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우연의 섞임
“감시라니요!”
하지만 이어진 여성의 반응은 세하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저를 어떻게 알았죠? 그 쪽도 각성자에요?”
여성은 세하에게 바짝 다가와 추궁했다. 아무래도 세하가 날카롭게 반응한 것 때문에 그의 사이킥 에너지를 느낀 것 같았다.
-마스터. 저 사람이 마스터를 감시했다고는 안 했습니다.
뒤이어 루이제까지 말하자 세하는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아,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좀 예민해진 터라.”
“그... 그래요?”
그 여성도 세하가 사과하자 오히려 놀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모습이었는데 세하의 머릿속이 제법 아릴 정도의 느낌이 드는 걸로 보아 제법 능력을 갖춘 이로 보였다.
“각성자시라는 데 굳이 감출 건 없네요. 대한민국 헌터 협회 경기도 북구 지부 소속 헌터인 진하연이라고 해요.”
‘역시 협회 소속이네.’
세하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지만 하연은 세하의 그런 반응을 눈치 못 챘다.
“저는 민세하라고 합니다. 얼마 전 파주 A11 구역에 게이트가 발생하는 바람에 우연히 각성했다랄까요.”
“세상에... 정말이네요.”
세하의 이름을 듣기 무섭게 하연은 자신의 단말기를 살펴보더니 감탄사를 터뜨렸다.
“데이터베이스를 조회해보니 얼마 전 조사원들이 다녀갔군요. 그럼 확실히 증명이 되신 분이네요.”
하연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헌터로 활동하실 거죠? 특히 각성자시라면 귀한 인재이니 협회로서는 당연히 헌터 라이센스 등록을 권할 거예요.”
“네네. 곧 해야죠. 하지만 힘이 막 생겨서 아직 어설프니 조심스럽긴 하네요.”
“이해해요. 원래 파주 지역은 게이트가 극히 드물고 A11 구역은 청정지역에 가까울 정도였는데 이번에 게이트가 출몰했으니 난리도 아니었죠.”
하연은 세하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연 씨는 무슨 일로 여기 계신 거죠?”
세하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거기에 하연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원래 고향이 이 곳인데 이번에 A11 구역 사태로 경기도 북구 지부 소속 헌터들 몇몇이 파견 되서 조사 및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지시가 떨어져서요.”
하연이 그렇게 말하자 곧장 루이제의 목소리가 세하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제가 과한 반응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사실 나부터 예민할 만했으니까.’
세하는 마음속으로 루이제에게 사과하고 다시 하연을 바라보았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포니테일 식으로 휘날리는 것이 경쾌하고 기분 좋은 느낌인지라 세하는 하연에게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튼 자주 보게 되겠네요. 앞으로 이곳에서 자주 운동할 거거든요.”
“아. 그래요?”
세하의 말에 하연은 어딘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이곳 호수공원이 뭐랄까... 다음 게이트 출몰 유력지로 지정됐어요.”
하연은 주변 사람들이 들을까 제법 목소리를 낮춰서 세하에게 말했다.
“네?”
“협회에서 현재 파주 전 구역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어요. 본래 게이트가 안 나오던 A11 구역에서 일이 벌어진 만큼 다른 구역도 예외는 아니라고 말이죠.”
“아. 그렇군요.”
“아무튼 세하 씨도 조심하세요.”
세하는 그렇게 하연과 작별했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세하가 호수공원을 나오는데 루이제가 말했다.
“협회가 꽤나 신경 쓰는 모양이네.”
-고로 단련을 더욱 하드하게 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이 그렇게 되냐?”
루이제의 선언에 세하는 영 핼쑥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주거지 근처가 위험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욱 단련을 해야죠.
“내가 말을 말지.”
세하는 일단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난 거지만 협회에 등록을 하기 전에 진하연을 돕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금 일깨우는 것 같은 루이제의 말에 세하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래?”
-네. 일단 세상의 모든 일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하는 법이죠. 아무튼 이곳이 단련하기 좋은 곳이니 그녀도 자주 볼 겁니다.
