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아렌달에서 온 명령에 발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렌달에서는 혁명세력과 엮이지 말라는 지시입니다.
사령관님. 지금이라도 형제단과 이어져 있는 끈을 모두 잘라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형제단에게 지원해 준 식량이나 물자만 하더라도 그동안 얻어 온 정보들에 대한 값은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그만 형제단과의 인연은 끊어 버리시죠."
지휘관들의 말에 발트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형제단을 뒤에서 이용하며 얻어 낸 정보들을 아렌달로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실적을 남겼던가. 아직 아렌달의 영향력이 약한 중앙대륙 왕국들의 정보도 형제단의 도움으로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중앙대륙의 정보를 조금만 더 많이 아렌달로 보내면 자신의 능력을 데우스와 아렌달에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발트는 자신이 헤돈의 뒤를 잇기 위해서는 그만큼 실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형제단에서 지원하고 있던 것이 우리라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지?"
"형제단의 리더인 샌더스도 우리의 정체를 정확하게는 모를 겁니다. 지도자급에서도 극히 일부 인원만이 알고 있죠."
"그렇다면 조금만 더 이용하기로 하자.
혁명세력이 확 일어나기 전까지만 이용하는 거야. 놈들이 선을 넘는다고 생각되는 순간 끊어 버리면 우리와 끈이 닿아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테니까."
"아렌달 상단에는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그람 왕국에 들어와 있는 상단의 관리자들은 저희가 혁명세력과 인연이 닿아 있는 걸 알고 있을 텐데요."
"잠깐의 지원이라면 주둔군이 가지고 있는 물자로도 충분하잖아?
아렌달 상단에는 혁명세력과 인연을 끊었다고 전달하면 되겠지. 아렌달에도 마찬가지로 혁명세력과 주둔군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보고하도록 해."
발트의 지시에 지휘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발트와 한배를 탄 동지들이었고, 아렌달로 돌아가서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람 왕국에서 실적을 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형제단과 혁명세력은 쓸 수 있을 만큼만 쓰고 버린다."
"알겠습니다."
"팍스 백작령은 형제단의 이름으로 해방되었음을 알린다!"
샌더스의 외침에 동지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람 왕국에서는 그래도 힘깨나 쓰는 팍스 백작이었기에 팍스 영지를 점령했다는 것은 형제단에게도 큰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성과를 즐기는 형제단과 달리 팍스의 영지민들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형제단이 말하는 해방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팍스 백작은 영지민에게 가혹한 영주도 아니었고, 형제단이 들어왔다고 해서 영지민들에게 대단한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실패해 왔던 반란세력들처럼 혁명의 결과가 자신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에게 우리의 전과를 알려야 합니다.
그람 왕국뿐 아니라 아스타나 왕국이나 중앙대륙의 다른 왕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지들도 우리의 소식을 들으면 더욱 힘을 낼 수 있을 겁니다."
노아의 말에 샌더스와 동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 선생님의 말씀대로다. 오늘의 성과는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 모두가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성과가 아닌, 혁명의 성과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혁명의 붉은 물결이 더 크게 일어날 수 있도록 혁명 동지들과 오늘의 성과를 나눠야 한다!"
붉은 형제단이 팍스 영지를 점령했다는 소식은 붉은 물결을 타고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귀족들이 지배하는 영지를 그것도 유력 인사의 영지를 해방시킨 붉은 형제단을 따라 혁명세력들도 형제단을 따라 깃발을 세우기 시작했다.
수면 밑에서 움직이던 세력도 붉은 두건을 뒤집어쓴 채 수면 위로 올라왔고, 조심스럽게 기반을 넓혀 가던 이들도 더 공격적으로 자신들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오늘은 저기 있는 마을을 털어 봐야겠군."
"마을을 턴다니? 그렇게 말하면 쓰나? 혁명을 위해 도움받는다고 해야지."
"하하- 맞아. 혁명을 위해 손을 더하는 일이지."
귀족들의 영향을 적게 받는 작은 마을을 거점 삼는다 든지,
"이미 우리의 소식을 듣고 영지를 버리고 도망친 것인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어 갔군."
"그래도 귀족들이 지배하고 있던 영지를 점령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잖아.
우리도 형제단처럼 이러한 성과를 보여 주면 더 많은 동지들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 줄 거야."
영주들이 피신한 영지를 점령해 나가며 붉은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도덕한 행위들도 만만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일이다! 혁명에 동참하라! 우리의 사상에 함께하지 않는 자는 모두 귀족들의 스파이로 볼 것이다."
"무, 무슨 소리요! 우리는 그저 조용히 농사를 짓고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귀족님들의 스파이라니… 절대 아닙니다."
"동지들을 위해 재물을 모아라. 혁명의 물결을 일으키기 위해서 희생하라!"
"당장 우리도 먹을 게 없는데 혁명은 무슨 혁명이야! 우리는 더 이상 희생하고 싶어도 희생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이렇게 혁명에 관심이 없는 평민들도 어쩔 수 없는 흐름에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혁명의 붉은 물결이 멈추는 일은 없었고, 혁명세력은 귀족들의 영향을 적게 받는 작은 마을들을 거점 삼아 지방 영지부터 공격해 나갔다.
