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나는 철목길드의 길드장이 죽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건, 저 녀석도 말단 중의 말단 중이라는 뜻이겠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니 굳이 불을 지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그 사실을 먼저 알 정도의 정보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건 둘째 치자.
그냥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앞에 나선 남자를 바라봤다.
"그 아이디어는 참 좋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남자가 나를 등지고, 모여 있는 파티의 구성원들을 훑어봤다.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뻔히 그려지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닐 테지.
"한강민! 역시 대단한 건 인정합니다. 아직 30층에 오르지 못했으면서도 탑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남자! 멋지죠! 그렇죠?"
나를 치켜세운다.
하지만 진짜 나를 치켜세우는 게 아니라는 건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제 본론이 나오겠지.
"하지만 안타까운 소식이 있습니다. 한강민 씨의 소속 길드는…. 뭐더라? 그 잡초? 위드? 그래 맞아, 위드."
그러더니 푸훕,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몇몇도 그의 말에 동조하며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본질을 보자는 겁니다, 본질을."
"아니, 잠시만요! 그래서 그 본질이 대체 뭔데요?"
듣다 못 한 우리 파티의 리더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을 테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두 눈으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그때다.
남자가 숨을 들이쉬더니.
"실력!"
이렇게 외쳤다.
내가 뭘 잘못 들은 걸까, 싶은 마음이다.
솔직히 들어 주려고 했지만, 더 들어 주지도 못하겠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검술 명가, 혹은 마법 명가에 소속됐다면 한두 마디 정도는 더 들어 줄 수 있겠는데.
명가보다 아래에 있는 길드.
그것도 고작 5위 밖에 올라가지 못한 길드의 말단이.
"그러니까!"
그때 남자가 이렇게 외치면서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확실히 증명하겠다는 말이지!"
부우우웅!
검이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누가 더 센지!"
이건 좀 아니지 싶다.
이렇게 기습을 해 놓고서 누가 더 센지 우열을 가리자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지.
그리고 또 저렇게 유치한 대사는….
두 눈 뜨고 들어주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녀석의 검이 나의 어깨 바로 위로 닿았을 때, 나는 놈의 음흉한 표정을 읽었다.
말했듯 그리 놀랍거나 새로운 상황도 아니다.
지금껏 이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녀석들.
실력은 없지만 감투는 쓰고 싶은 녀석들.
그리고 그런 놈들의 최후가 항상 어땠었는지도 잘 안다.
아주 잘.
콰아앙!
놈의 검이 애꿎은 바닥을 내리쳤다.
"어…?"
짧은 탄식이 들려온다.
"뭐야?"
"지금 뭐한 거지?"
"어떻게…?"
어떻게 피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뭘 어떻게 피해.
눈으로 보이니까 한 걸음 옆으로 빗겨 선 거다.
그리고 나는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딱히 검을 뽑아 들 필요도 없다.
이 녀석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래도 까불지는 못하게 골로 보내 줄 필요는 있으니.
우우웅!
충격파를 사용하자 주먹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있는 그대로 놈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고.
뻐어어억!
경쾌한 타격음이 가득 울려 퍼졌다.
"커어어억…!"
짧은 신음과 함께 놈은 눈을 뒤집어 깠다.
입에서는 게거품이 뽀글뽀글 피어올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풀썩
그러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불만 있는 사람 더 있으면 대화할 의향은 충분히 있다."
나는 아까 앞으로 나섰던 녀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히 놈들에게 더 이상 존대는 없다.
존대는 적어도 대화가 가능한 인간들에게나 해주는 것이니까.
"……."
모두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거억…. 거어어억….'
바닥에 쓰러진 녀석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피가 섞인 토사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잠시 후.
"……."
놈의 몸에서는 미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안 됐군. 조금 일찍 치료를 받았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동정은 하지 않는다.
놈은 나를 죽이려 했던 녀석이다.
나는 살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했을 뿐.
"더 불만 없으면 내가 말 좀 해도 괜찮겠지?"
"…."
다들 아무 말이 없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복잡한 건 없다. 뇌가 있으면 다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내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전생에서 골렘 사제를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진형을 설명했다.
정말 간단한 진법이었고.
내 말을 들은 이들은 말이 끝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진즉에 이렇게 잘 따라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 그대로 움직인다."
내 말에 물과 기름처럼 떨어져 있던 다섯 파티의 파티원들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의 클래스 별로, 또 능력 별로 뭉쳤고, 나름의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다.
"자, 수색대 출발."
내 말에 수색조의 역할을 맡은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골렘 사제의 위치를 파악하고 파악하는 즉시 보고하는 것.
"골렘 사제의 위치를 파악하는 즉시 네 방향에서 놈들을 공격한다."
"알…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우렁찬 대답들이 들려왔다.
***
"아니 뭔…."
"괴물 아닙니까?"
"그러게요…."
수색조의 역할을 맡은 이들이 골렘 사제를 찾기 위해 맵을 떠돌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서로 다른 파티의 구성원들이었고.
