 신이 나서 개미굴에서 있던 일들을 쏟아냈다.
몰른의 말이 이어질수록 김민희와 한동희의 눈이 동그래지고 입은 떡 벌어졌다.
"대단하십니다."
그런 세 사람을 뒤로한 채, 박명철이 입을 열었다.
"대단하긴요. 갈 길이 멉니다."
"하하…. 그건 그렇고 지금 탑 상황은 보고 드린 대로 대 혼란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명철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 그 외의 특이 사항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 철목 길드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렇군요."
새로운 정보는 이 정도가 다였다.
그리고 철목 길드의 몰락과 함께 화랑 길드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 정도.
"그건 그렇고 부탁 하나 드리겠습니다."
내가 박명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예?"
"손이 좀 갈 수 있으니 직접 보다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박명철 앞에 개미 등껍질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게 뭡니까?"
"개미의 등껍질입니다."
"네…?"
박명철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꺼냈으니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겠지만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역시 이 시점에서 개미 등껍질은 그냥 그런 잡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걸 가지고 해밀턴이라는 대장장이를 찾아가 주십시오. 25층에 있는 대장장이입니다."
"예?"
"가서 내 이름을 말하고 괜찮은 장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 충분히 납득할 겁니다."
"그, 그건 알겠는데… 이걸로 장비를 만든다고요?"
"예."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명철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우선은요."
해밀턴이 손을 한 번 봐 준다면, 홍보용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아이템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해밀턴의 장비를 가지고 대장장이와 마을에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개미 등껍질의 성능을 보여 주고난 뒤.
'내가 가지고 있는 개미 등껍질의 물량을 조금씩 푼다.'
그러면 분명 큰 어려움 없이 목돈을 쥘 수 있으리라.
'가지고 있는 개미 등껍질은 2000개가 넘으니까. 최소 200만 골드 이상은 확보한 셈이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돈까지 합친다면, 내가 확보할 수 있는 최소 자금은 300만 골드 이상.
'35층에서는 쉽게 거머쥘 수 없는 거금이다.'
게다가 비밀 상점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플레이어들은 35층에 올라와서 마음껏 쇼핑을 즐긴다.
그러니 35층의 플레이어들이 가지고 있는 돈은 평균 잡아 50만 골드 언저리.
많아 봐야 100만 골드를 넘기기 힘들다.
물론 총자산이야 다양하겠지만.
'순수한 현금으로 300만 골드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많은 돈이지.'
말 그대로다.
그 즉시 사용할 수 있는 현금만으로 300만 골드는 분명하게 많은 액수다.
손에 꼽을 정도로.
그리고 내 전생의 기억에 따르자면 비밀 상점에서 판매하는 가장 비싼 아이템이 200만 골드에서 300만 골드 사이다.
당연히 돈을 아낄 생각은 없다.
엄청난 거금이지만, 비밀 상점에서 파는 200만, 300만 골드의 아이템은 시가로 친다면 수천 만 골드의 가치를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아이템이니까.
"아무튼 부탁합니다."
"예. 맡겨 주세요."
나와 박명철의 대화가 끝났을 무렵.
몰른이 열심히 떠들고 있던 무용담도 어느 정도 끝이 난 상황이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맥주 한잔하면서 여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지금은 마법 명가 녀석들의 상태를 살펴보는 게 우선이다.'
물론 지금 당장 놈들을 공격할 수는 없다.
내 두 눈으로 놈들의 상태를 진단하고 난 뒤 움직일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몰른은 조금 더 남아서 맥주를 마시겠다고 했다.
***
'말이 아니군,'
35층에는 각 명가들의 분가가 존재한다.
분가란 직계가 아닌 명가의 방계들과 명가 출신이 아니지만, 그래도 명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머무는 장소다.
그것 외에도 플레이어들을 훈련시키는 등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명가의 시설이다.
그럼에도 현재 마법 명가의 분가를 경비하는 경비 인력은 꽤나 부실했다.
물론 겉모습은 충분히 그럴듯했지만.
초감각으로 살핀 그 내부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상태다.
'어쨌든 명가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분가의 경비 상태가 이 정도라는 건.'
놈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지를 확실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태라면 당장 내일 공격해도 큰 무리는 없겠어.'
하지만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마법 명가는 마법 명가다.
웬만큼 건실한 길드 이상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최대한 늦은 시간을 노려야 한다.'
