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좋은 거름이 돼라.'
앞에서 달려오는 녀석의 발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각!
"취에에엑!"
쿵!
놈이 순식간에 자빠졌다.
놈은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이 정도는 이미 예측했다.
뇌전검 없이 한 번의 공격으로 오크의 발목을 잘라내는 건 쉽지 않으니까.
꽈악!
반쯤 잘린 놈의 발목을 온 힘을 다해 짓밟았다.
"끄에에에엑!"
놈이 괴성을 내질렀고.
파득!
놈의 발목이 완전히 뒤틀리며 다시 한번 바닥에 쓰러졌다.
[힘 0.4를 포식했습니다.]
[포식 포인트 43을 획득했습니다.]
포식 가능 스탯은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착실하게 힘 스탯이 쌓여가고 있다.
'한 놈은 됐고.'
이제 놈은 일어나지 못할 테니.
뒤에 있는 녀석 먼저 쓰러트려야 한다.
휘익!
곧바로 바로 뒤의 녀석의 무릎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파각!
검이 놈의 무릎을 완전히 관통했다.
"취에에엑!"
쿵!
역시나 같은 장면이 펼쳐지며 오크가 자빠졌다.
[힘 0.36을 포식했습니다.]
[포식 포인트 53을 획득했습니다.]
이번엔 확실히 무릎을 공략했다.
놈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거다.
놈들의 목에 무기를 찔러 넣었다.
푸욱! 푹!
[힘 0.29를 포식했습니다.]
[포식 포인트 43을 획득했습니다.]
[힘 0.24를 포식했습니다.]
[포식 포인트 33을 획득했습니다.]
힘과 포식 포인트가 착실하게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뇌전검이 활성화됐고.
저 먼 곳에서 나를 발견한 채 다가오는 오크를 바라봤다.
'귀여운 놈들.'
과거에는 그토록 끔찍해 보였던 오크가 이제는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가자. 힘 70까지 최대한 빠르게 찍어야 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힘 70은 단지 눈앞의 목표일뿐이다.
그 이후로도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으니까.
그 이후로 나는 빠르게 오크를 학살했다.
오크가 한두 마리 있으면 뇌전검 없이도 5초면 충분히 사냥할 정도가 됐다.
운이 좋으면 한 번에 목에 검을 박아 넣고 원 킬도 가능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오크가 세 마리 이상 늘어나면 정확히 목을 노리는 게 힘이 드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한 마리에 5초라고 해서 세 마리 모였을 때, 15초가 걸리는 게 아니다.
나 역시 놈들의 공격을 피해야 하니까.
분명히 엄청난 속도기는 하지만, 역시나 아직 내 성에는 한참 못 미친다.
'그래도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엄청나기는 하다만.'
다른 녀석들은 지금 서쪽에서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겠지.
벌써 6층에 진입한 지 1시간 정도 된 것 같다.
오크는 코볼트나 고블린처럼 우르르 몰려다니지도 않을뿐더러, 오크 군락지는 꽤나 넓다.
게다가 오크가 열 마리 이상 모여 있을 경우에 나는 놈들을 조금씩 유인해 가면서 사냥해야 했으니까.
'사실 6층에서 혼자 사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인 일이기는 하다만.'
6층의 진입 조건이 10명의 파티를 이루라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10명이 모여야 겨우 6층 이후의 탑을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성가신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탑의 '배려'인 셈이다.
나도 아마 포식자라는 능력이 아니었으면 굳이 혼자서 사냥하지는 않았을 거다.
과거에도 물론 파티를 이뤄서 탑을 올랐다.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직접 사냥해야 스탯을 포식할 수 있으니, 조금 어렵더라도 이런 방법을 택했을 뿐.
'사실 파티가 수월하긴 하지.'
내가 직접 얼마나 더 많은 몬스터를 사냥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더 많은 스탯을 포식하느냐.
이게 가장 중요할 뿐이다.