루이제의 말은 이상할 정도의 울림이 있었다. 거기에 세하가 불길한 느낌을 가지는 건 지나치지 않은 반응이었다.
*
그 뒤로도 단련이 계속 됐다. 며칠 동안 하연을 어쩌다 보긴 했지만 별 다른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그녀부터가 어딘가 초조해하는 기색을 보여서 세하도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았다.
-마스터.
단련을 시작한지 5일째. 아침 단련을 마치고 다시 원룸에 돌아왔을 때 루이제가 제법 심각한 느낌으로 말했다.
“왜 그래? 그렇게 정색하고 부르면 무섭다고.
-헌터 협회의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해 봤습니다.
“.......”
세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마스터?
“아니 뭐. 네가 세삼 대단한 존재라는 걸 깨달아서 말이야. 사이킥 생명체이니 전뇌이니 하는 존재이니 말이지. 그래, 뭘 알아낸 거지?”
-파주 지역의 게이트 출몰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준이 제법 크다는 군요.
이어지는 루이제의 보고는 세하로서도 놓칠 수 없었다.
“대체 어느 정도 길래 그래?”
-혼란이 커질 것을 걱정해서 아직 공표하고 있진 않지만 인근의 군 병력이나 기타 지원을 위한 이동이 잦아지고 있다는 군요. 아침마다 진하연이 어딘가 힘들어 보이는 것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너, 그렇게 말하는 거보니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세하는 루이제와 지내다보니 그녀의 화법에 적응이 되고 있었다.
-맞습니다. 인근의 호수공원부터 대비를 해야겠습니다. 물론 진하연이 보이는데서 말이죠.
“이건 무슨 홍보도 아니고.”
-마스터의 힘이 알려져야 공적도 알리고 앞으로 헌터 활동을 하는데 편해질 겁니다.
“그건 맞네.”
세하는 현실적인 이유를 떠올리고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대학에 안 간 것이 신경 쓰입니까?
“그것도 그렇고... 수입 문제도 간당간당해서 말이지.”
-일단 이번 일부터 해치우고 마스터의 개인사를 상담해드리겠습니다.
“이거야 원.”
세하는 이런 루이제의 말을 언젠가 들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저절로 쓴 웃음이 지어졌다.
“아무튼 큰일을 겪었으니 믿어봐야지.”
-그런 김에 오늘 슈트 적응훈련은 좀 더 난이도를 높이겠습니다. 오늘 밤부터 실전에 들어가야 할 것 같으니까요.
“망할.......”
세하의 입에서 절로 욕이 나오려했다.
*
한밤중의 호수공원은 어딘가 음침한 기분마저 들었다.
본래는 휘황할 정도의 가로등들이 있어서 제법 멋진 분위기였지만 오늘따라 최소한의 불빛만이 확보된 것 같았다.
“이렇게 와도 될까?”
그런 가운데 세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가 처음 장착했던 슈트차림이었는데 공원 안에 들어오기 무섭게 해제해서 평상복 차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네. 협회의 정보나 분위기로 봤을 때 오늘 이곳에서 게이트가 발생할 겁니다.
루이제는 단언하고 있었다. 세하도 시간이 지날수록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루이제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다.
“루이제. 너 저번에 하연 씨의 기운도 탐지했잖아? 지금 게이트도 감지 할 수 있어?”
세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제가 사이킥 생명체이긴 하지만 게이트를 감지할 정도는 아닙니다. 지금 세계에서는 꽤나 그 출현 빈도를 억제하고 비교적 도시 외각으로 그 범위를 줄일 정도는 되었지만......
갑자기 루이제가 말끝을 줄였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아직 마스터의 사이킥 에너지 수준이 떨어져서 게이트 감지는 힘듭니다.
“윽!”
세하는 정곡을 찔려서 얼굴이 흙빛이 되고 말았다.
-고로 정황 정보 등을 조합해서 이곳에 온 것입니다.
“너 마스터를 이렇게 생각하다니 정말......”
세하는 배신당한 기분에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마스터의 지금까지 노력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하를 다루는 것은 루이제였다.
