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당연한 말이지만, 백인장의 위치를 미리 파악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완전히 거짓도 아닌 것이 백인장이 나타나는 장소도 전생에서는 이미 열 개로 좁혀졌다.
'그리고 지금 백인장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장소는 셋.'
그렇다면 셋 중에 하나를 정확히 골라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백인장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해 놓고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가면 우스운 꼴이 되고 말 테니까.
'하지만 추측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이미 연구소에 가서 다시 파티원들이 있는 곳으로 오는 중에 대략적으로 파악을 해 놨다.
직접 백인장의 리젠 장소에 다녀온 건 아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해 놓은 상태였으니까.
'백인장은 한 맵에서도 여러 마리가 존재할 수 있어.'
26층에서 용사를 만나는 것과는 달리 동시에 존재하는 백인장 중 하나만 처치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들이 없는 리젠 장소.
그리로만 가면 백인장을 만날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설령 못 만나더라도 핑곗거리는 있지.'
이미 사냥된 것 같다, 라는 핑계다.
어차피 저들이야 증명할 수도 없을 테고.
조금은 아쉽지만 다음 리젠 장소를 향해 움직이면 그만이다.
'그래도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렇게 기도하며 나는 파티원과 용사 무리를 이끌고 백인장의 리젠 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이동하는 중에 골렘 투사가 우리를 습격해 왔다.
나는 당연히 가장 앞에 서서 골렘 투사를 어렵지 않게 베어 넘겼다.
오러 블레이드 하나만으로도 골렘 투사를 사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 전 연구소에서 습득한 스탯의 총량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덕분이기도 했다.
"역시…."
"압도적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
"같이 27층에 막 올라 온 플레이어가 맞는 건가."
"얼척이 없네요."
플레이어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쁜 소리도 아니고, 말릴 생각은 없다.
나도 듣기 나쁘지도 않고 말이다.
나 역시도 전생에서는 압도적으로 강한 플레이어들을 보며 저렇게 생각하기도 했었고.
'그나저나 슬슬….'
골렘 투사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기분 탓은 아닐 거다.
어느새 내 뒤에서 그저 지켜만 보고 있던 플레이어들과 용사의 무리도 함께 전투를 시작하고 있었으니.
골렘 투사의 숫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말은 하나다.
'잘 왔군.'
수많은 골렘 투사를 이끄는 지휘관이 있다는 뜻.
'그렇다면 여기 어딘가에 오장들도 있을 것인데.'
골렘 투사 오장.
평범한 골렘 투사와 겉모습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색깔이지.'
오장은 구릿빛.
십인장은 은색.
그리고 백인장은 황금색.
'백 마리를 하나하나 상대하다가는 플레이어들이 남아나지 않을 테고.'
그 사이에 있는 황금빛의 백인장만 사냥하면 곧바로 28층으로 올라갈 자격이 생기는 셈이니.
가능만 하다면 굳이 천 마리의 골렘 투사를 하나씩 쓰러트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나는 아니지만.'
모든 골렘 투사를 사냥할 계획이다.
시간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고.
몬스터 한 마리, 한 마리는 결국 내게 스탯과 포식 포인트를 남겨 줄 고마운 녀석들이지 않던가.
'그래도 우선은 오장 먼저 처치하는 게 맞아.'
지휘관을 잃은 병졸들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굳이 파티원들을 위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백인장을 잡기 전, 모든 골렘 투사를 사냥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이왕이면 편한 길로 가는 게 맞으니까.
뒤쪽에서는 몰른의 노래와 함께 버프의 효과를 체감한 플레이어들이 감탄사를 내뱉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버프를 힘입어 플레이어들은 열심히 골렘 투사를 하나씩, 하나씩 쓰러트리는 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 봐야 파티 전원이 모여 네, 다섯 마리의 골렘 투사를 사냥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나의 속도에 비하면 반의반도 채 쫓아오지 못하는 속도다.
오우거의 신체는 사용할 수 없으니 나머지 세 개의 능력을 적절히 교차해가며 골렘 투사를 베어 넘겼다.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대여섯 마리의 골렘 투사들이 박살난 채로 허공에 나부낀다.
[마력 0.3을 포식했습니다.]
[체력 0.4를 포식했습니다.]
[힘 0.2를 포식했습니다.]
[마력 0.26을 포식했습니다.]
.
.
.
눈앞에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스탯 포식 메시지를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골렘 투사들을 쓸어 넘기며 앞으로 나아가던 중.
'저기 있군.'
구릿빛의 골렘 투사.
오장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부터 슬슬 지휘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뜻인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오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놈도 나를 발견했다.
그럴 수밖에.
내가 이렇게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가고 있으니까.
놈이 나를 발견한 순간, 놈과 정신이 연결된 골렘 투사들이 한 번에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숫자는… 다섯.'
문제없다.
다섯 마리 정도야 2초도 안 되어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타앗!
땅을 가볍게 굴렀고.
짧게 도약했다.
회전력을 바탕으로 검을 원으로 크게 휘둘렀다.
손끝으로 골렘 투사들의 두꺼운 몸뚱이의 둔탁한 감촉이 전해진다.
오러 블레이드가 놈들의 놈을 부드럽게 가르고 지나갔고.
촤아아아악!
순식간에 다섯의 몸이 반 토막으로 잘려진 채 허공에 튀어 오른다.
그 짧은 새에 오장과 눈이 마주쳤다.
골렘은 감정이 없다고들 하지만, 기분 탓일까.
놈의 동공이 가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남은 하나 역시 눈 깜짝할 새 처리했고.
토옹!
쓰러지는 놈의 몸을 밟고 다시 한번 도약했다.
