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두 만남
“루이제?!”
세하는 너무 놀라서 황망히 그녀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이제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처럼 붉은 제복 차림으로 차갑게 레이린을 쏘아보고 있었다.
“레이린 리 씨?”
“네넷?!”
레이린 또한 루이제 때문에 화들짝 놀라고 있었다. 그런 레이린의 반응에 루이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시 붉은 보석 같은 눈으로 레이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의 능력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아... 네... 그거야.......”
“협력자이기에 당연하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안 믿어요. 지금이야 어찌되었든 당신은 엑펠트가 본질이기 때문이죠.”
레이린이 어찌 대답하려 했지만 루이제는 대번에 말을 자르고 자신이 할 말을 했다.
“우선 제 소개를 하죠. 마스터의 전생 때 마스터의 PLB 기어였던 엘렉티오의 AI였고 지금은 사이킥 생명체인 루이제라고 해요.”
“A... AI요? 거기에 사이킥 생명체라고요?”
레이린의 놀람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세하는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지켜볼 뿐이었다.
“네. 마스터에 의해 각성했고 성장했어요. 그래서 마스터의 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죠.”
“그... 그랬군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강함이 설명되는 군요.”
루이제가 여기까지 말하자 레이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빨리 이해를 한 것 같은데 루이제는 그런 레이린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두 눈에서 붉은 광선을 쏠 기세로 더욱 매섭게 눈총을 보냈다.
“당신한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에요.”
“네?”
그리고 이어지는 루이제의 말에 레이린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검은 눈에 담긴 감정은 여전히 놀라는 기색이 역력해서 세하는 끼어들까 고민이 될 정도였다.
“마스터의 힘을 파악해서 뭔가에 쓰려 한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당신의 근원인 엑펠트에요. 지금은 본래 레이린 리라는 인간의 육체에 정착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 당신의 근원이 들고 일어날지 모른다는 거죠. 저는 이번에 헤러커의 등장도 신경 쓰여요. 이 모든 것이 마스터의 전생과 달라져서 걱정이 된다는 거죠.”
“......”
레이린은 처음과는 다르게 루이제의 말이 이어질수록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루이제도 그걸 눈치 채지만 일단 시작한 말을 마무리 지었다.
“마스터는 제가 철저하게 지킬 거예요. 마스터가 전생 때 어떤 활약을 해왔고 길을 걸어왔는지 조금이라도 아신다면 이해하실 거라고 봐요. 그러니 제가 앞으로 당신을 지켜볼 거예요. 저는 솔직히 제너럴 마이트의 알페렌도 믿지 않아요. 제가 믿는 건 오로지 마스터뿐이에요.”
루이제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가만히 레이린이 말하길 기다렸다. 레이린은 잠시 세하를 바라보고 다시 루이제의 두 눈에 시선을 맞췄다.
“AI가 사이킥 생명체로 각성할 정도면 민세하 헌터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가네요.”
그렇게 운을 떼더니 레이린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민세하 헌터님을 생각하시는 마음도 잘 알겠고요. 그리고 그만치 책임감을 느끼시는 거겠죠?”
“책임감이요?”
루이제는 스스로가 생각지 못한 질문인지 되물었다. 그러자 레이린은 긍정했다.
“네. 책임감이요. 작금의 엑펠트 사태나 게이트 문제 등등이 자신에게 비롯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에요.”
“.......”
이번에는 루이제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자 레이린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허공에 손을 그었다. 그러자 항상 했던 대로 가상의 화면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지난 번 제너럴 마이트가 의뢰한 균열지대에서 가져온 코어에요.”
코어라는 말에 세하는 두 귀가 쫑긋 서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가상화면을 통해 펼쳐지는 모습들은 수많은 모습들을 담고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 생활상 그리고 온갖 실험을 통한 데이터의 분포 등등 복잡하다 못해 수 없이 얽혀 있었다.
“엑펠트는 모든 것을 흡수하고 융합하고 지배하려 들어요. 여기 나온 모습들은 그 흡수하고 합친 것들에게 빼낸 기억들이지요.”
“지금 그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죠?”
루이제가 한층 날카로워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레이린은 도리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루이제 씨가 본질을 알라고 하셨잖아요. 그 의미에요.”
“?”
