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여기가 아렌달인가?"
뉴렌달 항구에 첫발을 내딛은 제로스는 자신이 동대륙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타자트 왕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항구와 건물들. 항구를 거니는 사람들의 복식 역시 남대륙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어디나 항구도시는 활기찬 느낌이었지만, 뉴렌달은 왠지 공기마저 상쾌한 느낌이었다.
따로온 수행원들도 시선을 사로잡는 뉴렌달 항구의 모습에 눈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타자트 왕국 일행의 모습에 아론 선장이 다가와 말했다.
"아렌달의 첫인상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들었던 것보다 훨씬 신기하네. 왕국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 너무 많아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소."
"뉴렌달 항구는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지요.
도시 안으로 들어가면 더 재미있을 겁니다."
아론 선장의 말에 제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동력선에 올라탔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바람이 없어도 항해가 가능한 배라니.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것이 실제한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의 감동이 있었다.
그동안 아렌달에 대해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또 다른 감동을 줄 것을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곧 왕자님을 안내할 행정관이 올 겁니다.
그럼 제로스 왕자님의 아렌달 생활이 안녕하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맙소. 아론 선장."
아론의 인사에 제로스는 다시 한번 자신이 타고 온 동력선을 보았다.
아렌달에서는 동력선보다 더 대단한 기술도 많다고 했으니 그런 기술들을 습득해 타자트 왕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행정관이 오기 전까지 조금 구경하고 있어도 괜찮겠지?"
아렌달에서는 귀족법으로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대우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의 귀족님인지 모르겠지만, 그 요청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감히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그래도 이미 가게에 들어온 손님들을 내쫓을 수는 없습니다!"
귀족의 요구를 이렇게 대놓고 거부하고 있음에도 가게 안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놀라지도, 겁먹지도 않는 듯했다.
오히려 제로스 일행에 질책하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눈빛에 수행원들은 제로스의 눈치를 보고는 앞으로 나섰다.
"이분은 멀리 남대륙의 타자트 왕국에서 오신…"
"그만 되었다. 아렌달에는 아렌달의 법이 있다고 하면 그걸 따르겠다."
제로스의 말에 수행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가게 안의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분명 평민이 틀림없는 사람들이 귀족과 시비가 붙었음에도 겁을 먹지 않는 모습에 오히려 자신이 이상한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간단한 식사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배가 가득 찰 때까지 먹었다.
"어떻게 항구의 조잡한 식당에서 이렇게 훌륭한 음식을 내올 수 있는 거지?
왕궁의 궁정 요리사에 버금갈 정도로, 아니 메임 메뉴였던 해물탕은 왕궁에서도 맛보지 못할 음식이었다."
제로스의 말에 수행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을 나오는 걸음이 아쉬울 정도로 대단한 맛집이었다.
가게를 나오고 보니 입구에 걸려있는 '요리대회 우승'이라는 특이한 이력이 눈에 들어왔다.
"검술대회나 사냥대회가 아닌 요리대회라니… 아렌달에는 신기한 대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왕자님."
"아렌달 문화는 워낙 독특하지 않은가."
아렌달 문화를 많이 접했던 제로스도 요리대회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에 신선한 느낌이었다.
'앞으로 이 가게는 자주 찾을지도 모르겠어.'
수행원들도 제로스와 같은 생각인지 자꾸만 뒤를 돌아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었다.
배를 두드리며 선착장으로 돌아오자 일행의 안내를 맡은 행정관이 도착해 있었다.
"그대가 안내를 맡은 행정관인가?"
"그렇습니다. 앞으로 며칠간 제로스님을 안내할 행정관 댄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본 항구의 평민들과 다르게 귀족에 대한 예법이 잘 되어 있는 댄의 모습에 제로스와 수행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럼 도시로 들어가면서 간단한 안내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바로 도시로 들어가자는 말에 제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가 문득 마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말했다.
마차가 아니라면 말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선착장 어디에서 말이 보이지 않자 댄에게 말했다.
"…설마 도시까지 걸어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 제가 설명을 깜빡했군요.
도시에는 마차가 아닌 이것을 타고 갈 겁니다."
"?"
말도 없이 바퀴만 달려 있는 괴상한 철 상자를 가리키는 댄의 손가락에 제로스와 수행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동차입니다."
"이게 말이 없이도 달리는 그 자동차였군!"
댄의 말에 제로스와 수행원들이 자동차를 이리저리 살폈다.
동력선을 타고 왔기 때문에 자동차에 대한 기대도 컸다.
"어떻게 타면 되는 것인가?"
"여기를 잡아서 당기면 문이 열립니다."
"오!"
"타시지요. 뉴렌달로 안내하겠습니다."
* * *
"제로스 왕자 일행은 잘 도착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건 없었지?"
"네. 아렌달의 문화를 자주 접했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아렌달에 대한 지식이 많아서 안내하기가 편했다고 합니다."
"다행이네."
왕족임에도 수행원 몇 명 데리고 오지 않은 것만 해도 제로스 왕자가 어떤 마음으로 아렌달에 유학을 온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왕위계승권에서 멀리 떨어진 왕자인 만큼 정략적인 도구로 이용되어 아렌달에 왔을 수도 있지만, 아렌달에서 공부하겠다는 마음가짐만은 진심인 것 같았다.