서로를 견제하며 적으로 간주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한 차례 커다란 사건을 겪고 나자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관념 하나가 굳게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진 한 가지의 굳은 생각은 바로 이것이다.
'한강민이 있는 이상 어떤 또라이가 무슨 지랄을 하건 문제는 없겠구나.'
주먹 한 방에 플레이어를 골로 보내지 않았던가.
그저 그런 플레이어도 아니다.
어쨌거나 29층까지 헤쳐 온 플레이어였고.
그중에서도 잠재력을 인정받아 TOP5 길드에 가입했던 플레이어였는데.
'한 방이라니. 그것도 주먹으로.'
압도적.
아니, 그 어떤 수식어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무력이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진 남자라면 그 어떤 일이 생겨나도 처리해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러니 조금 전만 해도 서로를 적으로 여기던 이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까지 뒤따랐다.
'나만 나대지 않으면 돼.'
그저 조용히, 그리고 얌전히.
강민의 지시에만 따른다면 적어도 죽을 일은 없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민에 대해서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충분하다.
만약 강민이 물불 안 가리는 또라이였다면, 플레이어 몇 명이 앞으로 나서자마자 칼을 꺼내 들었으리라.
하지만 강민은 어떠했는가.
들어 줬다.
개소리라는 것도, 의미 없는 허세라는 것도 알았지만 들어 줬다.
'그거 하나로도 충분하지.'
모두를 한 번에 굴복시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지만, 다짜고짜 꺼내 들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강민은 충분히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판단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행이기도 하고.'
사실 그들도 골머리를 싸매고 있지 않았던가.
골렘 사제라는 괴물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운이 좋았어.'
여기에서 강민을 만났던 것.
그리고 앞으로 나섰던 이들에게 동조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
'골렘 사원도 클리어 하고 31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다.'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수색조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지 대충 30분이 지났을 무렵.
"보여요!"
저 먼 곳에서 득실대는 골렘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먼 곳에는.
"골렘 사제의 깃발입니다."
드디어 골렘 사제의 군대와 조우했다.
"이제부터 침착하게 움직여야 됩니다."
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다른 수색조들과 연락을 취하는 것.
총 네 팀으로 구성된 수색조는 골렘 사제 부대의 가장 허술한 부분을 파악해야 했다.
'허술한 부분에서 놈들의 시선을 끌어야 해.'
골렘들의 원시적인 지휘 체계를 이용한 작전이다.
네 방향에서 수색조가 골렘들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골렘들의 진형이 흩어지면, 대기하고 있던 파티원들이 네 방향으로 갈라진 골렘들과 싸우는 것.
'그리고 강민 씨가 혼자 중앙을 파고든다고 했지.'
수색조를 네 팀으로 구성한 것도.
그리고 나머지 파티원들이 네 방향에서 골렘 사제의 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것도.
모두 강민이 골렘 사제가 있는 중앙으로 침투할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다.
물론 강민의 전생에서는 최소 여섯 개의 방향에서 골렘들의 시선을 분산시켰지만.
강민이라는 독보적인 플레이어 덕분에 파티원들의 위험 부담은 훨씬 줄어든 것이다.
"우선 다른 수색조와 연락을 취할게요."
"부탁합니다."
수색조에서 연락을 담당한 플레이어가 다른 수색조의 플레이어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 준비 됐다고 합니다. 바로 대기 중인 플레이어들한테 연락을 보낼게요."
이제 남은 건, 강민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네 방향의 위치를 전송하는 것.
잠시 후 플레이어가 네 팀이 모두 위치 전송을 완료했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여기까지 오는 데 대충 20분은 걸릴 겁니다."
"그러면 10분 후 시작하면 되겠죠?"
고개를 끄덕인다.
10분 후 골렘들의 시선을 끌고, 동시에 골렘 부대가 네 방향으로 나눠진 시점부터 대략 10분.
그들이 버텨야 하는 시간이다.
"다들 잘 해 봅시다. 10분 정도 버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까."
"당연하죠."
이미 골렘들과 지겹도록 싸워왔다.
고작 세 명이라고는 하지만 10분 정도 버텨내는 건 충분한 일이었으니.
'역시 탑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건가.'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시선을 교환했다.
조금 전만 해도 적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건만.
등을 맞대고 서로를 의지하기 시작했으니.
'한강민….'
이름만 들었던 그 사람이 해낸 일이다.
내심 그런 강민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무렵.
"지금!"
네 팀의 수색조가 신호를 교환했고.
골렘들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수색조는 모두가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들이었으니.
콰콰콰쾅!
폭발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다른 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굉음과 함께 연기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골렘들이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습격당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고.
동시에 골렘들이 수색조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십 분! 어떻게 해서든 버티면 되는 겁니다!"
"오케이이!"
"해 보자고!"
그들은 더욱 더 적극적으로 골렘들의 무리를 향해 각종 능력들을 퍼부었다.
그럴수록 더 많은 골렘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으니.
'벌어지고 있다.'
네 방향으로 나뉜 골렘의 부대.
그리고 한가운데로 향하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