“그래요. 저는 원래 한없이 군체를 이루는 엑펠트의 일원이었어요. 하지만 민세하 헌터님과 루이제 씨로 인해 상당한 심경의 변화를 이루었고 레이린 리의 육체를 취해서 다른 존재가 됐어요. 하지만 제 본질을 잊지 않았어요.”
레이린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자신의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제가 엑펠트던 당시 희생시킨 많은 이들의 마음도 기억하고 있어요.”
“.......”
그런 레이린의 모습을 바라보는 세하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레이린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더 나빠지지 않게 노력할 거예요. 물론 루이제 씨는 믿지 않으시겠지만요. 지금 제 마음은 그래요.”
“뭐 일단 알겠어요.”
루이제는 더 이상 추궁할 마음이 없는지 뭔가 김이 샌 표정을 지었다.
“마스터는 어딘가 호구 같은 이미지라서 좀 걱정이 되요.”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세하는 버럭 화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레이린 씨가 뭔가 이야기를 하면 바보 같이 웃으면서 반응하잖아요.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루이제는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러자 레이린은 머리 위에 물음표가 그려지고 있었다.
“간 거예요?”
“아니. 지금 모습만 안 보이는 거야. 내가 있는 곳에 루이제가 있고 다 지켜보고 듣는다고 보면 돼.”
세하도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레이린의 표정에 걱정하는 감정이 물씬 풍겼다.
“앞으로 민세하 헌터님 뵐 때마다 조심해야겠네요.”
“뭐 괜찮아. 이 녀석이 이렇게 나와서 말한다는 건 너한테는 솔직하겠다는 의미니까.”
세하는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루이제의 음성이 그의 머릿속을 때렸다.
-앞으로 계속 지켜볼 거예요.
*
그렇게 레이린과 루이제가 대면하고 나서 다시 1주일이 흘렀다. 세하는 그 주는 정말 뜸할 정도로 나가지 않았다.
-그 정도로 게이트 상황이 안정된 것 같네요.
루이제가 각종 네트워크에 접속해 정보를 분석하면서도 세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세하는 안전가옥 내에 있는 헬스 기구 등을 통해 단련하면서 말을 받았다.
“그렇네. 하지만 항상 뜸하고 나면 일이 터지는 거 같단 말이야.”
-그렇겠죠. 하지만 마그티스나 벨레토르 후작을 통한 정보는 별 다른 동향이 없는 걸로 드러납니다.
루이제의 보고대로였다. 린시지오는 정말 세하의 활약 덕분인지 서서히 엑펠트군을 몰아내면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 덕에 린시지오 계에서부터 게이트가 열린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거기에 세하가 출격하지 않아도 다른 헌터들이 과잉대응에 가까울 정도로 빨리 움직여서 별 탈이 없었다.
“다른 헌터들이 제대로 움직여 주니 다행이네.”
아무래도 지난 부산에서의 일과 세하가 린시지오에 다녀온 뒤로 경각심이 많이 높아진 것 같았다.
-게다가 최근 게이트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슈타크카이트 계의 존재들이 대부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구의 헌터들이 지겹도록 상대해온 몬스터들이라는 거죠. 게다가 A급 이상의 몬스터들도 드물었습니다.
루이제의 이어지는 보고에 세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럼 슬슬 위험해질 시기라는 거겠지? 루이제. 혹시 케나아찰이나 파흐트 계에 대한 정보는 없지?”
세하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루이제를 통해서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네. 물론 마그티스를 통해서 파흐트 계의 엘파타르가 정기적으로 연락을 해오고 있습니다. 린시지오 계와 비슷한 상황이고 일진일퇴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케나아찰 계는 거의 정보가 없습니다.
루이제의 보고에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만간 그 쪽에서부터 일이 벌어지겠네. 케나아찰 계는 적어도 엑펠트에게 과반이 점령당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어.”
-린시지오 계에서처럼 마스터가 원정을 가야 할지도 모르죠.
“.......”
세하는 루이제의 의견에 잠시 침묵했다.
“솔직히 생각하기 싫었어. 확실히 이곳과는 다른 세계라는 느낌이 기분 나쁠 정도였지.”
-생각보다 사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린시지오 계의 존재들도 일단은 사회를 이루지 않았나요? 물론 승전하고 나서 서로 목을 따버릴 정도로 과격한 게 문제였지만요.