하늘을 나는 것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오장을 향해 도달했다.
놈은 구릿빛 단단한 주먹을 휘두른다.
허공에 있으니 피할 수는 없다.
아니, 애초에 피할 필요조차 없었다.
치지직!
지금 막 다시 활성화된 뇌전검의 전류가 놈의 주먹을 향해 희뿌연 직선을 하나 그렸고.
콰지지지직! 콰득!
단번에 주먹으로부터 상체를 관통해 버렸으니까.
'쉽다.'
오장까지는 단 일격으로 처치할 정도로 강해졌다.
'십인장은?'
확신할 수 없다.
골렘 투사와 오장.
그리고 십인장과 백인장.
녀석들 사이에는 몇 배의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
'어디까지일지는 알 수 없다만.'
나는 안 진다.
아니, 무조건 이긴다.
그리고 그때 두 번째 골렘 오장이 눈에 들어왔고.
놈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 나를 막아서는 골렘 투사들을 모조리 쓸어 넘겼다.
[마력 0.16을 포식했습니다.]
[힘 0.23를 포식했습니다.]
[민첩성 0.21를 포식했습니다.]
적지만 빠르게.
스탯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고.
그럴수록 골렘들과 나의 격차는 꾸준하게 벌어지고 있다.
두 번째 골렘 투사를 처치했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세 번째 오장마저 처치했다.
그리고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눈 깜짝할 새 처치해 버렸다.
내가 오장들을 순식간에 도륙하자 파티원들의 사냥은 한층 더 편해진 모양인지.
그들의 함성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때였다.
[새로운 업적이 열립니다.]
[지휘관 학살자]
[골렘 투사들의 지휘관을 모조리 학살하라.]
[1단계 : 오장 5/20]
[2단계 : 십인장 0/10]
[3단계 : 백인장 0/1]
[각 단계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업적이다.
하지만 그 업적을 본 순간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
달성하라고 만들어 놓은 업적이 맞기나 한 건지.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업적이다.
대체 어떤 플레이어가 혼자서 모든 골렘 지휘관을 사냥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업적이야 탑의 클리어와는 무관하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지만 업적을 달성하면 탑을 오르는 데 확실히 유리하다.
엄청나게 말이다.
'지독하기도 하군.'
그래도 이걸 보고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으랴.
'해야지.'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해낼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나만 얻어 낼 수 있는 업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업적 뒤에는 보상이 따른다.
'놓칠 이유가 없지.'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오장들을 찾기 시작했고.
하나씩, 그리고 하나씩.
업적 달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단계의 업적을 모두 클리어한 순간.
[골렘 오장의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악세서리라니.
모든 장비들 중에서 가장 희귀한 게 바로 악세서리다.
'돈을 줘도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다.'
지금 내가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떨어졌다.
***
용사 아킬레토.
강민과 함께 골렘을 처치하고 있는 용사의 이름이었다.
그는 타고난 장사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용사가 되어 골렘 사원으로 향하는 건, 어쩌면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성인이 된 아킬레토는 동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름을 떨치기 위해 모험을 떠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킬레토라는 이름은 왕국 내에 널리 뻗어나갔다.
국왕도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결국 국왕이 직접 그에게 검을 하사하며 세상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용사.'
그때부터 사람들은 아킬레토를 용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아킬레토에게는 하나의 철칙이 있었다.
'용사란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빛나는 사람이다.'
혼자서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동료가 없이는 반쪽일 뿐이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이기도 했다.
왕국 내에서 더 이상 적수가 없었던 아킬레토도 자신의 동료가 없었다면 골렘의 사원에 발을 디딜 생각도 못 했을 테니까.
실제로 골렘의 사원까지 오는 도중에 수많은 위험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이겨냈고,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동료가 있으니까.
그렇게 골렘의 사원에서 모험가들로 이루어진 파티와 조우했다.
그중에는 한강민이라는 모험가가 있다고 했다.
첫인상은 좋았다.
강인해 보였고, 실제로도 강하다고 했으니까.
든든했다.
하지만 그런 첫인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늘 혼자 떨어져 생활했고.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동료애나 함께, 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킬레토는 생각했다.
'저 사람은 곧 죽을 것이다.'
강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골렘 사원에서 앞으로 마주해야 할 골렘들은 강하다.
한 왕국의 군대가 몰려와도 상대하지 못할지도 모를 만큼.
그러니 그의 눈에 비친 강민의 모습은 오만한 인간일 뿐.
그는 더 이상 강민을 동료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다.
어쨌거나 강민을 제외한 다른 모험가들은 그의 동료였고.
골렘 사원의 끝까지 함께하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멀리 떨어져서 강민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멍하니.
입을 떡 벌린 채로.
'저것이 정녕 사람이라는 말인가.'
이상했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 왔던 가치관이 전면으로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혼자 모조리 쓸어 넘긴다.
그가 가는 길을 가로막는 골렘은 1초도 지나지 않아 박살이 난 채 바닥을 뒹굴고.
오장도 마찬가지다.
십인장은 또 어떤가.
그렇게 강하다던 골렘 투사 십인장마저도 그의 검을 몇 번 받아내고 나면 거동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변해 버리기 일쑤였으니까.
동료?
함께?
힘을 합쳐서?
함께라면 가능하다?
그가 숱하게 외쳐왔던 말들.
하지만 강민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는 생각했다.
'압도적인 힘….'
그리고 깨달았다.
강민은 오만한 게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랬던 것뿐이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동료도, 함께도, 힘을 합치는 것도.
그 무엇도 의미가 없는 그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오호호호호호!"
그때 한 음유 시인의 괴상한 웃음소리가 그의 귀를 두드렸다.
머리가 조금 멍해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