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난전의 시작
“이렇게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파흐트 계 7인의 로드 중 한 명인 엘파타르는 오랜만에 본 것도 있지만 꽤나 수척해진 인상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척 하더니 영 상황이 안 좋군 그래.”
세하는 그런 엘파타르를 보고서 위로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단 엘파트르의 협조로 세하가 원한 전력들이 파흐트 계의 차원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신성하고도 따스한 햇볕이 내리 쬐이는 가운데 그들이 현재 캠프를 설치하는 곳은 한 신전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소수 인원으로 와도 좋은 건가?”
엘파타르는 세하와 함께 온 인원들을 보고서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헤러커와 그레이스. 전 엑펠트의 개별개체 둘과 최근에 엑펠트를 감지할 수 있게 된 아이에르. 이렇게 4명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차원 녀석들을 우르르 달고 오랴? 그건 너희들도 싫어할 일이지. 영적인 파장도 안 맞을 테고 말이야.”
세하는 그렇게 둘러보더니 아이에르에게 말했다.
“최대한 결계를 칠 수 있겠어?”
“네. 해볼게요.”
아이에르는 제법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거기에 엘파타르가 난색을 표했다.
“뭔가 주둔할 수 있는 장소를 섭외해 달라고 했더니 더욱 알 수 없는 짓이로군.”
“그렇다고 너희 측 병력이 많은 것도 아니잖냐?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엑펠트한테 쭉 밀려버린 게 누군데?”
“........”
세하가 날카롭게 받아치자 엘파타르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래도 최근까지 엑펠트의 파흐트 계 침공 주 전력으로 활약했던 그레이스가 있었고 헤러커 또한 자유롭게 오가면서 활동을 했었다. 그렇기에 세하로서는 제법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렌딩 포인트를 잡을 수 있던 것에 대해서는 감사해. 많이 밀렸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반격할 가능성은 남긴 거니까.”
세하는 진심으로 말했다. 하지만 엘파타르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저 저주 받을 것들이 같이 있는 것이 수상하군.”
“그래? 하지만 저녀석들도 엑펠트 한테 버림받았어. 저 정도 되는 녀석들은 대충 써먹고 버릴 정도로 엑펠트가 강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 아무튼 배신할 걱정은 없으니까 염려 붙들어 매. 물론 여차하면 네가 해치워도 괜찮고.”
세하는 여유롭게 웃으며 엘파타르에게 말했다. 하지만 엘파타르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더욱 진지한 표정이 되며 말했다.
“우리스께서 그대를 뵙고자 하신다.”
“우리스? 너희들의 주신 말인가?”
세하는 두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세례니 가호이니 하는 걸 받을 생각은 없는데.”
그리고 바로 나온 대답에 엘파타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의 존재는 우리와는 너무도 다르다. 나쁘게 말하면 혼탁한 존재라는 거지. 그러니 우리 주신의 축복이 통할 지도 의문이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라.”
엘파타르의 솔직한 말에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렇긴 하지. 그럼 얼른 일을 해야 하니 먼저 알현을 해보실까?”
세하가 조금은 경박한 투로 말했지만 엘파타르는 벌써 몇 번째 인지 모를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면서 주변 지형지물이나 동료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세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지구의 민세하라고 합니다. 미천한 몸이.......”
그리고 나름 예의를 갖춰 말하려고 하자 갑자기 공기가 진동하며 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 예의는 필요 없다. 그대는 이곳의 존재가 아니니까.’
“오오.”
세하가 머리를 들어 보니 정말 천상의 신이 생각나는 존재가 하늘 저편에서 크고도 성스러운 빛을 발하며 존재하고 있었다.
‘정말 전형적인 신이라고 할 만할까?’
적당히 완숙하고도 너무 나이 많지도 않고 자상하면서도 마냥 쉬워 보이지 않는 인상의 남자라는 게 세하의 평이었다. 아무튼 그 대상인 파흐트 계의 신 우리스는 엘파타르와 마찬가지로 환한 금발을 지니고 있는 터라 더욱 빛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대가 우리 세계에서 온 것을 성대히 환영하고 싶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아무튼 우리스는 제법 유감을 표하고 있었다. 거기에 세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것도 다 우리 세계도 살려고 하는 짓이고 그 쪽 세계도 살릴 수 있는 것이니 하는 일이지요.”