"제로스 왕자를 특별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만, 아렌달에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도록 하는 게 좋겠지?
그래야 왕국으로 돌아가서도 아렌달에 좋은 인상이 남을 테니까."
"행정관들에게 말해서 관리하겠습니다."
제로스 왕자의 유학을 허가해 주자마자 다른 왕국들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제로스 왕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다른 왕국들도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할 것이다.
아렌달은 여러 왕국에서 최대한 많은 유학생을 받을 계획이었다.
각 왕국의 주요 인사들이 아렌달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면 아렌달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들의 안위를 위해서 감정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을 볼모로 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들을 각 왕국에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발판으로 삼을 생각이지만 아렌달을 위해서는 이런 요인들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다가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왕국이나 영지를 가지고 아렌달에 투신할 지도…"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한 것 아닙니까?"
"마르코는 엔나 영지를 가지고 아렌달로 돌아왔는데?"
"엔나는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물론 엔나 영지는 아렌달과 이웃이었고, 마르코도 아렌달의 사상에 완전히 물든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또 그러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자신의 왕국보다 훨씬 발달한 문명을 보고 느끼게 되면 동경하는 마음만큼 그 안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흠- 아직 구스강 너머 바깥의 땅도 그대로 있는데, 이러다가 아렌달의 영토가 너무 커지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
"......"
베르겐 왕국과 나르비크 왕국은 아렌달이 독립한 이후에 자유민의 이동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국경 관리를 느슨하게 했다가는 아렌달로의 인구 유출이 불가피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백성은 왕국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력의 근간이 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두 왕국의 조치는 당연한 것이었다.
아렌달 역시 갑자기 늘어나는 인구를 환영하지는 않았다.
이미 아렌달 내부의 인구 증가도 충분했고, 내수시장을 급하게 키우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아렌달의 상황이 좋았기 때문이다.
"몇 명이나 넘어왔다고?"
"어린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300명이 넘습니다."
"국경 관리를 얼마나 허술하게 하면 300명이 넘는 인원이 한번에 넘어올 수 있는 거야?"
"아스타나 왕국을 뒤로 지원하느라 국경의 병력이 빈틈을 타서 넘어온 것 같습니다."
리오의 말에 나는 머리를 짚었다.
남의 왕국의 전쟁을 지원한다고 국경을 허술하게 관리하는 멍청이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나르비크 왕국에서는 아렌달로 넘어온 백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나르비크에서 어쩔 건데?"
"상단의 통행을 제한하지 않을까요?"
"그건 나르비크에서도 좋은 상황이 아닐 텐데?"
"아스타나 왕국을 지원하면서 제법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실수임에도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를 하는 거겠지요."
나르비크의 내부 상황이 좋았기 때문에 백성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놓는 것이다.
"상인길드에서는 이동이 제한될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넘어온 백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르비크로 돌려보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300명이라…
나르비크에서는 자신들의 실수에 대해 어떤 대가도 내놓지 않을 생각이래?"
"소소하게 보상금 정도는 내놓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나르비크로 돌아가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뻔했기에 썩 기분이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보상금이라는 말에 왠지 돈을 받고 사람을 파는 느낌이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겨우 300명을 가지고 이러는 걸 보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생각? 무슨 생각?"
"지금까지 나르비크 왕국에서 저희와 거래할 때는 항상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습니까?
이번 기회에 도망친 300명을 가지고 한 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거겠죠."
"앞으로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난민들을 이용하겠다는 건가?"
사실 나르비크 왕국으로서는 300명을 돌려받아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일 것이다.
백성에 대한 보상금도 준다고 했으니 나르비크 왕국으로서는 명분은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차라리 보상금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나르비크 왕국에서도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한두 명도 아니고 300명이다.'
300명 중에 분명 죽는 사람도 나올 것이고, 죽지 않더라도 노예의 신분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렌달의 백성들이 아니라고 해도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나르비크 왕국에 돌려보내지 말자."
"그들을 받아들여 봐야 아렌달에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누가 아렌달에서 받아들인데?"
"그럼요? 베르겐 왕국으로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리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베르겐 왕국도 나르비크 왕국처럼 자유민의 이동을 막고 있지 않은가?
나르비크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르겐 왕국에서 그들을 받아 줄 리 만무했다.
"기차에 실어서 브레튼으로 보내 버려.
나르비크에는 전부 실종되었다고 하고, 소소하게 보상금이나 챙겨 주면 조용히 입 다물고 있겠지."
"너무 자비를 베푸시는 것 아닙니까? 데우스님께 이득도 없을 텐데요."
"그럼 소문이라도 흘려. 내 명예라도 쌓일 수 있게 말이야.
귀족에게는 명예도 중요하니까.
그리고 이렇게 자비를 베풀다 보면 언젠가는 보답받지 않겠어?"
"과연 그럴까요?"
리오의 물음에 나는 씨익 웃었다.
"두고 보라고. 언젠가 나에게, 아렌달에 위기가 있을 때 백성들이 힘이 되어 줄 테니까 말이야."