루이제의 말에 인테르트 왕의 권능으로 다음날에는 다시 살아난다는 걸 떠올리고 세하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워소드에 나오는 광신과 피의 세계가 떠올랐어. 딱 그 놈들 느낌이었다고.”
세하는 예전에 접했던 오래된 SF 판타지 물을 떠올렸다. 그곳 세계를 위협하는 혼돈의 존재들이 있었는데 린시지오는 그 중 한 집단과 이미지가 비슷했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이 마스터에게 우호적이라는 건 고무적인 일이지요.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래. 걱정만 하면 뭐하겠냐. 음?”
루이제가 반응하기 전에 세하의 피부에서 뭔가 소름이 돋았다.
“루이제. 지금 사이킥 에너지 반응이지?”
-놀랍네요. 제가 보고하기도 전에 아시다니요.
루이제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뒤이은 보고는 세하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사이킥 에너지 반응은 아닙니다. 이차원의 게이트 반응에 가깝죠. 하지만 이건 협회의 게이트 캐스터가 예보하긴 어려운 수준이네요. 상당히 미약하고 은밀해요. 하지만 그 은밀함 때문에 저에게 감지될 만한 거죠.
세하의 사이킥 에너지가 강해질수록 루이제의 감지력도 월등히 높아지는 중이었다. 세하는 그걸 이어지는 루이제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헤러커가 올 때처럼 이곳에 근접한 수준은 아니에요. 좀 더 이동해야 할 수준이네요. 아무래도 가보셔야 겠죠?
루이제가 물어보지 않아도 이미 세하의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나를 찾아온 것 같으니 말이야.”
*
세하는 느와르레이드 슈트로 한 20분 정도를 비행했다. 이 정도면 제법 멀리 떨어진 거리이기에 세하는 이번 일이 헤러커 때와는 다른 분위기라는 걸 짐작해야 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거겠지?”
-네. 헤러커는 마스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왔지만 이번 게이트는 뭔가 불확실성으로 움직이는 것 같네요.
헬멧의 디스플레이가 게이트 반응을 잡아내고 이제 확실한 방향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험난한 산맥 속인지라 세하는 조금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어지간해서는 안 올 곳이기도 하네. 나 같은 기동성이 없으면 엄두도 못 내겠어.”
-그 정도로 조심한다는 거겠죠. 일단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으니 좀 더 접근하시길 권합니다.
루이제의 조언에 따라 세하는 저공비행으로 움직였다. 깊은 숲의 가지나 여러 환경요소가 슈트의 표면을 긁어댔지만 어차피 사이킥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인지라 세하는 그런 잡스런 손상은 걱정하지 않고 움직였다.
-케나아찰 계로군요.
그렇게 산속을 좀 헤집고 들어가자 아주 작은 게이트가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금속질의 가시 같은 것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게이트치고는 좀 작은데? 보통 이 정도 게이트면 D급 이하의 몬스터들이나 나오는데 말이야.”
게이트의 크기가 세하의 하반신에 간신히 닿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하는 말과는 다르게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어느새 양손을 사이킥 캐논으로 포구로 변환했고 양 어깨에는 블릿츠 캐논의 포구가 그 끝에서 바직거리는 사이킥 에너지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제가 잘 가르쳤네요. 그런 준비 태세가 아주 마음에 들어요.
“무슨 교관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아무튼 좀 지켜보자.”
그런 상태로 세하는 게이트와 눈을 싸움을 하듯 버티고 섰다. 지금 시간대는 이른 아침이라서 그리 시야에 방해되는 것도 없었고 깊은 산속이기도 해서 등산객을 마주친다거나 하는 돌발 상황도 없었다. 그래서 세하는 경우에 따라서 산을 뭉개버릴 각오도 굳히고 있었다.
-나옵니다.
그리고 수 분여 후 루이제가 말했다. 세하도 게이트에 안력을 집중하며 조금의 위험이라도 보이면 발포할 준비를 했다.
“어?”
하지만 게이트에서 간신히 기어나오다 시피하는 꼴을 보고서 세하는 맥이 빠지는 걸 느꼈다. 루이제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귀여운데요.
“.......”
루이제의 말 그대로였다. 게이트를 통과해서 나온 것은 몸길이가 30cm가 안 될 작은 동물이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등에 가시를 가득 세우고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귀여운 인상의 설치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 존재가 간신히 게이트를 빠져나오더니 아주 가날픈 음성으로 말했다.
“도...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