‘그런가? 하지만 이곳은 그 간악한 것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곳. 솔직히 나의 신위도 언제 끊어질지 몰라 위태롭기만 하다.’
우리스는 여전히 표정이 풀리질 않았다. 그에 반해 세하는 점점 미소가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변수가 필요한 거라고 봅니다. 적어도 제가 움직임으로서 반격의 계기가 마련될 것입니다. 케나아찰 계의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그렇게 세하가 낙관론을 내놓자 우리스도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그렇겠지. 하지만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엑펠트의 공세는 상상을 초월하니까.’
우리스와의 대면은 그걸로 끝났다. 다시 캠프의 모습이 보이자 세하는 미련 없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평온하네요.”
세하는 느와르레이드 슈트로 비행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놀랍게도 루이제가 모습을 드러낸 채 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세하는 말하고 말았다.
“기분 이상해.”
물론 실체가 없는 사이킥 생명체이자 AI 이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습이 이렇게 드러난 상태에서 잘도 공중에 떠다니는 광경은 세하로서는 영 적응하기 힘들었다.
“요즘 들어. 멘탈 케어가 필요하신 것 같아서 이렇게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그 반면에 루이제는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무튼 물리적인 실체가 없어서 머리칼의 휘날린다던가 하지 않아서 세하는 더욱 괴리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네 말대로 너무 평온하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쾌청한 하늘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히 평화로운 광경이라서 세하는 서서히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스터의 계획대로 엑펠트에 관련된 이들이 발을 딛었기 때문에 반응이 나올 거예요.”
루이제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하는 좀 더 움직이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세하는 순간 떠나기 전 엘파타르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이것의 풍경은 너무도 평화롭다. 하지만 그 뿐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 말을 떠올리니 지금 보이는 풍경이 수상해보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온한 풍경. 아무리 보기 좋은 것이라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위화감이 들기 마련인지라 세하는 결정을 내렸다.
“루이제. 난리 한 번 쳐야겠어.”
“역시 그래야겠죠?”
루이제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팔짱을 낀 채 세하를 바라보았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보였던 제복 차림인터라 그 상태로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이상할 법 했지만 이제 세하의 시선은 다른 쪽으로 향해 있었다.
파치치칙!
슈트의 양 어깨에 4개의 포문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끝에서 바직거리는 전류의 파장이 일어나고 있었다.
콰르르릉!
블릿츠 캐논이 발사 되었다. 그리고 그 뇌격의 격류가 그대로 대지를 찢어발겼고 세하는 원하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키아아아!
순간 매서운 섬광이 일어나며 회색으로 물든 존재들이 튀어 올라왔다. 어찌 보면 천사와도 같은 존재들이었지만 하나 같이 회색빛을 띠고 있는데다가 어딘가 뒤틀린 면상이나 날카로운 손톱이나 돌기 등등이 전면에 돋아 있는 살벌한 모습들이었다.
“역시나 나타나는 군.”
도리어 세하는 미소를 지었고 루이제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조소했다.
“추악해요. 어차피 저는 저들에게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안 느껴지니 구경하도록 할 게요.”
루이제가 그대로 지켜볼 것을 선언하는지라 세하는 바로 시선을 달려드는 적들에게 향했다. 엑펠트 그 자체인지 융합체인지는 몰랐고 그냥 세하는 근처에 온 적은 베었고 멀리 있는 적에게는 쏘았다. 계속 분출되는 분수 마냥 적들이 달려들었지만 세하는 흔들림 없이 달려드는 존재들을 처리해버렸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다시 공기를 울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한 명이기 보다는 여러 존재가 뒤엉켜서 울리는 지라 세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겠냐? 네놈들 잡아 조지려고 온 아주 쩌는 존재시지!”