-그러니 오늘 유감없이 실력 발휘해서 협회에 눈도장을 찍도록 합시다.
“알았어.”
세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앞에 보이는 호수를 보았다.
공원을 위해서 만든 인공호수였다. 물론 제법 관리를 해서 오리나 왜가리도 종종 보이는 곳이지만 오늘 밤에는 어딘가 스산해보였고 엷은 안개마저 보이고 있었다.
“여기 인공호수잖아.”
-네 마스터.
“그런데 오늘 이 속에서 제법 큰 괴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야.”
세하는 호수를 보며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마스터께서 많이 불안하신 것 같군요.
“저번에 편의점에 일할 때 그 늑대만 해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고. 하지만 오늘은 더한 게 튀어나올 거 같아.”
-말씀하시는 순간. 진하연이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루이제가 차갑게 말하자 세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침과 다른 복장으로 모습을 드러낸 하연이 놀란 표정으로 세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하 씨?!”
“하연 씨. 반가워요.”
세하는 그냥 반사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하연은 속칭 헌터 슈트라는 헌터들이 몬스터를 토벌할 때 갖춰 입는 복장에 개인화기와 장구류 등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시간에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협회에서 나름 준비를 했을 텐데. 대체......”
하연이 놀라는 사이 그녀의 뒤편에서도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헌터 슈트를 장착하고 각기 무기를 든 모습이 꽤나 긴장이 역력해 보이는 모습들이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제 근처에서 벌어질 일이니 안 나와 볼 수 없더라고요.”
세하는 그런 하연에게 아무 걱정 말라는 듯이 말했다.
“각성자시지만 아직 헌터로 등록도 안 하셨잖아요. 위험해요. 그러니.......”
하연으로서는 합당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변화했다.
‘왔군.’
세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제의 호수. 그 수면 위에 공간의 일그러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크기가 높이는 10미터를 훌쩍 넘었고 그 색까지 붉은 빛을 띠는 것이 무척 심상치 않아보였다.
“게이트 출현! 여기는.........”
하연의 뒤에 선 헌터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통신을 넣는가 하면 각기 무기를 점검하며 당장이라도 전투에 나설 준비에 들어갔다.
“세하 씨!”
그리고 하연은 세하를 물러서라고 불렀다. 하지만 세하는 오히려 좀 더 게이트 근처까지 다가가려고 했다.
“걱정이 많으시겠지만 저는 오늘 헌터로서 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입증해야겠습니다.”
세하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검은 금속질의 슈트가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
그 광경에 하연을 비롯한 헌터들이 멍해졌다.
-슈트의 신체감응도가 70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제법 높은 거지?’
하연과 헌터들을 생각해서 세하는 마음속으로 루이제에게 말했다.
-막 각성한 마스터의 수준을 생각하면 높은 편이죠.
‘말이라도 곱게 못해주겠어?’
-이제 전투가 시작되니 좋은 말은 못 드리죠.
그런 루이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붉게 물든 게이트에서 뭔가가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첨벙!
꽤나 화려할 정도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지라 세하와 헌터들은 우선 뒤로 물러나야 했다.
‘뭐지?’
세하는 보통 게이트가 발생하면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순식간에 호수로 떨어져 내렸고 부글부글 물거품을 일으키며 그것들은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봐. 여기 호수 수위가 어느 정도지?”
이곳이 인공호수라는 걸 아는지 헌터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다른 헌터가 말했다.
“그다지 깊진 않을 텐데. 그건 왜?”
“아니. 저렇게 거품을 일으키며 가라앉는 꼴이 수심이 제법 깊다는 걸 보여주는 거 같아서 말이야.”
헌터들의 말에 세하는 뭔가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루이제.’
-네, 마스터.
‘지금 뭔가 위험한 생각이 들었어.’
-마스터.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한국 말 중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루이제는 세하가 뭔가 더 말하는 걸 막았다.
쏴아아아!
갑자기 세찬 물보라가 일면서 뭔가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몇 없는 가로등의 불빛에서도 제법 길고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존재에 세하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오지게 들어맞는 말이로군.’
세하는 그렇게 속으로 내뱉으며 마음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