레벨은 빠르게 올라서 19를 넘어선 지도 꽤 오래됐다.
오크 한 마리 한 마리는, 코볼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험치를 줬기 때문이다.
'이제 힘은 60에 가까워졌고.'
6층에에 오르기 전만 해도 힘은 48을 조금 넘은 수준이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다.
열심히 달렸더니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이클립스는 아직도 45개나 남아 있다. 15층에 있는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충분할 것 같은데.'
어차피 15층에 도착하면 이클립스는 더 이상 필요 없다.
15층부터는 꽤 쓸만한 물약을 구매 할 수 있으니까.
'우선 배를 채우자.'
보통 처음 5층 마을에서 플레이어들이 골드를 가장 많이 소모하는 건, 장비 다음으로 음식이다.
아무래도 탑에 오르고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서 맛있는 음식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데에 돈을 쓸 수는 없다.'
내 돈은 오로지 내가 강해지는 데에만 쓸 생각이다.
맛있는 음식 따위 안 먹어도 그만이다.
오크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해체하기 시작했다.
내가 먹을 고기다.
'나중에는 오크 고기가 맛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없어서 못 먹는 재료가 됐지.'
물론 이것 역시 지금으로부터 꽤 먼 미래의 이야기다.
역시나 정신 나간 어떤 플레이어의 실험정신에 의해서 밝혀진 거다.
생각해 보라.
어떤 미친놈이 이 괴물 같은 오크의 고기를 먹을 생각을 하겠는가.
하지만 한번 먹어보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진다.
'잘 훈제 해 두면 훌륭한 육포가 되고. 삶으면 수육. 구우면 삼겹살.'
오크의 고기는 돼지고기와 질감과 맛이 굉장히 유사하다.
덕분에 삼겹살을 그리워하던 플레이어들은 닥치는 대로 오크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고."
오크 고기가 꽤 많이 모였다.
오크가 여기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 욕심낼 필요는 없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오크 군락지에는 나름 조리를 위한 기구들이 있었다.
오크가 미개하다고는 해도 나름 몬스터 중에서는 문명을 건설한 녀석들이니까.
적당한 곳에 가서 오크 고기를 꼬챙이에 꿰었다.
그리고 낙엽과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고.
불을 붙이는 건 어렵지 않다.
'뇌전검.'
이미 감전 효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 뇌전검으로 불을 붙일 수 있을 거다.
파지직!
화륵!
역시.
곧 불이 붙었고.
나는 당장 배를 채울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훈연해서 보관하기로 하고.'
오크 고기가 익기 시작하며 꽤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후추나 소금이 없는 건 아쉽다만.'
탑에서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하자.
고기가 적절히 익은 뒤 나는 오크의 다리 살을 뜯었다.
조금 비린내가 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내가 요리사도 아니고 훌륭한 맛을 기대하는 건 사치일 뿐이다.
커다란 덩어리를 씹었더니 금세 배가 찼다.
'제대로 훈제되려면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할 테니까...'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양의 고기를 걸어 뒀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알다시피 다음 마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새로운 식량을 보급할 수 없다.
고작 식량이라고 해 봐야 마을에서 사가지고 온 전투식량 정도가 다라는 말이다.
'그 말은 즉. 탑에서 식량은 곧 돈이요, 권력이라는 거지.'
심지어 그 식량이 고기라면 말할 것도 없다.
'다음 마을에서 괜찮은 장비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돈을 많이 벌어 놔야 해.'
그리고 어느새 맛있는 냄새를 맡았는지 오크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조금 그런데.'
동족상잔.
사실 오크들이 동료를 잡아먹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지만, 내 눈으로 그런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타닥- 타다닥
내 검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숫자는... 일곱. 꽤 많다.'
나는 지체 없이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파각!
취에에엑!
[힘 0.4를 포식했습니다.]
푸훅!
꾸에에엑!
[힘 0.53을 포식했습니다.]