그래서 세하는 멋대로 외쳤다. 그러자 뜻밖의 반응에 놀랐는지 답이 없었다.
“왜? 할 말이 없냐? 하긴 없을 거야. 네 놈들이 하도 잘나고 쎄서 이곳을 집어 먹은 줄 알았지? 그런데 내가 왔다 이거다! 네 놈들이 써먹다가 쓰레기처럼 버린 녀석들 하고 말이야! 기분 나쁘면 한 번 덤벼봐!”
세하는 정말 내키는 대로 말했다. 그러자 주변 공기가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광오한 자로구나.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격렬한 외침이 들리기 무섭게 앞서 나타났던 회색의 천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 외에도 거대한 빛의 거인이나 드래곤의 모습도 나타났다.
“와아. 이거 본격적인데?”
세하는 적 병력의 구성을 확인하면서 표정이 좋지 못했다. 본래라면 더 없이 빛나고 천상의 존재들이라 할 만한 했지만 지금은 하나 같이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그 표면이 형태가 어딘가 일그러지고 변질이 되어 있었다.
‘사실 융합체나 변이체나 별 차이는 없지. 엑펠트 놈들에게 조종당하는 건 똑같으니까.’
게다가 엑펠트 본체는 감지가 되지 않았다. 프로타 에고가 직접 나서는 거라면 그 특유의 재수 없고도 강렬한 느낌을 세하가 기억하고 있는 터라 세하는 일단은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움직여야 했다.
“루이제. 일단 확실하게 해야 겠다.”
세하의 말에 루이제는 이번에는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세하의 슈트가 빛에 감싸이더니 이내 육중한 공중형 플롯 병기로 변해버렸다.
“싹 쓸어버려.”
눈앞에 멀티 락온 시스템의 디스플레이가 어지러울 정도로 떠오르고 있었다. 거기에 루이제가 바로 움직였고 웨폰 컨테이너가 순식간에 열리며 그 안에서 수많은 미사일들이 꼬리를 물며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그와 동시에 세하는 디스트로이어 플롯을 움직였다. 이미 상부에서 4개의 보조암이 튀어나왔고 그 끝에는 고출력 사이킥 블레이드의 검날이 튀어나오며 걸리는 모든 것을 베어버리고 있었다.
가히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체였다. 게다가 루이제의 보조가 확실히 이뤄지고 있어서 세하는 별 힘 들이지 않고 달려드는 변이체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계속 이렇게만 갈 리가 없겠지.’
세하는 이렇게 몸은 격렬하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차갑게 유지되고 있었다. 계속 달려드는 변이체들 사이에서 비수를 숨기고 있을 존재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콰앙!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눈앞에 있던 빛의 거인의 머리통을 부수면서 강렬한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물론 디스트로이어 플롯 자체에도 공격을 반사하는 리버스 필드가 쳐져 있는 터라 어렵지 않게 막아냈지만 세하는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적을 보고서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이게 뭐냐?”
“뭐긴요. 표절이죠.”
루이제가 평소 같지 않게 음성을 직접 내서 말할 정도였다. 아무튼 공중에 뜬 상태로 보이는 적은 현재 세하가 가동 중인 디스트로이어 플롯을 닮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 풀롯 형태의 적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다시 빛의 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세하로서는 그리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세하가 플롯 형태의 적에게 신경이 분산되자 다른 변이체들의 공격이 수월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거기에 세하는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젠장!”
어렵사리 들러붙는 변이체들을 떨쳐내며 리버스 필드의 반탄력을 최대로 올려서 발동하자 몰려들던 변이체들이 순식간에 쓸려나갔지만 플롯 형태의 적이 바로 정면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파치치칙!
물론 세하의 디스트로이어 플롯의 기능을 완전히 흉내 내진 못했는지 뻗어오는 빛의 칼날은 하나 뿐이었다. 그래서 세하는 4개의 보조암에 사이킥 에너지를 가득히 담아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하지만 그 순간 세하는 갑자기 적의 전면부에 금이 가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