그로 인해 여러 왕국에서 피해를 보는 귀족들이 점점 늘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다가는 저 버러지 같은 놈들 때문에 왕국의 기틀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피해를 본 영주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도대체 왕국에서는 언제까지 저들을 가만히 둘 생각인 겁니까!"
"지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혁명세력을 이용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대로 귀족들이 다 죽고 나면 왕국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심할 따름입니다."
피해를 본 귀족 세력들의 목소리에 왕국의 왕들도 더 이상 혁명세력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국왕 폐하. 이만큼 했으면 왕권을 강화하기에 충분히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귀족들의 불만도 어느 정도는 달래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요즘에 영주들이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같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영지가 힘을 잃는 것이 왕국에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란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이제 때가 되었다. 왕국군을 소집하라! 역도들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게 소탕하라!"
"여기 마법 무기를 사용해 본 사람 있어?"
"……"
샌더스의 물음에 동지들은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마법 무기는 왕국에서도 충성심 높은 정예 부대에서나 사용하던 첨단 무기였기에 실제로 사용해 본 사람은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마법 무기가 어떤 무기인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아는 사람이 있어?
"나는 아스타나 왕국의 침략이 있었을 때 왕국군의 일원으로 전쟁을 겪었다. 그때 마법 무기가 사용된 전투를 본 적이 있어."
"그럼 마법 무기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어?"
한 동지의 말에 샌더스와 혁명가들의 시선이 모였다.
"마법 무기는 마나석을 이용해서 만든 무기라고 했어.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공격 마법을 무기로 만들어서 일반인들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거지.
실제로 본 마법 무기는 기사들의 돌진도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그 파괴력으로 인해 농사지을 땅이 망가진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
"만드는 방법 같은 건 모르지?"
"내가 마법사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겠어?"
마법사야말로 권력자들과 밀접한 존재였지 평민들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마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평민들이니 마법 아이템에 대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나마 마법 아이템을 가장 많이 접해 본 사람이라면 아렌달에서 온 노아뿐.
하지만 노아 역시 실생활에 필요한 상품들이나 만져 봤을 뿐 마법 무기에 대해서는 형제단의 동지들보다 더 모르고 있었다.
"왕국에서 군사력을 움직인 이후로 혁명 동지들의 기세가 많이 꺾였다.
그 이유가 마법 무기 때문이라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우리도 왕국군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가져야 한다."
샌더스의 말에 동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시. 그분들에게 조금 더 지원을 부탁해 봐."
"왕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분들도 몸을 사리시는 것 같은데…"
"우리에게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하면 분명 도와주실 거다. 그분들도 우리의 큰 뜻을 지지해 주셨으니까."
"알았어. 네 말대로 부탁은 해 볼게. 그래도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 줘."
조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샌더스는 다시 동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왕국군과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면 더 많은 동지들이 피를 흘리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흘린 피보다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겪어야 할 고통이다.
국왕과 귀족을 몰아내고 평민을 위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일 뿐이다.
내가 가장 앞에서 싸우겠다. 다들 나를 믿고 따라와 줘."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샌더스에 동지들이 눈을 반짝였다. 그 눈빛에 샌더스가 주먹을 쥐고 외쳤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 * *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왕국의 군사들과 혁명세력이 충돌하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고 있었다.
특히 아스타나 왕국같이 호전적인 국가들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듣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흘러갈 줄은 몰랐는데…'
"빅터 국왕의 왕명으로 죽은 평민의 숫자가 1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혁명세력에 가담했던 평민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에게 식사나 정보를 제공했던 이들, 그리고 그들이 거쳐 왔던 마을의 백성들까지 남김없이 다 죽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스타나 왕국에서 활동하는 혁명세력의 이름이 붉은 바람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헤돈의 말에 사람들이 리오를 슬쩍 바라봤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붉은 바람이 어떤 이름이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붉은 바람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이 아렌달에서 추방당한 사상가들이라는 사실 역시 다들 알고 있었다.
"아스타나 왕국에는 아렌달에서 추방된 범죄자들이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아스타나 왕국의 요청대로 그들에 대한 정보 역시 남김없이 전해 줬으니 붉은 바람의 배후에 아렌달이 없다는 것은 아스타나 왕국에서도 인정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붉은 바람에 의해 우리가 피해를 보게 될 일은 없겠네."
"오히려 아스타나 왕국에서도 아렌달이 붉은 바람과 연관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 겁니다. 아스타나 왕국으로서도 아렌달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요."
아스타나 왕국의 붉은 물결은 오래지 않아 끝이 보일 것 같았다.
왕국군의 잔혹함에 평민들이 먼저 나서서 붉은 바람의 잔당을 팔아넘기는 일도 비일비재할 정도였으니까.
"중앙대륙은 어때?"
"그람 왕국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대로라면 아직까지는 아스타나 왕국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얼마 안 가서 똑같은 양상을 보일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혁명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왕국의 군사력을 움직인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
아스타나 왕국에서만 10만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앞으로 중앙대륙에서 죽어 갈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먼 대륙의 일이라도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법 무기를 개발한 책임은 나에게 있었으니까.
'왕들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건가.'
"우리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왕국들에라도 메세지를 보내야겠네.
그래도 불필요한 희생은 줄여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