단순히 놈들을 공격하는 것 이상으로 내 정체를 노출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명가나 대형 길드에게 내 정체를 노출 시킬 수는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부의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거지.'
이 시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전생에서의 마법 명가 녀석들은 분가를 개방했었다.
일종의 허세이기도 했고, 또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평범한 플레이어들의 기를 죽이는 동시에 내부를 개방해도 자신들을 위협할 세력이 없다는 자신감.'
전생의 마법 명가는 충분히 그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때야 흑암파의 육성도 완성된 상태였고, 이미 다른 명가들을 제치고 검술 명가와 투톱의 자리를 굳건히 해놓은 상태였으니까.
'나도 그때 놈들의 분가 내부를 살펴볼 수 있었지.'
명가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심.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을 시절이었다.
그리고 마법 명가의 구린내를 맡았던 나는 그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
언젠가 정말로 내게 능력이 생기고 탑을 정복하게 되면 놈들을 박살내겠다고 말이다.
일종의 사전조사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이 나올 정도의 용감함이지 않은가.
물론 전생에서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고, 결국 놈들에 의해서 쓸쓸히 죽어버렸지만….
그때의 무모함 덕분에 지금 내 머릿속에 분가 내부의 구조가 또렷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지.
'우선은 여기까지.'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괜히 이 앞에서 오래 머물다가는 녀석들의 의심을 사기 딱 좋다.
'놈들을 치는 건, 비밀 상점을 개방하고 난 뒤다.'
비밀 상점은 다시 개미굴로 돌아가기 전 개방된다.
그렇게 비밀 상점에서 거래를 마치면 다시 개미굴로 소환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는 건 어렵지 않다.
그냥 마을로 귀환하면 그만이다.
물론 더 이상 비밀 상점이 열리는 일은 없지만.
'비밀 상점에서 좋은 아이템 하나만 구매하게 된다면, 마법 명가의 분가를 부수는 건 훨씬 손쉬워 질 거다.'
전생의 묵고 묵은 그 숙원을 어서 풀고 싶은 마음에 벌써 손이 근질거리고 있었다.
***
나는 마을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며칠 정도는 더 머물러야만 한다.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 밖으로 나가는 일은 최대한 자제했다.
혹시 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최대한 얼굴을 가린 채로 외출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
마법 명가를 공격한다면, 분명 탑에는 다시 커다란 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내가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봐야 좋을 건 없다.
물론 내가 마을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해서 당장 내가 그 범인으로 지목될 거라는 말은 아니지만.
최대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나가고 싶어요오오오! 노래 부르고 싶어요오오! 맥주우우우!"
그런 와중에 몰른은 내 옆에서 하루 종일 칭얼거리고 있었다.
"참아라."
"주인니이이임!"
"……."
나는 귀를 막고 입을 다물었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나는 마력을 조금 끌어올려 귀를 틀어막았다.
몰른의 괴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으니 세상이 평화로워진 느낌이다.
그렇게 눈을 감고 앞으로의 계획을 하나씩 짚어가고 있을 무렵.
톡톡
누군가 내 팔뚝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
눈을 뜨고 시선을 돌렸다.
몰른이다.
"뭐지?"
몰른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저…."
처음 보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의 장비에 그려져 있는 문양은.
'위드 길드.'
"길드장님께서…."
"아."
그의 손에는 갑옷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해밀턴이라는 분이 만들어 주신 갑옷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그가 내미는 갑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떠오른 갑옷의 정보.
[장인의 손을 거친 등껍질 갑옷]
>방어력 : 77
>추가 스탯 : 체력 + 17
>추가 옵션 : 어둠 속에서 시야 확보 + 20m
'좋다.'
현재 내 미스릴 상의의 방어력이 97.
그런데 개미 등껍질로 만든 갑옷의 방어력이 77이다.
미스릴에 한참 못 미치는 건 당연한 일이고.
77이라는 방어력 수치는 분명 탁월한 수치다.
특히 가장 밑에 달려 있는 추가 옵션.
물론 개미의 등껍질로 장비를 만든다고 해서 무조건 달리는 옵션은 아니다.
분명 해밀턴의 솜씨 덕분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옵션이 붙은 건 사실이다.
여기는 개미굴 스테이지다.
만약 장비에 어둠 속 시야 확보라는 옵션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격이 폭등하겠지.'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나는 마음속으로 해밀턴에게 감사를 전했다.
물론 장비를 만든다고 해서 항상 같은 옵션이 나타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박명철에게 메시지 하나를 전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