나는 빠른 속도로 오크들을 쓰러트렸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녀석까지 쓰러트린 순간.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 다음이다.
[20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포식자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포식자의 새로운 능력이 개방됩니다.]
[포식 포인트 10,000p로 첫 번째 능력 포식 슬롯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내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허억.. 허억.. 빡세잖아! 더럽게 빡세다고!"
처음 거대 모스키토를 사냥하고 기쁨에 빠진 것도 잠시.
북쪽으로 향할수록 등장하는 강한 몬스터들에 그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젠장! 모기는 미끼였어. 무슨 괴물 지렁이에 자동차만한 두꺼비는 또 뭐고!"
파티원 한 명이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닐까요? 사실 코볼트들에 비해서 덩치만 컸지 그렇게 어려운 것 같지는 않은데요."
최현서가 조금 틱틱대며 말했다.
저 파티원이 지금 강민을 향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는 건 최현서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뭐요? 코볼트? 이게 어딜 봐서 코볼트야?"
"아니, 그러면 강민 씨가 우리를 속이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최현서도지지 않고 쏘아댔다.
"허. 강민 씨고 뭐고 죽었을지 어떻게 알아? 지금 파티 목록에서 이름도 흐릿해졌잖아요."
"이..."
최현서가 말을 멎었다.
파티 목록에서 이름이 흐릿해지는 경우는 두 가지다.
죽었거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죽긴 왜 죽어! 강민 씨가 이런 데서 죽을 사람 같아요?"
"낸들 알아요? 나는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그만!"
결국 보다 못한 리더가 그만, 이라고 외치며 싸움을 제지했다.
"하아.. 저기요 주강현 씨."
주강현.
파티 리더의 이름이었다.
"왜."
"우리 동쪽으로 가 봐요."
"안 돼."
"아니, 진짜. 한 번 가 보자니까? 사실 동쪽이 더 꿀천지일지도 모르잖아."
"..."
리더가 한숨을 내쉬며 파티원들을 돌아봤다.
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혹시 다들 같은 생각이야?"
주강현의 물음에 파티원들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니까.
그때 한 명이 말했다.
"가 보죠. 동쪽으로.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요. 혼자서 동쪽으로 가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 말을 듣던 리더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봐."
"말이 안 되잖아, 말이. 혼자서 6층을 돌파한다고? 우리 아홉이서도 쉽지 않은데? 확실해. 동쪽이 훨씬 쉬울 거야. 그러니까 혼자서 독식하려는 거겠지."
"내 생각도 같아. 뭘 아는 척 떠들던데, 분명 밖에서 탑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혼자 꿀빨려는 거 같다니까?"
한 명이 총대를 메기 시작하자 파티원들의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
하지만 여전히 주강현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최현서를 바라봤다.
"어쩌시겠습니까. 아무리 제가 리더라고 해도 이 사람들이 모두 원하는데 독불장군처럼 밀어붙이기는 힘들어서요."
"...아.. 정말."
최현서는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강민 씨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게 없는데...'
그러면서도 저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히 초면이었고, 저들은 강민의 도움을 받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 하나만 약속해요."
최현서가 파티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동쪽에 갔는데 강민 씨 말대로 서쪽이 꿀밭이었다는 게 밝혀지면.. 앞으로 강민 씨 말에 복종해요."
"...허, 참."
자신감 넘치는 최현서의 말에 파티원들이 혀를 차고 탄식을 쏟아냈다.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리더 주강현의 말에 파티원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내 파티원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좋아. 그러자고.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아뇨. 앞으로 당신들도 무조건 강민 씨 말이 옳다는 걸 알게 될 걸요?"
"흐.. 가보면 알겠죠. 갑시다, 주강현 씨."
"그래. 우선.. 가보죠."
주강현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동쪽을 향해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봐라, 봐. 분명 동쪽은 꿀밭일 테니까.'
파티원들은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지도 못한 채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